독립기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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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기계화 부대. 다만 '기갑' 이라는 명칭과 달리 기계화보병과 기병이 혼재된 부대였다.[1]
이 부대의 시초는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현: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수색대였으며, 이후 수색단으로 승격되면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를 수령하여[2] 한국군 최초로 장갑차량을 보유한 부대가 되었다. 그런데 유일한 장갑차량부대를 수색부대로 남겨두기 아깝다고 생각한 높으신 분들에 의해 12월 10일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3][4] 로 증편,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최선봉으로써 여수시를 탈환했으며 6.25 전쟁 발발 당시엔 병종별로 3개 대대로 나뉘었다.
그 외에 도보수색대대와 그 아래 군견중대를 보유했다.
한강 방어선 전투에선 기동력과 화력이 부족한 국군 부대와 도로 차단에 파견되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연이은 소모전과 대전차전에 휘말리면서 그 수가 점차 줄어 1950년 8월 청송 전투에선 장갑차 3대만 겨우 빼낼 수 있었다. 그 뒤 낙동강 전선 즈음해 제7보병사단을 재창설할 때 수도사단 8연대가 차출되어 떠났고, 그 빈자리에 독립기갑연대가 예속되었다. 하지만 기계화부대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기갑' 명칭의 보병연대(통칭 기갑연대)로 재편되었으며, 흥남으로 철수하는 와중에 남은 장갑차도 상실해 순전히 보병연대가 되어 이후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때에는 알보병처럼 고지를 기어올라야 했다. 그 후 휴전 이후인 1953년 9월 18일 기갑연대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가 2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이 중대들은 훗날 제27보병사단의 모체가 되었다.
그 후 '''같은 사단 내에 제1보병연대가 있음에도''' 제1기갑보병연대라는 해괴한 부대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5] 심지어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수도사단과 예하 연대들이 기계화보병부대로 개편될 때에도 대한민국 육군 최초의 기갑연대라는 자부심으로 "기갑"이라는 명칭을 고수했고,[6] 그렇게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으로 승격됐다.
이후 행적은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참고.
2. 관련 인물
[1] 즉, 현실은 전차 없이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주력이고 이를 기병이 보조하는 부대였으나, '포신만 있으면 땅크'라는 인식, 그리고 과시욕이 합쳐진 결과 이런 명칭이 된 것.[2] 사실 미군 측은 함부로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외형과 탑승원 수, 좌석위치는 전차와 같으나 방어력과 화력이 약한 이 장갑차를 준 것이다.[3] M8 그레이하운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찰에만 특화된 장갑차다. 하지만 '포신이 달려있으면 땅크'라는 인식, 과시욕(정확히는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38선을 순회하면서 전차로 과시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이 합쳐져 이런 명칭이 된 것.[4] 참고로 당시 포병 역시 육본 직할 연대 1개뿐이었지만, 포병연대는 각지의 보병연대에 파견되어 흩어져 운용된 반면, 기갑연대는 끝까지 하나로 뭉쳐 다녔다.[5] 약칭을 "1기갑여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히는 "'''1기갑기보여단'''"이다. 게다가 5군단 예하 독립기갑여단 제1기갑여단과도 다른 부대. 게다가 부대마크에도 적혀있는 공식 영어 명칭은 1st Armor Mechanized Brigade이지만 위키백과 영어판을 비롯한 영어 자료에는 이 부대의 이름이 Cavalry Brigade로 적혀 있다. 연대였던 시절엔 Cavalry Regiment.[6] 기갑이라는 명칭에 집착하는 이유는 국군 최초의 기계화 부대라는 상징성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거라고 하지만 기계화 이전에는 보병연대였고, 현재도 기갑이 아닌 기계화'''보병'''이 주력이기에 "기갑"은 장식에 불과하다. 참고로 미 육군 제1기병사단도 이와 비슷한데, 장갑차나 전차 비중이 기병을 뛰어넘어 사실상 기계화나 기갑 부대가 됐음에도 '기병'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