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전투
1. 개요
청송 전투는 1950년 8월 첫째주 청송에서 대한민국 육군 독립기갑연대와 그에 속한 강원도 경찰 제5대대가 조선인민군 육군 1개사단과 지연전을 벌인 전투다. 이 전투에서 독립기갑연대는 수많은 기갑 장비를 잃었으며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3대밖에 남지 않은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독립기갑연대 제2기마수색대대장 장철부 육군소령은 이 전투에서 대대지휘소가 습격당했을때 포로로 잡히는걸 치욕으로 여기고 자결하였다.
2. 부대 목록
- 대한민국 : 총 2,000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약 5,000명
- 조선인민군 육군
- 766부대
- 조선인민군 육군
3. 독립기갑연대의 청송군 이동
7월 25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육군은 전투 편성이 1개 군단 6개 사단 2개 독립연대[1] 에서 2개 군단 6개 사단 1개 독립연대[2] 로 바뀌었다.
이때 안동의 수도사단과 영덕의 제3보병사단 사이에 80km에 달하는 빈 공간이 생겨 적의 침투로 인하여 아군이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으니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투입할 수 있는 부대를 찾아 봤으나 가용부대는 모두 백두대간의 언덕들 속에서, 동해안의 개천가에서, 그리고 호남의 들판에서 적과 교전하고 있었으니 마침 독립기갑연대가 19일 대전에서 철수해서 대구에 집결했으니 본 연대는 작전 명령에 따라 교전지인 청송으로 전진했다.
4. 전투 개황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은 7월 17일부터 동해안의 요충지인 영덕-강구 선에서 공방의 고전을 겪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 및 미 8군은 제 22연대(연대장 중령 강태민)와 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여 그들의 예봉을 둔화하는데 주효하였으나 영덕-안동 간에 걸친 55km의 산악 및 계곡접근로는 개방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육군본부는 이 간극을 중시하고, 이 무렵에 영동으로부터 대구로 이동 중인 독립기갑연대(연대장 대령 유흥수)를 작명 제 57호(50. 7. 22부)로 제 3사단인 배속하는 동시에 진보로 급파하여 이 간격을 메우는 한편, 이곳에서 공비격멸전을 수행중인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대대장 총경 김인호)를 동 연대에 배속케 하였다.
이 때, 독립기갑연대의 병력은 550명이며 1개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주요장비는 장갑차 4대, 반 장갑차 1대, 그리고 200여의 마필이 있었는데 말은 전투에 방해가 되었던 까닭에 청송(진보 남쪽 5km)에 옮긴 뒤, 대구로 후 송하여 뒷날 기마 군사경찰대대가 사용토록 하였다.
또한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는 병력 400여명으로써 소화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의 병력은 7885명이며, 주요장비는 105mm 야포 4문을 비롯하여 81mm 박격포 16문, 60mm 박격포 27문이었다.
기간 중의 기상은 폭우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때때로 개이기도 하였으며, 산악지대인 까닭에 조석으로 농무가 심하여 수색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지형은 경북 동북부의 준험한 산악지이므로 피아문에 기습작전의 효용을 높일 수가 있었다.
5. 작전계획
독립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7월 25일에 본대에 앞서 진보에 이르자, 연대 지휘소를 진보 초등학교에 설치하였다.
이때, 동 연대는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과는 물론, 육군본부나 좌 인접한 제 1군단(군단장 소장 김홍일)과도 유무선이 단절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이곳에서 공비를 격멸중인 강원경찰 제 5대대장 김인호 총경으로부터 당면한 상황을 청취 하였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26일 아침부터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영양군으로부터 남침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대대는 407고지(진보 동북쪽 2km)에서 이를 맞아 일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2km 남쪽의 339고지를 점령하여 방어하고 있으며, 한편 원전동(진보 동남쪽 12km)에서 34번 도로(진보-영덕간)를 경계하고 있던 제 3중대는 이날, 1개 대대규모의 적에게 공격당하여 진보로 철수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것이며, 또한 『대대의 후방인 이전동(주왕산 남쪽 4km) 부근에 청송을 두 번이나 습격한 제 766 부대의 일부병력과 공비 등 도합 1400명이 준동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연대장은 당면한 정황이 육군본부의 작명을 받을 때 『적은 장비가 취약한 공비』라고 제보 받은 것과는 달리 완전 편성된 정규군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는 26일 23:00에 각각 저지 진지를 점령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6. 전투 경과
6.1. 7월 28일
이날 339고지 전면의 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피난민의 제보로 화매동(원전동 북쪽 2km)에는 북한군으로 보이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으며, 이전동(청송 동남쪽 12km)쪽에는 1000명 이상의 공비가 주왕산(이전동 북쪽 3km)에서 하산하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병력을 분산하는 한이 있어도 현선의 고수, 제 3사단과의 연계, 공비토벌 세 가지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제 2기병대대는 1개 소대로써 사단과의 연계를 이룩하고,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는 1개 중대로써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대의 증원 하에 이전동과의 공비를 소탕하라.』라고 명령하였다.
6.2. 7월 29일
07:00에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각종포화와 더불어 339고지와 31번 도로(영양-진보간)를 따라 일제히 침공하였다.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406고지(339고지 남쪽 2km)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경찰 제 1 및 제 2 양 중대는 200명에도 미달하는 모병으로 빗물이 홍건히 고인 개인호와 조잡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적에게 화력을 집주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의 화력은 더욱 증강되고, 31번 도로로 침공하던 그 일부가 339고지의 서쪽으로 우회하여 대대의 후방로를 차단하려는 듯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세는 급작스럽게 불리하여졌다.
그 까닭은 적을 요격할 예비대(제 3차 연계를 위하여 공치 하였던 제 3도보대대를 추출한 바가 있음)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화매천의 물이 급격히 불어나 잠시라도 지체할 경우에는 동 대대의 후방로가 절단되어 병력을 도섭시킬 기회마저 일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연대장은 동 대대의 철수를 명령하여, 이날 11:00에 273고지-월전 삼거리 간에 제3, 2, 1 중대 순으로 급편진지를 점령케 함으로써 연대의 우 제 1선으로 하였다.
6.3. 7월 30일
적은 전날에 영덕을 재 점령하자, 이를 굳히려 함인지 이날 미명부터 포화를 집중하고 두 l이어 1개 연대 규모로써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연대 주 저항선의 앞을 동서로 흐르는 반변천(화매천의 본류)의 범람으로 도섭이 곤란하자 경찰 제 5대대의 정면으로 주 공격을 집중하였다.
대대장 김인호 총경은 적세를 기만, 유인하기로 다짐하고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밀리는 척 하면서 대대의 정면을 축차 축소하는 한편, 좌 제 1선의 제 1및 제 2 양 중대를 물러나게 하자, 적은 호기를 잡았다는 듯이 떼를 지어 밀려들었다.
이에, 대대장은 즉각 273고지에 주둔중인 제 3중대로 하여금 일제 사격을 퍼붓게 하는 한편 물러나던 양 중대로써 다시 이에 가세케 하니, 함정에 빠진 적의 대대는 화망 속에서 마침내 궤멸하고, 잔재 병력만이 406고지(273고지 동북 쪽 2.5km)로 둔주하고 말았다.
6.4. 7월 31일
이날의 양 인접 상황을 개관하면, 동해안의 영덕을 적에게 다시 약점 당하고, 서쪽의 안동에는 북한군 12사단이 계속 파고들어, 동읍 북쪽 4km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 1군단(군단장 소장 김홍일)지휘소는 단촌(의성 북쪽 8km)으로, 그리고 수도 사단(사단장 준장 김석원)의 지휘소는 무릉리(단촌 북쪽 12km)로 각각 전진하여 낙동강 남안의 방어선이 마련되고 있었다.
6.5. 8월 1일
이날 동쪽의 영덕에서는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이 해지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북한군 제 5사단(사단장 소장 마상철)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서쪽의 안동은 마침내 약점 당하는 바 되어, 제 1군단의 수도 및 제 8 양 사단은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으나 독립기갑연대장(대령 류흥수)은 양쪽과의 통신이 단절되어 이 상황의 변동을 알 수가 없었다.
6.6. 8월 2일
이날 동해안의 영덕은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이 재 확보 하였으나 서쪽의 수도 사단(사단장 준장 김석원)은 안동을 내놓고도 전세가 불리하여 낙동강 남안으로부터 5km 물러나 413고지(청송 서북쪽 10km)-415고지선에 급편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연대(연대장 대령 류흥수)는 양익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오게 이르렀다.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전날 밤에 적개조의 탐색대로서 당면한 적정이 시량동(월전 삼거리 동쪽 2km)에서 활발하다는 것임을 확인하고, 대책을 숙고하고 있었는데, 05:30에 우 제 1선의 강원 경찰 제 5대대장 김인호 총경으로부터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송이골에서 273고지의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라는 급보를 접하였다.
07:00에 적의 포화가 어느 때 보다도 치열하게 집중되기 시작하여, 강원 경찰 제 5대대의 전사상자가 누증하자 부상자의 후송을 빙자한 이탈자가 눈에 띠게 불어났다.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적이 이 같은 기세로 계속 침공한다면, 이날 밤 안으로 후방로가 차단되어, 연대의 고립을 면치 못하리라 판단하고, 261고지에 돌출하여 있는 주력을 먼저 뽑아, 웃돈골(진보 남쪽 2km)에서 남쪽으로 관통한 31번 도로(진보-청송간)에 2조지진지를 점령한 다음,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를 이탈 시켜 연대의 주력과 연계하여 비봉산 서쪽을 점령하기로 결심하였다.
6.7. 8월 3일
이날 아침, 청송에 위치한 독립 기갑연대 지휘소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G-3 박경원 소령을 대동하고 내방하였다.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당면한 피아의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① 본 연대는 제3사단과의 연계에 실패하였고, ② 당면한 적은 1개 연대 규모의 정규군과 1000여명의 공비이며, ③ 탄약만 해결 된다면 능히 현선을 막아낼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한편, 각 대대장은 탐색대를 계속 착출하여 적정을 살폈는데, 제 2기병대대(대대장 소령 장철부) 정면에는 소수 병력이 빈번하게 출현할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에는 새밭골(진보 남쪽 1.5km)에 병력을 집결 시키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6.8. 8월 4일
01:00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야반을 이용하여 야간침투를 기도하였고, 그중 일부가 비봉산 남쪽 8부 능선을 타고 제 3대대와 강원도 경찰 제 5대대 사이를 끊고 동연대의 제 1장갑 및 제 2 기병 양 대대의 지휘소기 있는 목계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경찰로 위장해 보초병을 살해한 다음 제2기병대대지휘소인 어느 큰 초갓집을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했다. 대대장 장철부 소령은 적과 맞서 싸웠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포로됨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결하였다.박익균 중위가 대대장의 시신을 안치하고 대대장 대리가 되었다. 장갑대대본부는 무사히 후퇴 하였다.
한편 제 1장갑 및 제 2기병 양 대대는 04:00부 터 침공하기 시작한 2개 대대규모의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을 벌였으나, 양 대대의 지휘소가 마비된 데다 목계를 기습한 일군의 적이 청송으로 내려오다가 목계로 되돌아가 양 대대의 배후를 찌름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이하게 된 양 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제 2 기병대대를 지휘하던 대대장 대리 박익균 중위는 좌 1선의 제 1장갑대대와 합세하여, 연대의 주력으로 양면의 적을 격파하기로 결심하고 전진하였는데, 속칭 구리곡재를 돌파할 때, 그들의 복병에 협격 당함으로써 375고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대대 대전원이 극도로 피로에 지쳐 있었다.
이리하여 375고지에 양 대대가 합세하자 선임인 제 2기병 대대장 대리였던 박익균 중위는 연대 지휘소와의 합세를 위하여 양 대대를 이끌고 반변천에 도섭하여, 속칭 놋갈(목계 서쪽 3.5km, 지동) 부근에 서주 방어 태세를 갖추고, 청송에 위치한 연대 지휘소로 연락장교를 파견하였다.
6.9. 8월 5일
이날 사단은 새벽에 제 18연대(연대장 중령 임충식)의 지휘소가 습격되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당한 채 주력(제 18 및 독립기갑 양 연대)의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의성군으로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7. 청송 전투의 의의
비록 국군의 주요장비인 M8 그레이하운드를 다수 손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적 진격의 지연에 성공하면서 차후 전황 반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