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역사
1. 전열함
항목 참고.
2. 철갑함
항목 참고.
3. 1890년대~1906년: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철갑함은 그야말로 이런저런 무장을 달 수 있는 대로 주렁주렁 달아놓은 중구난방 군함이었지만, 1890년대 들어서 어느 정도 정형화되게 된다. 11인치 이상의 대구경 주포와 5~6인치 중간포, 그리고 1~3인치 정도의 속사포와 어뢰를 장비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정형화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 들어서 기존의 철갑함(Ironclad)이 아닌 '''전함(Battleship)'''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된다.
4. 1906년~1911년: 드레드노트급 전함
이와 같이 전함이 발전하던 중, 열강들은 러일전쟁 중 쓰시마 해전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때까지 선박들은 방어력이 공격력을 상화했기 때문에 하베이 강을 장갑으로 사용한 배는 격침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는 '''전함 6척이 격침'''되는 굴욕적인 대패를 당했다. 이런 결과에 충격을 받은 열강들은 쓰시마 해전을 분석하게 되고, '''존 피셔 제독'''이 거기서 영감을 얻어 혁신적인 전함을 설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드레드노트였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모든 포탑에서 지휘에 맞춰 동시에 사격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건 삽질이었다. 당시까지는 각 포탑에서 직접 조준해서 사격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어차피 그럴 거면 각 포탑에서 최대한 빨리 장전해 되는 대로 사격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피셔 제독은 '''같은 탄도를 가진 화포들을 동일한 사격제원으로 발포하면 동일한 탄착군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교에서 전문 장교가 각 포탑으로 사격제원을 전달해 '''일제사격'''(Salvo)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여기에 '''협차'''(Straddle) 개념을 도입함에 따라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 때문에 중간포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중간포는 주포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존재했던 것인데, 주포의 명중률이 상승한 이상 사거리도 짧고[1] 화력도 약한 중간포는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따라서 이후의 전함들은 3~5인치의 속사포와 12인치 이상의 대구경 주포만을 장비하게 된다.
또한 기존의 레시프로 엔진이 아닌 증기터빈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속도인 21노트를 달성했고[2] 배수량도 1만 7천 톤을 넘기면서 방어력도 강해졌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구형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각국은 치열한 건함경쟁에 돌입한다.
5. 1911년~1922년: 초드레드노트급 전함
하지만 '''두려울 것이 없던(Dreadnought)''' 드레드노트는 순식간에 구식이 되어버렸다. 드레드노트는 12인치 연장포탑 5기 중 2기는 양현에 분산배치되어 있었기에 한쪽 방향으로는 최대 8문밖에 향할 수 없었고, 이는 건조 도중 급하게 드레드노트급으로 변경된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과 동급이었다.[3]
1910년 영국은 오리온급 전함을 건조하는데, 오리온급은 13.5인치(343mm) 연장포 5기를 모두 선체 중심선상에 배치해 압도적인 화력을 가졌다.[4] 오리온급 전함이 일제사격 시 사용하는 장약량은 드레드노트의 2배에 달했고, 이 때문에 오리온급 이후의 전함들은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는 별도의 분류를 갖게 된다. 초드레드노트급의 분류 기준은 매우 모호하지만 일단 증기터빈의 사용과 포탑의 중심선 배치, 13.5인치 이상의 고화력 등으로 정할 수 있다.
이후 전함은 다시 한 번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집중방어''' 구조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이 네바다급 전함에서 처음 도입한 이 방식은 '''맞아도 상관 없는 곳은 그냥 장갑을 달지 말고, 꼭 필요한 부분만 장갑을 달면 배수량이 줄어드니까 같은 배수량으로도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을 기초로 했다. 이는 현명한 생각이었음이 '''유틀란트 해전'''에서 드러났고, 이후의 전함들은 이런 집중방어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된다. [5]
6. 1922년~1937년: 해군 휴일
7. 1937년~1946년: 2차 세계대전형 전함
8. 1946년~2011년: 현대화 아이오와급 전함
9. 미래?
[1] 쓰시마 해전 이전까지는 사거리의 중요성이 그렇게 부각되지 않았다.[2]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는 14노트, 러시아 발트함대는 11노트로 항해했다.[3] 사실 사우스캐롤라이나급은 증기터빈이 아닌 레시프로 엔진을 사용했고 그 때문에 최고속력도 18.5노트밖에 되지 못했기에, 사츠마급 전함이나 카와치급 전함과 함께 준드레드노트급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델라웨어급 전함 1번함 델라웨어에서도 해결되지 못하고 2번함 노스다코타에 와서 겨우 해결된다.[4] 이 13.5인치 주포는 라이온급 순양전함에도 사용되었다.[5] 물론 이후 전함들 간의 포격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2차 과달카날 해전도 있었으며, 역사상 마지막 함대함 포격전인 레이테 만 해전 중 수리가오 해협 해전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랬든 말든 해군의 주력은 항공모함으로 넘어가 버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