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추격전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라인 연습 작전(Operation Rheinübung)에 따라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의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가 출항하자 영국 해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1941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서양에서 벌어진 작전이다. 결국 영국 해군이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면서 종료되었다.[1]
2. 배경
1941년을 기준으로 영국은 추축국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항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유럽국가였다.[2] 그래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섬나라였고 세계 최강의 해양 제국이었기 때문에 고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수많은 상선들을 이용하여 물자와 원료, 군수물자들을 영국 본토로 가져오거나 또는 주요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독일 역시 이러한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보트와 소수의 수상함들을 이용하여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영국을 완전히 말려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다[3]
1941년 3월, 전함 샤른호르스트#s-3와 그나이제나우의 통상파괴작전이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1941년 5월에는 중순양함 어드미럴 히퍼까지 가담하여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막 취역한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와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비스마르크, 프린츠 오이겐으로 구성된 4척이 동시에 출항해서 전대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렇게 출격할 경우 영국 해군이 수송선단을 전함으로 호위하더라도 이를 제압하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는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출격했을 때 수송선단에 영국 전함이 호위함으로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격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수상함선에 의한 수송선단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귀환후에 영국 공군의 폭격을 맞거나 기관수리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사유로 인해 예정대로 출격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작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력의 저하를 각오하더라도 공격전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우선 출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2.1. 독일 해군의 지원 준비
이같은 작전 목표에 의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지휘를 맡은 해군 대장[4] 귄터 뤼첸스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영국의 함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선을 공격하고 군함과 마주쳤을 때는 가급적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목표를 위해서는 대서양에서 작전중인 유보트 전력과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4월 8일, 뤼첸스 제독은 오랜 친구이자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잠수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카를 되니츠 제독과 파리[5] 에서 만나 회의를 갖고 비스마르크 투입에 따른 유보트 지원을 논의했다. 잠수함대 선임장교가 연락 장교 역할로 비스마르크에 승함, 별도 주파수를 이용한 함대 사령관과 잠수함 전대장과의 상시 교신 등이 결정되었지만, 모든 유보트의 작전 행동은 잠수함 사령부의 명령이나 뤼톈스 제독의 요청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후 독일 해군은 두 군함에 연료와 군수물자, 탄약 등을 보급해줄 수 있도록 래브라도 해협 근처와 카보베르데 섬에 보급선단을 배치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구축함 6척과 함께 발트해를 출항하였다.
2.2. 당시 영국 해군의 반응
이러한 움직임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저항세력에 포착되었고 영국 해군성에 전달되었다. 그 즉시 영국 공군에서 정찰기를 발진시켰으며 5월 21일 베르겐 근처의 피오르에 정박 중인 비스마르크 함과 프린츠 오이겐 함 2척을 확인하였다.
이 사실을 파악한 영국 해군 사령부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이 두 군함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본토함대(Home Fleet)는 막 건조된 전함 HMS 킹 조지 5세 함(KGV),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과 순양전함 HMS 후드, HMS 리펄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10척의 순양함, 12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 정도의 대형 전함은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HMS 후드 함의 경우는 영국 해군 최대의 함선이지만 함령이 20년을 넘고 제대로 된 대개장도 못받아서 낡고 속도도 떨어진데다가 순양전함이라 장갑이 빈약하므로 비스마르크 함을 상대로 비슷한 속도로 추격해서 전면에서 함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후보로는 KGV만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동급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은 막 취역한 상황에다가 민간인 조선소 기술자들이 동승하고 출항할 정도로 포탑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화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기대를 걸 수 있는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 함 역시 막 취역하여 함재기를 딱 한 번 발진시켜봤을 정도[6] 로 준비가 부족하였다.
2.3. 추격 시작
5월 22일에 이루어진 항공 정찰에서 비스마르크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대기중이던 본토함대가 출항하였다. 여전히 독일 해군의 꿍꿍이를 몰랐지만 일단 호송선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노르웨이 북부의 증원병력이나 아이슬란드 상륙을 시도할 것으로 추측한 본토함대사령관인 해군대장 존 크로닌 토비 제독은 KGV와 빅토리어스는 아이슬란드 남쪽의 항로를 수색하도록 하였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덴마크 해협[7] 을 수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외에 다른 군함들도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사라진 독일 군함을 찾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영국 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는 아이슬란드 북쪽과 북극해 사이의 해협에 대한 수색을 명받은 상황이었다. 당시 노포크와 서포크에는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기형이라 탐지거리가 20km 이하였는데, 날씨만 좋다면 차라리 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5월 23일 아침, 서포크의 견시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다. 당시 안개가 끼어있었던 까닭에 독일 군함은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무선으로 발견보고를 한 이후 레이더에 포착된 두 개의 점을 목표로 미행을 시작하였다.
미행을 하던 중에 노포크가 실수로 안개를 뚫고 비스마르크의 10km 거리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포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곧 안개 속으로 모습을 숨겼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양측의 충돌은 없었으며 험난한 북극해를 뚫고 추격이 계속되었다. 이 때 주포 사격의 후폭풍으로 비스마르크의 레이더가 고장나는 바람에, 함대는 선도함을 프린츠 오이겐으로 바꾸었다.[8] 어쨌든 이 두 척이 밤새도록 현재 위치와 침로, 속도 등을 보고해준 덕분에 영국 해군은 대응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해군중장 홀랜드 제독이 지휘하는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요격 명령이 떨어졌다.
2.4. 덴마크 해협 전투와 후드 침몰
공격명령을 받은 홀랜드 제독은 즉시 덴마크 해협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 새벽 5시 35분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으며 5시 49분 양측은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하였다.
후드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홀랜드 제독은 전방을 바라보면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방 함포만으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만약 모든 포문을 열었다면 독일 함대에 비해 함포 위력에서 앞설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영국 해군 입장에선 순양전함인 후드는 낡고 장갑이 빈약했으며 건조중에 유틀란트 해전이 발생해서 해당 해전의 교훈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던 함선이었다. 이런 후드가 배수량은 비슷하지만 20년 후에 건조돼서 최신기술이 집약되고, 대응방어가 갖추어졌다고 판단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상대로 원거리에서 정상적인 함포 교전을 시작하면 독일 전함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후드가 가라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후드는 늙고 약한 전함이 선택하는 방법인 '''근거리까지 돌격해서 치명타 먹이기'''를 비스마르크에게 시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격침될 때까지 영국에서 해당 함선의 정확한 제원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23㎞까지 접근한 후드에서 제일 먼저 사격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나머지 군함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고 함포사격에 나섰다. 당시 뤼톈스 제독은 레더 제독의 훈령대로 비스마르크의 주임무를 상기하면서 반격을 하지않고 후드와 노포크를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 이하 비스마르크 승조원들이 이를 곱게 볼리 만무했다. 결국 린데만 대령은 뤼첸스 제독에게 '''"내 배 꽁무니에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놔둘 순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교전을 시작했다.[9]
한편 후드는 전방에 위치한 독일 군함에 함포를 집중시켰는데 그 위치에 있었던 것은 프린츠 오이겐이었다. 원래 기함인 비스마르크가 전방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배치였으며[10] 독일 함대도 본래 이 배치를 따르다가 앞서의 레이더 고장 건으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이런 배치에 따라 후드가 전방을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적함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착각했을 리가 없다는 반론도 있어서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전에서 장비의 종류를 착각하는건 드문 일도 아닌게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 정찰기는 미국 전함 2척을 발견했지만 이를 신형 중순양함으로 착각하기도 했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쇼카쿠의 폭격기 승무원들이 유조선을 항공모함으로 착각해서 삽질을 했으며 선례들만큼 심한 건 아니지만 미국 정찰기도 야마토와 함께 있는 나가토를 중순양함이라 착각하는 등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중순양함은 크기가 2만톤 가까이 될 정도로 크고 상부구조물이나 포탑의 배치도 전함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형태였던데다 [11] 안개까지 낀 상태였다. 여기에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제원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후드가 목표물을 착각할 여지도 충분하다. 여하튼 공격을 받은 프린츠 오이겐도 함장 헬무트 브링크만 대령의 지휘하에 반격에 나서서 후드에 명중탄을 먹였으며, 중순양함의 8인치 포탄이라 별 피해는 없었지만 이로 인해 후드에는 작게나마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결정적인 목표물로 작용하였다.
6분간의 포격전이 끝난 후 홀랜드 제독은 모든 함포문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좌현으로 변침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변침을 마치기도 전에 비스마르크의 일제사격이 후드의 마스트를 직격시켰고, 그 직후에 포탄 한 발이 머피의 법칙처럼 이미 약점으로 지목된 지 오래[12] 인 후드의 측면장갑 상부에 있는 얇은 경사장갑을 뚫고 '''그대로 탄약고를 관통하여 유폭시켰다. '''
그 결과 후드에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고 겨우 2분만에 두 동강이 나서 격침되었다. 워낙 빠르게 침몰한 까닭에 홀랜드 제독 이하 1,400여명의 승조원 가운데 딱 3명(윌리엄 J. 던대스(William J. Dundas) 소위, 로버트 어니스트 틸번(Robert Ernest Tilburn) 장포수병, 테드 브릭스(Ted Briggs) 신호수병)만 살아남았다. 침몰 직후에는 생존자가 더 있었으나 같이 이동하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마저도 공격받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 구조할 새가 없었고. 2시간뒤 구축함 일렉트라가 현장에 도착해서 3명만 구조할 수 있었다. 홀랜드 제독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함교 근무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브릭스 수병에 의하면 그는 후드가 가라앉는 동안 자신의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으며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드가 격침당하자 독일 군함들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포구를 집중시켰는데, 코앞에서 침몰한 후드를 피하느라 그 잔해에 가려 포격할 수 없었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새로 도입된 4연장 주포탑이 기계적 문제와 선체에 명중한 적 포탄의 충격 등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10문의 주포 중 제대로 사용이 가능한 것은 2연장 주포탑의 2문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가 쏜 주포탄에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교가 피격당했고 함장 리치 대령[13] 은 조타사 1명과 함께 살았지만 다른 함교 근무자들 대다수가 전사[14] 했고, 계속되는 포탑 문제로 더는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리치 대령은 퇴각을 명령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사망 13명, 부상 9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장에서 이탈하였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비스마르크에게 명중탄을 날렸는데 그게 연료탱크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도 연료가 새기 시작했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더는 통상파괴작전을 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손상으로 인해, 기존의 작전 계획을 변경해 비스마르크는 브레스트 항으로 돌아가고, 프린츠 오이겐만 브링크만 대령의 지휘하에 예정대로 통상파괴전을 수행키로 했다. 호위 구축함들은 오래전에 항속거리 문제로 회항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상처 입은 몸으로 홀로 돌아가야 했다.
미행했던 노포크와 서포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불과 8분 만에 후드가 침몰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손상을 입고 홀랜드 제독까지 전사하는 바람에 두 중순양함을 지휘하던 해군 소장 프레데릭 웨이크워커 경이 현장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되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웨이크워커 제독은 사령부에 '''"후드 격침"'''이라는 아주 짤막한 보고를 올리고 현장 정리에 나섬으로써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2.5. 비스마르크와 유보트 부대와의 공조 시도
후드 격침 소식은 독일 해군 본부에도 알려졌다. 5월 24일 오전 되니츠 제독은 서부 해역 사령관인 해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Alfred Saalwächter) 제독[15] 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유보트를 서부 해역 사령부의 의도대로 배치시킬 것을 요청했다.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책임자이던 잘베히터 제독은 이에 동의, 귄터 뤼첸스(Günther Lütjens) 제독의 의도를 파악한 후 유보트 세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뤼첸스 제독은 같은 날 오후 가용한 모든 유보트 전력을 그린랜드 남쪽 해역에 집결시켜 줄 것을 잘베히터 제독을 통해 되니츠 제독에게 요청했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추격할 영국 군함들을 유인하여 유보트와의 협동 작전으로 무력화하려 했으나, 연료유 유출로 인한 계획변경 탓에 성과를 보지 못했다.
2.6. 재추격
한편, 오랫동안 영국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후드가 격침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해군은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16] 그리고 곧 그 충격은 분노로 변했으며, 명령을 받았던 안 받았던 간에 대서양에 있던 거의 모든 영국 군함들이 복수심에 불타서 후드의 복수를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잡아라!!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영국 해군의 자존심을 건 일전이다. 그 놈을 놓친다면 더 이상 영국 해군은 없다.
- 영국 본토함대 사령관 해군대장 존 크로닌 토비 제독
심지어 총리인 윈스턴 처칠이 [17] 직접 나서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놈만큼은 반드시 격침시켜라" 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비스마르크를 잡기 위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영국 본토 주둔 함대 전력이 전부 출동한 것이다.
다행히 서포크와 아이슬란드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연료가 유출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손상을 입어 작전 속행이 어렵다는 사실과, 독일의 모항이나 프랑스나 스페인 또는 독일에 우호적인 어딘가의 중립 항구로 회항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지브롤터에서 순양전함 리나운과 항공모함 아크 로열, 순양함 셔필드와 구축함 6척, 캐나다 북동부 지역인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에서 전함 리벤지[18] 가 출격했는데, 여기에다 개장을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가고 있던 넬슨급 전함 로드니까지 방향을 돌렸으며, 전함 라밀리즈와 중순양함 런던, 경순양함 에든버러는 아예 호송선단을 내팽개치고 함수를 돌려버리는 등, 많은 군함들이 사령부에서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원래 수행중이던 임무 따위는 무시하고 비스마르크 추격에 나섰다.후드 호의 상징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몇몇 소수의 군함만이 비스마르크가 독일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북해 주변을 초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더불어 함교를 피격당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정리를 마치는 대로 서포크와 노포크에 합류하여 비스마르크 추격을 재개했다. 사실 본래 하던 임무를 파기하고 움직이는것은 엄연히 군법 위반에 해당되는데[19] 처칠 총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격침시키라고 지시했고 토비 제독도 어떻게 됐건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한걸 보면 군 수뇌부~정부 선에서 넘어간듯.
한편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영국 함대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에게 함재뇌격기 페어리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비스마르크를 수색하여 손상을 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에 어뢰 한 발이 명중시켰으나 해당 어뢰는 가장 두꺼운 현측장갑부분에 명중해서 별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날 밤 추적중이던 전단이 여전히 고속을 유지하는 비스마르크를 놓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비스마르크가 무선신호를 발신해준 덕분에 방위각 산출을 통해서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때 해군본부에서 자신들이 실컷 위치를 계산해놓고도 현장의 군함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계산하도록 시켰다. 그 결과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가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독일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내렸고 Home Fleet에게 북동쪽으로 변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이것이 잘못된 계산이었고 해군본부에서도 Home Fleet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토비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두 번째 무선신호가 수신된 후에야 자신들이 잘못 계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는 이미 비스마르크와는 약 160km 가량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Home Fleet의 삽질로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재급유를 위해 아이슬란드로 복귀하고, 전함과 항공모함이 대잠방어망 없이 대서양으로 나가는 것은 유보트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 즉시 480km나 떨어져있는 장소에 있던 구축함 5척의 합류를 지시했다.
5월 26일 10시 30분, 북아일랜드에서 날아온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전함 발견 사실을 통보하였다. 보고된 위치를 분석한 결과 KGV 중심의 Home Fleet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216㎞, 전함 로드니를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약 200㎞, 지브롤터에서 출항하여 북진하고 있는 H 부대를 기준으로 북북서로 176㎞ 떨어진 지점이었다. 문제는 이대로 상황이 전개되다가는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루프트바페 전투기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프랑스 영해로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현재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Home Fleet의 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구축함 5척과 H 부대에 소속된 소드피시 뇌격기였다. 이에 따라 H 부대를 지휘하던 제임스 섬머빌 제독은 아크 로열에게 소드피시를 발진시켜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순양함 셔필드는 앞서 나가서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주문하였다. 문제는 아크 로열에서 셔필드에게 내려진 명령이 자신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니라고 무시하였고,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뇌격기들은 이 사실을 모른채 셔필드에 뇌격을 가하였다. 다행히 신뢰성이 극악으로 떨어지는 주옥같은 자기기폭뇌관 항공어뢰[20] 와 셔필드의 교묘한 회피기동으로 피격은 모면하였다.
저녁 7시경, 아까와는 달리 신뢰성이 높은 접촉식 뇌관의 항공어뢰를 장착한 소드피시들이 발진하였다. 이번에는 셔필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엉뚱한 배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셔필드의 인도에 따라 전방 약 19㎞ 가량에 위치한 비스마르크를 조지기 위해 날아갔다. 하지만 당시 상공에 불고있던 엄청난 바람으로 속도가 느렸던 소드피시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밀려나버려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시 순양함 셔필드 상공에 집결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은 비스마르크를 찾아서 떠났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가서 비스마르크에 뇌격을 가하였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셔필드는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함포에 얻어맞을 우려가 있자 즉시 반전하였는데, 어렴풋이 비스마르크가 북북서 방향으로 변침하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보고하였다.
당시 토비 제독은 소드피시 뇌격기 편대장으로부터 공격실패 보고를 받은 직후여서 셔필드가 뭔가를 착각했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것이 남서쪽으로 그대로 가면 안전지대에 갈 수 있는데 굳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북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크 로열에서 어뢰 한 발이 명중됐다고 보고를 번복하였으며, 복귀하던 정찰기에서도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어뢰를 맞고 멈춰섰다는 보고가 올라와 셔필드가 제대로 봤음이 증명되었다.
드디어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에 만족한 토비 제독은 날이 밝거든 전함들을 앞세워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공격위치에 있던 구축함 5척에게 비스마르크를 계속 감시할 것을 주문하였다.
2.7. 독일 해군의 유보트 배치
독일 해군 서부 해역 사령부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대서양 항구 중 한 곳으로 대피하는 데 대비해 유보트로 초계선을 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고, 연료가 부족한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급유를 위해 이탈하면서 대잠방어가 취약했던 영국 해군은 대형 군함들이 잠수함에 농락당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잘베히터 제독과 되니츠 제독의 지시로 초계선을 전개한 유보트 다섯 척은 만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를 지원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베르트 가이제 대위가 지휘하는 U-98은 어뢰가 한 발도 없었고 아이텔프리드리히 켄트라트 대위의 U-74는 영국 해군 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받아 제 속력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 시간에 비스마르크의 전투 해역에 도착하여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유보트는 U-556이었으나, 이 배 역시도 어뢰 발사관이 텅 빈 상태였다. U-556의 함장 헤르베르트 볼파르트 대위는 비스마르크의 교전을 지켜보면서[21][22] 어뢰를 보유한 유보트를 현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애썼으나, 오직 기동불능 상태에 가까웠던 U-74만이 간신히 접근했을 뿐이었다.
U-보트 비밀일기[23] 에 따르면, Type-9B급 U-보트 U-109가 초계에서 돌아오던 도중 기관의 상태도 좋지 못하고 잠항도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함장 피셔 대위의 결단[24] 하에 무리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고 나와있다. U-109는 초계 내내 단 두발의 어뢰만을 발사했기 때문에 어뢰가 충분했지만,기관장의 실수로 잠항심도 신기록(...)을 깰 정도로 깊이 잠수했다가 선체와 엔진이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큰 도움이 못됐다.
2.8. 비스마르크의 최후
[25]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맞은 어뢰는 원래 약한 항공어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하필이면 교체하기 직전 상태라 항구에 새 키가 대기할 정도로 낡은 키가 어뢰를 회피할 목적으로 크게 꺾인 상황에서 명중했기 때문에 키 중 명중지점에 가까웠던 키는 파괴되었고, 인접해 있던 다른 키는 완전히 틀어지며 고정되어 버렸다. 게다가 꺾인 키를 현장에서 다시 수리하거나 폭파시킬 장비와 기술도 없었다. 뤼첸스 제독이 함내 탄약고에서 폭약을 빼와 키를 폭파시켜 방향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나왔다. 그리고 망가진 키를 수리하기 위해 잠수부들을 투입했지만, 물살이 너무 세 접근할 수 없어서 결국 잠수부 투입도 실패하고 말았다. 덕분에 조금만 더 항진하면 독일 공군 항공기의 제공권 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키가 꺾이는 바람에 스크류를 돌리기만 하면 북동쪽의 영국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이후로 비스마르크는 추진기에 의한 조타를 실시해야 했기 때문에 속도를 7노트 이상으로 낼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스마르크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영국 해군이 구축함들을 보내서 밤새도록 비스마르크를 괴롭혔다. 이 구축함들은 비스마르크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 했지만, 구축함들이 쏠지도 모를 어뢰에 피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대응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자포자기한 뤼첸스 제독과 승조원들은 최후를 준비했다. 본국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총통 각하 만세!"라는 전문을 보내고, 승조원들이 유가족들에게 전할 편지 등을 탑재된 공군[26] Ar 196 수상기편으로 보내려 했으나, 캐터펄트가 맛이 가버려 전달하지 못하게 됐다. 이들 공군 파견대 인원들은 최후의 전투의 와중에 정비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
5월 27일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하자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와 도셋셔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였으며, 오전 8시 47분 로드니를 시작으로 비스마르크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도 곧 응사에 나서서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KGV와 로드니는 16인치와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였으며, 중간중간 전함이 전함에 어뢰를 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함교에 명중탄을 맞아 뤼첸스 제독과 참모진이 전사하고 함장 린데만 대령이 부상당하는 와중에도[27]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앉은뱅이라 고정표적 신세가 된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함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고 군함의 마스트는 물론이고 군함의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어 사실상 무력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시 15분이 되자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토비 제독은 영국이 자랑하는 전함의 포격에도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킬 수 없다는 점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다른 군함들에게 어뢰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도셋셔만이 어뢰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가까이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좌현으로 전복되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도셋셔는 총 3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며, 이들 중 1발은 비스마르크가 침몰하고 있을 때 명중한 탓에, 상부 구조물에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영국은 도셋셔가 발사한 어뢰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독일군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에서 멀어질 때 비스마르크에 살아남은 최선임자였던, 주기실장 게르하르트 유나크 기관대위[28] 의 지시에 따라 배의 포기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배수 밸브를 열고 폭약을 설치해 자침시켰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파되어 뇌격처리 하였으나 격침되었다고 말하는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와 히류처럼, 비스마르크의 상황을 생각하면 사실상 영국 해군에 의해서 격침되었다고 봐야 한다.
비스마르크가 침몰하면서, 퇴함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의 생존자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침몰이 확인되자 생존자들의 구조를 시작, 유나크 대위를 포함하여 승조원 110명과 수상기 정비병인 에른스트 카도브(Ernst Kadow) 공군 상병 1명 총 111명을 구조했으며, 승조원 중 1명이 구조된 직후 사망했다. 그러나 후방의 구축함으로부터 유보트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보를 받은 토비 제독이 급히 함대를 철수시켜야만 했기에 구조 작업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중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잠수함이 구조한 3명과 기상함이 구조한 2명을 제외한 생존자들이 북대서양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죽었다. 인근 해역에 있던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도 수색을 진행했으나 생존자를 구조하지는 못했고, 대신 시신만을 수습해 함상에서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다. 함장 린데만 대령은 생존하지 못했는데, 생존자 가운데 유나크 대위에 이은 차선임자였던 4등 포술장교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 대위 등 몇몇이 함장이 배가 뒤집히기 직전에 부상당한 몸으로 밖에 나와 승조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사람은 아니지만, 비스마르크의 마스코트이자 함재묘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구축함 HMS 코사크(Cossack) 함에 구조되었고, 이후 '오스카'(Oskar, Unsinkable Sam)라는 이름이 붙었다.
며칠 뒤인 6월 1일, 단독 행동에 나섰던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함이 브레스트 항에 무사히 입항하며 라인 연습 작전은 종료됐다. 무선 봉쇄로 비스마르크의 격침 사실을 모르고 있던 브링크만 대령과 승조원들은 먼저 온 비스마르크가 자신들을 맞이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가, 입항 후 비스마르크가 격침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3. 뒷 이야기
- 이 추격전에 참가한 함선들의 명단은 대략 이렇다.
- 영국 해군 전함 킹 조지 5세, 로드니, 라밀리즈, 프린스 오브 웨일스
- 영국 해군 순양전함 리나운, 리펄스, 후드(격침)
- 영국 해군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아크로열
- 영국 해군 중순양함 서포크, 노포크, 도셋셔
- 영국 해군 경순양함 갈라테이아, 오로라, 넵튠, 헤르미오네, 아레투사, 버밍엄, 셰필드
- 영국 해군 구축함 아카테스, 앤털로프, 주피터, 엘렉트라, 에코, 이카로스, 펀자브, 마쇼나, 코사크, 시크, 줄루, 마오리, 타타르, 셔우드, 헤스페로스
- 영국 해군 잠수함 H44, 씨라이온, 씨울프
- 캐나다 해군 구축함 아시니보인, 사기네이, 컬럼비아
- 폴란드 해군 구축함 피오룬[29]
- 스페인 해군 중순양함 카나리아스[30]
- 비스마르크의 최후가 자침인가 격침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자신들의 유리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싸우고 있는 관계로 여전히 불명이다.[31] 제임스 카메론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실시한 선체 조사 결과 비스마르크의 선체 하단은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 발표 직후 영국 BBC가 같은 조사를 실시, 영국 순양함이 실시한 뇌격지점에 큰 파공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수선하 방어구조로 볼 때 양자 모두 가능성은 있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독일측의 자침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인 게르하르트 유나크 대위의 회고조차도 영국측의 심문 결과와 전후의 회고 내용이 다르다. 영국 심문 결과는 자침 명령보다 배가 이미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문서 파기와 최종 퇴함만을 명령했다는 것이며, 영미권 전쟁사 개괄서는 대다수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견고하긴 하나 고전적인 구조여서 실질적인 방어력이 높지 않고 배 자체가 과도한 침수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상함용 어뢰를 맞았을 경우 자침이 필요할 정도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전함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다수의 견해이다.
-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1차대전식 방어체계의 발전형으로, 현측장갑이 강력하고 갑판장갑이 상당히 약했다. 특히 갑판장갑의 경우 사실상 대낙각 포탄 및 폭탄에 방어력을 가질 수 없는 얇은 장갑갑판 2-3개로 방호하고 있어서 사실상 스펙만큼의 방어력도 없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정체를 잘 모르던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화력이 일찌감치 무력화되자 포탄 관통력과 명중률을 높일 심산[32] 으로 지나치게 근접해서 난타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100% 발휘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수백발이 맞아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로드니의 경우 전함끼리의 교전이라면 그냥 명중률 문제가 아니라 함정간 충돌까지 각오해야 하는 거리인 2km까지 접근해서 발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포격의 또다른 부작용은, 관통을 해 봤자 침수를 유발할 수 있는 타격은 도저히 입힐 수 없으므로, 관통해봤자 그저 바람구멍만 뚫고 만다는 것이다. 전함의 주포는 부각[33] 을 크게 줄 수 없기 때문에 근거리에서 사격하면 적함의 흘수 아래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34] 이런 경우엔 관통탄이 연료탱크나 탄약고를 건드려 유폭하길 바라거나 함교를 맞춰 지휘부를 쓸어버린 뒤 투항을 유도하는 정도 밖에는 피해를 줄 방법이 없는데 , 전자는 앞서 말했듯 비스마르크의 무식한 측면 방어력 때문에, 후자는 지휘부 궤멸 후에도 독일군 최강의 함선이라는 입장 상 수병들이 전멸하려면 전멸했지 투항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갔다.
- 비스마르크가 빠르게 무력화된 이유는 주포탑 장갑과 바벳이 타 전함에 비해 상당히 얇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탑에 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해서 포탑 측면의 윗부분 절반이 얇은 상부장갑으로 구성되는 바람에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의 절반이 얇은 상부경사장갑을 뚫고 포탑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주요 무장부위가 쉽게 가동불능이 되는 약점을 노출했다. 그래서 초전에서 영국 전함을 협차하여 명중탄을 줄 수도 있었는데 바로 주포탑이 파괴되면서 무력화되었다.
이 부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배의 고전적 장갑구조로 인해 함정 배수량에서 장갑이 차지하는 중량이 지나치게 커져 흘수가 너무 깊어지고, 덤으로 높은 함상구조물 때문에 무게중심이 잘못 배분되면 배의 안정적인 항해능력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장갑을 줄인 것이었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수상함대는 육군이나 공군에 비하여 안습한 상황이었는데, 독일이 자랑하던 최대의 군함 비스마르크가 격침당하면서 더더욱 안습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출격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에는 대서양에서는 유보트와 구축함, 어뢰정, 소해정 등 소형 함정들을 제외하면 소수의 상선을 개조한 가장순양함이나 비밀수송함의 출격만 이루어졌다. 이는 히틀러가 비스마르크 침몰 이후 대형함들의 보전을 최우선시하도록 지시하여 수상함대가 소극적으로만 활동하게 된 탓이 크다.
-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소드피시 뇌격기였다. 심지어 소드피시는 최신 기종도 아니고 1933년에 개발된 복엽기다(!). 이 때문에 이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도 매우 드문 전함간 포격전이었음에도 바다에서 더이상 커다란 배와 대구경 함포가 절대적인 우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단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35]
- 비스마르크가 마지막 교전을 할 당시 유보트 5척정도가 근처에 있었고, 그 중 2척은 현장에 있었으므로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면 아크 로열이 함재기를 출격시키기도 전에 수장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독일군에겐 불행하게도 U-556은 어뢰가 바닥난 상태였고 U-74는 영국 해군의 폭뢰 공격을 두들겨 맞고 심하게 손상된 유보트라 어뢰 발사를 할 수 없어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때 비스마르크와 접촉을 유지하며 아군을 유도하려 애쓴 볼파르트의 전쟁일지는 되니츠 원수의 전쟁 회고록 <10년 20일>을 통해서도 소개되어 있다.
- 비스마르크를 도우려 했던 U-556과 비스마르크는 같은 조선소 출신에 이런저런 사연을 겪으며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진수식 준비를 하던 U-556의 함장은 군악대를 수소문하다 비스마르크의 군악대를 빌려보기로 생각한다. 맨입으론 안해줄것 같아 그림까지 그려가며 '우리 U-556는 어떤 상황에서든 큰 형 비스마르크를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는 기사 서약 형식의 증서를 써 줬는데 비스마르크의 함장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U-556이 바로 눈 앞에서 비스마르크와의 약속을 지킬수 없게 만들었다. U-556은 귀항 후 다음 초계에서 격침되었고 함장 및 승조원 대부분은 생존해 포로가 되었다.
- 덴마크 해협 전투에 참가한 네 주력함의 함장 중, 프린츠 오이겐의 함장 브링크만 대령은 유일하게 종전 후까지 살아남은 함장이다. 비스마르크와 후드의 함장은 격침 당시 전사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은 몇 개월 후 벌어진 말레이 해전 당시 전시했지만 브링크만 대령은 중장까지 진급하여 종전 후 2년간 영국에서 포로 생활 후 석방, 1983년까지 생존했다.
- 비스마르크 승조원들 중 최선임 생존자인 유나크 대위는 전후 재건된 독일 연방해군에 기관장교로 재복무해 대령까지 진급했다.
- HMS 후드 함의 세 생존자들 중 최선임자였던 던대스 소위는 전후까지 계속 해군에 근무해 소령까지 진급했고, 1965년 11월 2일에 부상 후유증으로 불과 42세의 나이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틸번 수병은 1952년 8월에 전역할 때까지 해군에서 계속 복무했고, 후드 격침 후 한동안 HMS 빅토리의 승조원으로 사실상 육상 근무를 하는 등 후방에서 보내다 전함 HMS 퀸 엘리자베스함을 타고 다시 해상 근무를 했다. 전후 HMS 후드 협회가 설립된 뒤 2대 협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95년 2월 24일에 74세로 사망했다. 최후의 생존자였던 브릭스 수병은 CPO까지 진급하며 종전시까지 해군 통신 직별에 종사했고, 이후 늦깍이 장교로 임관해 1973년 2월 대위로 퇴역했다. 틸번에 이어 3대 HMS 후드 협회장을 지냈고, 사망시까지 후드 관련 서적 등의 편찬에 관여하고 기념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8년 10월 4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그나마 싸우다가 최후를 맞은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자매함 이었던 티르피츠는 굉장히 허무하게 최후를 맞았다. 티르피츠가 대전 후반기에 완성된 탓에 큰 위협이 아니었고 실제 작전에도 거의 참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생고생하게 만든 배와 같은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였다. 그리하여 영국은 이 배를 따버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5번의 공중해상 합동 작전 끝에 티르피츠의 구동계가 작살나며 앉은뱅이로 전락했고, 독일은 최후의 방법으로 티르피츠를 갯벌에 안착시켜 고정포대로 사용함과 동시에 수리를 개시했다. 그러나 영국은 멸적의 톨보이[36] 를 떨궜고,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티르피츠는 총 3발의 톨보이를 맞고, 지진폭탄의 강력한 위력에 안착해있던 갯벌이 무너지며 빨려 들어가다시피 뒤집어졌다. 때문에 인양은 커녕 배에 구멍을 뚫고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조차 애를 먹어 사망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 이 추격전을 다룬 조니 호튼(Johnny Horton)의 Sink the Bismarck라는 노래가 있다. 후술할 영화 주제곡이었다고. 최근 곡으로는 2019년에 나온 스웨덴 밴드 Sabaton의 Bismarck라는 노래가 존재.Sabaton의 Bismarck 뮤직비디오는 아래의 월드 오브 워쉽의 제작사 워게이밍넷과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실제로 배를 타고 나가서 선상에서 녹음한것으로 보인다.
- 이 추격적을 다룬 루이스 길버트 감독, 케네스 모어 주연의 1960년작 《Sink the Bismarck》라는 영국 영화가 있다. 여기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으로 나오는 영국 배우 에스몬드 나이트는 1940년에 해군 장교 훈련을 받은 후 대위로 진급, 몇 편의 전시 선전 영화의 주연을 맡은 후 실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술장교로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전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공격으로 부서진 함교 구조물을 맞아 두 눈이 멀었으며, 2년 후 오른눈의 시력을 회복하여 영화배우 경력을 계속 이어 나갔다. 또한 동 작품에서 영국 여장교로 나오는 다나 윈터는 독일 출신이다.
- 해상전을 주제로 하는 게임인 월드 오브 워쉽의 독일 전함 트레일러가 이 추격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포를 쏘는 함선이나, 등장하는 함재기나, 갑판 장갑을 뚫고 유폭되는것까지 거의 일치한다. 다만 동영상에 나오는 영국 함선은 당시에는 아직 후드의 모델링이 없었던 관계로 워스파이트가 대신 격침된다. 또한 여기서 따온 캠페인 이벤트도 개최되었다. [37]
- 전함소녀에서는 역사전 - 전함코어와 발키리 작전으로 구현되었다.
- 벽람항로의 프롤로그가 덴마크 해협 전투 ~ 후드격침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후 2019년 5월 비스마르크의 출시와 함께 진행된 이벤트 해역이 후드 격침 이후부터 비스마르크의 최후까지의 내용이다.
- 함대 컬렉션의 2018년 초가을 이벤트의 후반부가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라인 연습 작전을 다루고 있다.
[1] 자침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주장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격침당한 일본 항공모함들도 격침이 아닌 자침이라고 해야 된다. 영국군 주장대로 어뢰에 의해 굉침했다면 당연히 격침이고, 독일군 주장대로라고 해도 전투 경과에 의해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은 뒤에 퇴함 및 자침 처분을 내린 것이므로 전투에 의한 격침이 맞다.[2]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연방국은 일찌감치 먹혀버렸고 기존 동맹국들인 폴란드 제2공화국, 벨기에, 프랑스와 네덜란드마저 역시 독일에게 먹혀 버린 상황이었는데다가, 심지어 네덜란드의 경우는 '''아예 왕실이 영국으로 피신 온 정도였다.''' 나머지 유럽국가들은 독일에 대항할 국력도 못되었으며 스웨덴이나 스위스는 아예 중립을 표방하는 입장이었고,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있었고 그는 히틀러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때 국내의 사정 어쩌구하며 빼기만 했다. 또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은 가만히 대기만 타던 상황이었다.[3] "아니 그러면 유보트를 대량으로 만들어 썼으면 나치독일이 이길 수도 있었지 않나?"라고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당시 나치독일은 1위가 육군, 2위가 공군, 3위가 해군 순으로 키우고 있었으며 괴링의 미친듯한 태클로 95%로나 만든 항모도 못 쓰게 하는등 지원을 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에도 거함 거포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아서(에초에 Z프로젝트를 통해 히틀러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도 1차대전 참전자였던 히틀러와 국민들에게 1차대전 당시 영국 다음으로 강했던 독일 대양함대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작고 은밀해서 눈에 잘 안 보이는데다가 돈도 많이 먹는 유보트는 더더욱 생산순위에서 밀려났다.[4] 이전에는 중장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40년 9월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므로 라인 연습 작전 시기의 뤼톈스 제독의 계급은 대장으로 해야 옳다.[5] 1940년 프랑스 함락 이후, 옛 프랑스 해군의 군항들에 잠수함 기지들이 들어서면서 해군 잠수함사령부도 파리로 이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 본토로 이전할 때 까지 주둔했다.[6] 육지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발진하는 것이 아닌 항공모함의 특성상 조그마한 실수라도 기체 파손이나 파일럿들의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항공모함에 익숙한 항공단이 조직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겨우 한번 이착륙 한 수준이라면 작전투입시 그만큼 비전투 손실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7]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이의 해협.[8] '''그리고 이것이 두 배의 운명을 갈라버리는 사건이 된다'''[9] 뤼첸스 제독은 여러모로 독쟁이였기 때문에, 함장 린데만 대령 이하 승조원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편이었다. 반면에, 린데만 대령은 승조원들에게 평판이 좋았다.[10] 전통적으로 함대의 기함이 전열의 선두에 위치하며, 기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함대에서 가장 크고 강한 함정이 맡는다. 물론 구축함 등 호위함은 제외하고 함대의 주력함들 중 선두라는 것이며, 항공모함 등 함 자체의 전투력이 약한 배가 기함이면 선두에 세우지 않는다. 물론 항모가 여러 척 있는 함대라면 그 중 기함인 항모가 항모들 중 맨 앞에 위치한다.[11] 실제로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의 실루엣은 매우 유사하다. 크기에서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12] ...였기에 방어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는데, 1차대전 종전 후 후드는 최신형 전함이어서 전훈을 반영한 개량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 해군을 대표하는 배인 만큼 행사와 식민지 순방용으로도 많아 쓰였다. 군축분위기에서 후드보다 못한 배를 개량하며 후드가 일선에서 구르고 있었고, 이제 후드 차례가 오려고 하는데 그때 전쟁이...[13] 그는 말레이 해전에도 동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전함이 침몰할 때 함대 지휘관 필립스 제독과 함께 퇴함을 거부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고 퇴함을 지휘하고 마지막으로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만들어진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함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했던 것 같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탈출했으나 살아남지는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14] 함교가 관통 당했을 때 바로 밑 층에 있던 항해장이 전성관을 통해서 무사한지 물어봤는데 얼마 후에 전성관을 통해서 피가 흘러내려왔고 해도를 물들였다고 한다.[15] 1883.1.10 ~ 1945.12.6,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 경순양함 아마조네, 전함 슐레지엔의 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0년 1월 1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고참 장교. 빌헬름 마르샬(Wilhelm Marschall), 테오도어 크랑케(Theodor Krancke) 제독 등 수상함 전문가들과 함께 독일 함대 전력을 유지했다. 전후 소련으로 끌려가서 군사 재판을 받았고, 1945년 12월 6일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소련 체제가 종식된 1994년, 러시아 법정은 그의 책임을 풀고 명예를 신원하였다.[16] 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에 자원한 수병들 대부분은 1차 세계대전의 영국 함대 홍보물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전함 후드는 단순히 함선이 아니라, 그들의 꿈이자 해군의 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별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1의 적이자 1차대전때 박살을 내놨던 독일해군의 비스마르크에 의해 허무하게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었으니 그 충격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이다.[17] 처칠은 해군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8] 'Revenge' 즉 '보복, 복수'란 의미이다. 작전에 참으로 적절한 함명.[19] 특히 호송선단 내팽개치고 온 함선들의 함장급 고위 장교들은 더더욱. 비록 후드가 격침되었다지만 본래의 임무인 호송선단을 팽개치는건 엄연한 탈영죄에 해당한다. 특히 2차대전 당시 영국은 당시 호송선단 외에는 미국에서 물자를 방법이 전무해 호송선단 호위임무는 그 어떠한 임무보다도 중요했다. 그걸 감안한다면 당시 함선의 장교들은 최소한 불명예 전역감이다. 거기에 만약 운없게 그 호송선단들이 유보트의 공격을 받아 몰살당하기라도 했다면? 진짜 농담 하나도 안 보태고 고위 장교들은 비단 불명예 전역뿐만이 아니라 심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물론 소령, 위관급의 말단 장교들이나 부사관들이나 수병들까지 군 법정에 설 일은 없겠지만 분명 불이익이 뒤따랐을 것이다.[20] 미국도 같은 문제로 1943년까지 머리를 쥐어뜯었다.[21] 볼파르트 대위는 이상적인 어뢰발사각도로 들어오고 있던 영국함정들을 잠망경으로 바라보면서 어뢰 몇 발만 있더라면! 하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22] U-556과 비스마르크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다져진 유대관계가 있었고 반 장난이었지만 U-556이 비스마르크를 지켜주겠다는 서약도 쓴 적이 있었다.[23] 이 책의 사실상 저자인 볼프강 히르쉬펠트 통신상사는 잠수함 U-234에서 복무하던 중 배가 미 해군 구축함에 나포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당시 U-234는 동맹국 일본으로 향하던 중으로, 주일 국방무관으로 부임할 예정이던 공군항공대장 울리히 케슬러 장군, 그리고 일본 해군의 좌관급 연락장교 두 명이 동승한 상태였다. 동승한 일본 해군의 연락장교 두 명은 미군에게 잠수함이 나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24] 회고록에 따르면, 피셔 대위는 함 상태로 인해 돕기 힘들 것이라는 다른 장교들의 의견을 "전함을 구할수만 있다면 잠수함 1척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비스마르크 구원 작전을 감행했다.[25] 보통 대형함의 키는 하나가 고장나거나 피격으로 파손되어도 다른 하나로 조타할 수 있도록 두 개를 다는 것이 보통이다. 위 그림처럼 양옆으로 두 개를 다는 경우도 있고, 야마토급 전함처럼 앞뒤로 두 개를 다는 경우도 있다.[26] 헤르만 괴링의 욕심 때문에, 해군은 자체 항공대를 한동안 갖지 못하고 함재기조차 항공기와 조종사 및 승무원, 정비 인력 등 일체를 공군 파견 부대에 장기간 의존해야 했다. 그나마 Fw 200 콘돌 정찰기를 도입하면서 소규모의 자체 해군 항공대를 갖추었다.[27] 이후 부장이 지휘권을 인수해 버티다가, 지휘소로 쓰던 PX 구획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여러 장교들과 함께 전사했다.[28] 비스마르크 함의 기관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기관장은 발터 레어만 소령으로, 생존하지 못했다.[29] 폴란드 자유군 소속 해군으로 당시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는데 큰몫을 했다. 유명한 일화로, 함급차이에도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이 배를보고 비스마르크 측에서 발광신호로 왜 그러는지를 묻자 우린 폴란드 인이다라며 답했던 것이 유명하다[30] 생존자 구조를 시도. 시신 수습.[31]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격침당한 일본군 항공모함(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들도 자침-격침 논란의 여지가 나오게 된다.[32] 원래 넬슨 시대부터 영국 해군은 근접 포격전을 선호했고, 아울러 당시 영국의 주력 함포 모두가 은근히 관통력이 부족한 포들이었다는 것이 감안되었다. 로드니의 16인치는 고속 경량탄을 쏘는 실패작 16인치(그래도 웬만한 15인치보다는 강력했다)였고, KGV는 아예 소구경인 14인치 함포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은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최소 15인치 대응방어능력을 갖고 있으리라 판단했고,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아예 원거리에서 포탄 낭비를 각오하고 교전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지근거리에서 공격을 가해야 했다.[33] 포신을 수평 기준에서 아래로 내리는 각도.[34] 정 안되면 함체의 구획 일부를 침수시켜서 함체를 기울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당시 포격지원에 나선 USS 텍사스가 이 같은 방법으로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장거리 포격을 가한 사례가 있다. 단, 급박한 교전 상황에서 사용하기는 어려운 방식.[35] 물론 비스마르크 자체적으로 대공화기 배치에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럼에 한대의 피해없이 돌아와 작전을 성공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36] 티르피츠 제압 작전 중 처음 쓰인 것은 아니다. 구동계를 작살냈던 친구가 이 친구였다.[37] 최종 보상이 비스마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