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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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이덕일 비판
2.1. 이덕일 세력의 허수아비 공격
3. 영화 사도 검수 참여

국문학자

1. 소개


서울대 국문과 교수. 주로 조선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이덕일과의 논쟁때문에 한중록 연구가 가장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 외에도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옥중 서신 등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바 있다)했다. '''2011년에 이덕일유사역사학을 논문으로 관광보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래서 이덕일 세력은 이 사람을 노론사관이라고 까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서술은 영조가 왕이 되기 전 경종의 명을 받고 2년 이상 대리청정을 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 그리고 신임옥사를 소론의 조작으로 의심하는 경향을 보이는 정도이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특별한 경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이덕일 비판


이덕일을 비판한 논문은 이전에도 많았다. 정병설 교수도 해당 논문들을 언급하며 역사비평사 논문에 설명하였다. 다만 정병설 교수의 비판은 서울신문 같은 '''언론을 오가며''' 벌였기에 대중들에게 이덕일의 실체를 알린 공로가 있다. 예를 들어 이덕일이 기본 한자조차 못 읽거나 유명한 논문조차 안 읽고 뒷북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해당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 이덕일:

혜경궁이 쓴 '한중록'은 당파적 편론에 따른 거짓기록이고 혜경궁은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사도세자의 고백, 25쪽)다.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고 친소론인데 노론한테 견제받아 죽은 것이다.

  • 정병설: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있다는건 '한중록'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말 등. (혜경궁 홍씨, 정병설 옮김, '한중록', 문학동네, 2010 58~59쪽 '사도세자는 정말 미쳤는가'(한중록 깊이 읽기 5)에서 이 논거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이런 자료들에서 사건의 1차적 관련자들이 말한 사도세자의 '광증', '울화증', '병'은 모두 정신질환으로 읽을 수 있다. 영조실록에도 사도세자의 광증을 어느정도 짐작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예: 영조실록 1762년 5월 24일) 이처럼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을 직간접으로 언급한 자료가 한둘이 아니다. 이덕일처럼 '한중록'만 비판한다고 해서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이 아니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도세자가 미쳤는지 안미쳤는지는 관련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들이 감히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현재까지 근거로 볼 때 사도세자의 광증은 부정할 수 없다. 설사 미치지 않았다해도 일국의 세자가 무엇이 아쉬워 자기 목숨을 걸고 한쪽 당파를 지원했다는 것인지 마땅한 이유와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가 소론을 위해 노론과 대항했다는 근거도 없다. 이덕일은 그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도세자 생시에 노론과 소론이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정치적 대립 구도를 이루지도 않았다. 이 때 소론은 권력투쟁에서 한 발 밀려나 있었고 오히려 노론 내부의 갈등이 더욱 심했다. 당대에는 남당과 북당 또는 남한당과 북한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남당은 정순왕후 친정이 남산 아래에 있었기 그렇게 불렀고 북당은 혜경궁 친정이 서울 북쪽인 안국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실록 1776년 4월 1일조를 보면 남한당과 북한당 그 어느 쪽에도 들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켜 불한당(不漢黨)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들은 나중에 각각 벽파와 시파가 되었다. 혜경궁은 자기 친정을 공격한 일파들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비판했는데 처음에는 역적 노희, 곧 김상로와 홍계희를 거론했고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온 다음에는 김한구, 김귀주 등 정순왕후의 친정을 꼽았다. 이 비판에 소론은 끼어있지도 않다. 오히려 소론에 대해서는 소론 정휘량이 홍봉한을 도왔음을 여러 차례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데 이덕일은 줄곧 노론과 소론 대립만 거론한다. 18세 조선 정치사에 대한 이덕일의 이해 수준을 의심하게 한다.

  • 이덕일: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수가(어가를 따라가는 것)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7월 태묘에 거등할 때로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사도세자의 고백 181쪽)

  • 정병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실제로는 여러 차례 태묘太廟 로 수가한 사실이 있다며 혜경궁의 말이 거짓이라고 했다. 그는 태묘에다 태조의 묘라고 용어 풀이까지 달아놓았다. 근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태묘太廟의 묘는 무덤을 가리키는 묘墓 가 아니라 사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태묘는 곧 종묘宗廟이다. 서울 종로 변, 창덕궁 바로 아래에 있는 왕실의 사당 말이다. 이덕일은 태묘와 태실이 종묘라는 기본적인 역사용어조차 몰랐다. 그는 태묘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무덤, 곧 건원릉으로 보았고 사도세자가 거기까지 수가했다고 했다. 이덕일은 태묘를 태조의 무덤으로 오독해서 사도세자가 자신의 거처 바로 앞에 있는 종묘에 간 것을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건원릉에 간 것으로 보았다.

  • 이덕일:

'한중록'에선 온양거동을 "거둥하시는 위의는 쓸쓸하기 말이 못되니라 당신은 전배 나 많이 세우고 순령수 소리나 시원히 시키시고 풍악이나 장하게 잡히고 가려 하셨으나 부왕께서 마지못해 보내시니 어찌 그렇게 차려주셨으리오' 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과 어긋난다. 영조실록에는 가마를 지고가는 "호위 병력만도 520명이나 되는 장엄한 행렬"로 기록한다. 혜경궁이 일부러 거동 규모를 왜곡했다.

  • 정병설:

행렬의 규모와 수준을 말하려면 먼저 따질 일이 있다. '520명의 행렬'이 상대적으로 어떠하냐는 것이다. 김지영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도성 안과 도성 밖의 거둥은 그 규모가 달랐는데 도성 밖은 통상 4000명이상 호위 군인들이 동원됐다. (김지영, 조선 후기 국왕 행차와 거둥길, 서울학연구 30,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08, 44쪽) 물론 이건 임금 거둥의 경우니 세자와는 경우가 다르며 시기와 행선지에 따라 규모가 다르니 보통 수행 인원은 쉽게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이런 비교없이 섣불리 행렬 규모를 재단할 순 없다. 그리고 영조실록을 잘 살펴보면 한중록의 진술처럼 그 행렬이 쓸쓸하고 초라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사부 빈객이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으니, 식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영조실록 1760년 7월 18일 조)"는 말이 있다. 세자의 거둥인데 세자의 사부인 대신들은 물론 시강원의 궁관이 빈객까지 한명도 따르지 않아 식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했다는 말이다. 임금에 대한 부정적 기록에 소극한 '조선왕조실록' 성격을 생각할 때 이정도 서술이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한데, 이덕일은 이런 중요한 기록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이덕일:

혜경궁은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가 화협옹주 임종 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옹주의 집을 찾아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혜경궁의 말은 거짓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18쪽)

  • 정병설:

이덕일의 논리는 닫힌 구조이다. ('귀납논증의 오류'를 지적한 것임) 딸을 미워한다고 해서 딸의 임종도 보지 않으면 그 아버지가 어떻게 될까.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이 시기 영조는 홍준해의 상소 등으로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꼭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옹주의 집으로만 갔다고는 할 수 없는 정황이 존재한다.

  • 이덕일: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영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 예를 하나들면 영조와 사도세자가 서로 칭찬 한 적이 있다. (사도세자의 고백 183쪽)

  • 정병설:

한두 번 서로 칭찬했다는 말이 있다고 그 사람들 관계가 좋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지적)

  • 이덕일: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중간생략) 그런데 그 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도세자의 고백, 23쪽)

  • 정병설:

'한중록'에도 화평옹주 생시에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화평옹주는 사도세자 14세 때 죽었다. 그 때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기 전이며 아직 병증도 심각하지 않았던 때다. '한중록'에는 그저 화평옹주가 살아 있을 때는 옹주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잘 중재해서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옹주가 돌아가신 후에 그 역할을 할 분이 없어 아쉬웠다는 정도로 서술했을 뿐이다. 이덕일은 한중록에도 없는 말까지 지어내놓고 그것을 비판한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지적한 것임)

  • 이덕일:

지엽말단적인 부분만 문제 삼아 막무가내로 ‘학자가 아니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주류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말미암은 희생이라는 설)을 제시한 것인데, 그 프레임에 대한 정면 비판은 하지 않으면서 몇 가지 부분만을 문제 삼아 전체 논지를 흐리고 있다. (무지에 의거한 논증을 하고 있음.)

  • 정병설:

이덕일이 자랑하는 그 프레임이 실은 그의 창안이 아니다. 이 소장이 제시했다는 프레임은 1968년 발표된 이은순 교수의 논문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은순은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기 30년 전에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이라는 논문에서 그런 가설을 발표했고 이것을 발전해서 1981년에는 한국학보 에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을 실었고 1988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 수록했다.

 

- 이은순,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 1968(이화사학연구) 이화사학연구소

 

- 이은순,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연구, 1981, 일지사, 이은순

 

- 이은순, 사도세자의 정치적 생애와 시벽의 분립,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1988

  • 이덕일:

사도세자에 관한 논문은 거의 다 찾아봤지만 이 교수의 논문은 들어 보지 못했다.

  • 정병설

내가 그 프레임이 종전에 있었던 것임을 지적하자 이번에는 사도세자에 관한 논문은 거의 다 찾아봤지만 이 교수의 논문은 들어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명색이 역사학 박사가 해당 분야의 책을 쓰면서 이런 유명한 논문과 책을 보지 못했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못 보았다면 '''당당하게 소리치기보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관련 논저에 하여 어떠한 인용도 참고 표시도 없다. 이은순은 자신의 가설을 계속 더 구체화하면서도 근거는 후속 연구로 미루고 말았는데 이덕일은 어떤 근거로 그 가설을 정설로 확립시켰을까.

보면 알겠지만 이덕일은 유사역사학과 논리적 오류만 벌이다 본전도 못 건지고 부실한 밑천만 드러냈다.

2.1. 이덕일 세력의 허수아비 공격


이렇듯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서 분했는지, 이덕일이 소장으로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정교수를 디스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연구위원 이주한이라는 사람은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에선 정병설 교수를 이렇게 평가한다.

정병설, 노론 수호의 총대를 메다

한중록』의 노예가 된 정병설


...반면 한중록은 진실을 기록한 글이니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정병설 주장의 요체다.

물론 해석과 그에 따른 의견은 개인의 자유다만, 문젠 저 주장을 위해 벌인 행위인데 '''상대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했다고 거짓말'''을 벌였다는 것.
이주한의 주장:

“자식이 미쳤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죽였다는 것은 참 납득하기 어렵다. 당연히 의혹이 뒤따를 만하다. 그런데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아버지 영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이런 것들로 인해 정신 질환이 깊어졌는데, 죽기 직전에는 아버지를 죽인다는 등 별별 망측한 언행을 다 하다가 그 사실이 영조에게 발각되어 역모 혐의를 받아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혜경궁의 논리를 혜경궁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았다. -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역사비평 2011년 봄호, 330~331쪽”

 

이것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하는 정병설의 핵심 견해다. 이덕일 소장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사료 비판한다. 사석이나 강연에서 “한중록에는 사실도 있고, 과장도 있고, 왜곡도 있고, 거짓말도 있다”고 말한다. 어느 것이 사실이고 과장·왜곡·거짓말인지 밝히는 것이 바로 학자가 할 일이다. '''반면 한중록은 진실을 기록한 글이니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정병설 주장의 요체'''다.

 

한중록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할 때부터 비판이 있었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해자의 기록이다. 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럴까?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말에 그 답이 있다. ‘앞으로 모든 살인 사건의 피의자는 그 경위만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무죄다.’ 이것이 정병설의 논리다.

 

- pp.39~40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중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43983 )

실제 정병설 교수의 논문 중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역사비평 2011년 봄호, 330~333쪽) 허나 “한중록을 읽어보면 그 경위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고만 했지, 그래서 ''''무죄다'나 '믿어야 한다' 같은 말은 한 적도 없다'''. 실제 해당 부분에서 지적하는건 이거다.
1.사도세자에게 정신질환이 있음은 '한중록' 뿐만 아니라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넣어 두려고 직접 쓴 묘지명',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 말', '영조실록' 등 여러 자료들에도 나온다.
2.'한중록'에 쓰여있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에 대한 구체적 경위는 '''다른 자료들과 겹친다'''.
3.그러니 한중록만 비판한다 해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부분은 부정하기 어렵다.
4.그리고 한중록에서 쓰여있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부분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주한의 주장과 달리 "한중록은 진실을 기록한 글이니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믿어야 한다" 따위 논리는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병설 교수는 '''다른 사료들과 교차검증해서 견해의 신뢰성'''을 더하고 있다. 오히려 한중록보단 다른 자료들을 내놓으면서 이덕일이 틀렸다는걸 증명하고 있다. 이런데도 완전 딴 소리를 하니 이덕일 세력의 수준을 볼 수 있다.

3. 영화 사도 검수 참여


정병설 교수가 영화 사도사료 검수에 참여했다.

'''곽명동:''' 사도의 당쟁희생설과 같은 대중역사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교수님이 상대방 학자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당쟁희생설이 사도가 노론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건데, 이것의 문제점이 어떤건지 궁금합니다.

'''정병설:''' 두 의견 사이의 차이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승정원일기'를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승정원일기는 왕의 비서들이 기록하는 겁니다. 당쟁희생설의 책은 한중록,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떠도는 소문을 합쳐서 쓴 겁니다. 승정원일기는 풍부하고 획기적인 자료입니다. 그것으로 사도세자의 인상이 새롭게 나타났습니다. 영화에 나온 상당수 에피소드는 승정원일기에 나온 겁니다. 승정원일기를 차이에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곽명동 씨는 당쟁희생설 = 이덕일노론 음모론으로 오해한 듯 하다. 당쟁희생설 자체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부자갈등을 배제하는 내용은 아니다.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의 정신병, 부자관계, 정치갈등을 현재사료에 맞게 적절하게 고증을 맞춘 편이다.
영화 사도와 사도세자를 주제로 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