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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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남국(鄭南局)
이명
정태성(鄭台星)
생몰
1897년 2월 27일 ~ 1955년 2월 27일
출생지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
사망지
경기도 여수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남국은 1897년 2월 27일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에서 부친 정익수(鄭益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가난한 어부였던 부친이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기 때문에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인들의 짐을 짊어다 주기도 하고 해산물 장사를 하기도 했다. 1912년 완도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고, 1914년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했지만 1915년 월사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해조류 수집상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한 그는 고향인 소안도로 돌아온 뒤 1919년 3월 15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읍내에서 예수교와 천도교도를 규합하여 송내호·최형천(崔亨天)·신준희·김경천·강정태 등과 함께 3.1 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대학 정치과에 입학했지만 2학기 때 학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중퇴했다.
1922년 송내호의 주도로 조직된 수의위친계에 참여한 그는 박화국 등과 함께 간도의 용정에 파견되어 용정대성중학교에 적을 두고 간도 지방의 반일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1년 뒤 소안도로 돌아왔고, 1923년 배달청년회에 가담하여 부회장이 된 뒤 전라노농연맹 위원,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 집행 위원을 지냈다.
1924년 3월 정남국을 비롯한 배달청년회원들은 각 마을에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이를 연합해 소안면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를 조직했다. 정남국은 이 대회에서 최형천, 송내호, 신광희 등과 함께 중책을 맡았다. 노농연합대성회는 각 리에 노동단체를 조직하고 그 위에 연합회를 구성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약 700명에 달하는 조직원을 확보했다.
한편 정남국은 송내호의 권유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군자금 모금원이 되었다.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엿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엿을 파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 사이를 왕래하는 비밀연락책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일황 사형선고장”을 만들어 엿판 아래 숨겨 다니면서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이러한 활동이 발각될 위기에 몰리자 소쿠리 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대를 누볐다. 당시 전라도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는 정남국이 “엿장수 정서방” 또는 “소쿠리장수 정도령”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로 한 정남국은 경성에서 출발해 신의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헌병대 검문이 삼엄하고 자신은 전과가 있기에 동지에게 자금 보따리를 맡기면서 검문이 끝나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약 내가 체포되더라도 이 자금은 임시정부에 꼭 전달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는 예상대로 검문에서 다른 전과[1] 때문에 체포되어 1925년 5월 20일 광주 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공무 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가 1925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정남국은 소작지 이동의 조사, 악질 지주에 대한 대항책 등을 마련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노농연합대성회는 1925년 10월 19일 제5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악질 지주에 대한 대항책 마련 및 소작지 이동 조사를 맡을 조사위원으로 정남국, 신준희, 박희국, 최형천, 강사원을 선임했다. 특히 도초도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지원하기 위해 동정금을 발송했으며, 서울의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현안이 되고 있던 노농운동의 조직 분화문제와 전남노농연맹 조직문제 등도 논의했다.
1926년 6월 13일, 정남국은 배달청년회관에서 송내호, 신준희, 최형천, 송기호, 강정태, 신광희, 최평산, 김통안, 김남두, 주채도, 김병규 등 25명과 함께 살자회를 조직하고 '우리들은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들은 신사회 건설의 속성을 도모함' 등의 강령을 채택했다. 그리고 회원 가입은 3인의 보증, 추천과 전 위원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했으며, 살자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실한 생활에 눈뜬 우리들은 이것을 최단기에 실현할 수단과 방법을 견지하고 이것을 대중의 심장에 넣기 위해 살자회를 조직한다. 이에 공명한 조직원들은 굳게 단결하자!"

살자회는 농민운동은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작농을 포함한 농민운동이 되어야 하며, 노동운동은 비타협적 정신으로 경제적 해방을 주 목적으로 하되 정치적 훈련을 도모하며, 청년운동은 무산청년운동의 지도적 정신 하에 민족주의 청년운동과 공동협력을 취해야 하고, 여성운동 역시 계급해방운동의 정신으로 이를 촉진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운동전선 통일에 대해서는 전조선사회운동 분열상황에 대해 통일운동의 최고기관을 위해 당파적 소이익을 희생하고 일할 것을 무조건적으로 고조하며 통일에 성의가 없는 자는 운동전선에서 축출할 것, 그리고 형평운동, 사상동맹 및 중앙협의회에 가맹할 것 등을 결의했다. 아울러 이러한 방침을 소안노농대성회, 배달청년회, 여성회에서 실행하기로 했다.
1926년 7월 13일, 일제가 소안면민들이 스스로 세운 사립소안학교를 공립학교 개편이라는 면목으로 폐교시켰다. 이에 정남국은 공립학교 개편에 반대하는 면민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김사홍외 1명과 함께 전남도청을 방문하여 항의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간 그는 조선공산당 일본부에 가입했으며, 1927년 5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완도 향우회(莞島鄕友會)·도쿄 향우회(東京鄕友會)와 협동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집행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6월 1일, 정남국은 40여 사회단체의 후원으로 조선총독부의 정치를 공격하는 연설회를 개최해 소안학교 폐교사건에 대한 진상을 보고했다. 그러나 도중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는 무산되고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또한 그해 12월 21일 무교동의 춘경원에서 조직된 '춘경원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8년 2월에 조직된 제4차 조선공산당에서도 완도 조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1928년 4월 춘경원공산당 멤버들이 일제 경찰에게 대거 검거될 때 그도 검거되었고, 1929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정남국의 검거는 소안도에 새로운 유행을 일으켰다. 당시 소안도에서는 <옥중가>라는 창가가 면민들에게 유행되었는데, 이는 감옥에 갇혀 있던 정남국을 기린 노래였다.
평양형무소에서 만기출소한 정남국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가 지도한 도쿄에서의 소작쟁의에 가담했다. 또한 1933년 조선실업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삼신(三神) 철도노동자 해고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34년에는 친일 단체 테러 사건에 연루되어 명고(名古)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으며, 출옥 후 고물상을 경영하는 한편 1936년 조선민중공론사 사장을 역임했고 1937년 6월 조선민중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2년 삼싯단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10월 완도로 귀국한 정남국은 완도군 인민위원회에 참여했으며, 민주국민당 당원으로서 1950년 5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노동쟁의법을 국회에서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국회의원 임기가 종료된 뒤 병세가 악화되어 여수병원에 입원했다가 1955년 6월 19일 사망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남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24년 10월 소안도 지주 이강채(李康彩)가 노농연합대성회를 반대하자 그를 구타하고 절교할 것을 선언한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