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청정

 

1. 개요
2. 사례
2.1. 중국
2.2. 한국
2.3. 일본


1. 개요


代理聽政
섭정의 하위 개념으로, 왕세자(혹은 왕세손)가 왕을 대신하여 국무를 맡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왕의 건강이 위중해서 업무를 볼 수 없는 경우한다. 이때 대리를 하는 세자(세손)을 소조(小朝), 왕은 대조(大朝)라 칭하여 구분했다. 현재의 대통령 권한대행과 비슷한 개념이다.
원칙적으로는 왕의 건강이 위중할때 국가운영을 위해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왕이 후계자를 교육하고, 왕위승계의 정당성을 주기위해서 하는것이 원칙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이 후계자의 역량 확인 또는 정치국면 전환의 방법 등으로도 자주 써 먹었다. 그 때부터 대리를 하는 후계자에 있어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 때문인지 조선의 경우 제대로 된 대리청정은 문종이나 정조, 효명세자처럼 정말 드물었고[1] 사실상 후계자 교육과 왕위승계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는 문종 하나 말고는 없었다.[2] [3]
때문에 대리청정을 지시하면 대개 신하들은(이게 진짜 승계목적인지 충성심 시험인지 알 수 없으니 안전빵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고 차라리 날 죽여라!고 저항하며 명령을 받들려하지 않았다. 세종 때도 거의 완벽한 정통 후계자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4] 신하들이 지독하게 반대하여[5] 세종이 "지금 내가 내 몸 건사하기 급급하다 이놈들아! 날 죽일셈이냐?" 라고 거의 애원어린 일갈을 하고 나서야 겨우 관철되었고 영조가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도 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를 초월해서 신하들은 비를 맞으며 돌바닥을 머리로 두드려 피를 철철 흘리며 반대했지만 영조가 "이러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협박하여 겨우 물러났다.
그런데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 시킬 때는 친 세자파였던 소론은 반대하고, 친 연잉군파이던 노론은 쌍수들어 환영했다.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이 숙종의 건강이 워낙 안좋아진 것도 있지만 장희빈 아들에다가 몸이 약한 경종을 숙종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여 노론과 의논하여 트집잡아 폐세자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강하다.[6] 또 훗날 효명세자에게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종사의 무궁한 복입니다." 라고 쌍수들어 환영했다. 이건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 반대하다가 끔살당해서 생긴 학습효과라는 해석이 있다. [7]
어쨌거나 제대로 된 대리청정의 예를 살펴보면 대리청정이 성공하기 위해선 군주가 확실히 세자에게 전권에 기꺼이 내줄 마음이 있어야 하며 서로간 사이가 매우 좋아야 하고 후계자의 정치력이 성숙한 상태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제왕정에서 왕의 권력을 나누어주기 위해선 그만한 신뢰가 필요하단 이야기일 것이다. [8]

2. 사례


괄호 안의 연도는 대리청정을 한 기간이다.

2.1. 중국



2.2. 한국


조선 최장기간 대리청정 세자. 정작 제위 기간은 2년 정도로 매우 짧았다. 중간에 종기 때문에 매우 위독해져서 대리청정을 중단하고 세종이 직접 정무를 살핀 기간이 있다.[9]
임진왜란으로 인해 분조(조정의 일부)를 이끌고 활동하였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분조를 이끌고 활동하였다.
실질적으로 대리를 한 기간은 훨씬 짧다. 사도세자가 병을 이유로 정무를 기피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조도 겉으로만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다 했었으니,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아무 의미없는 허울이였다.

2.3. 일본


다이쇼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대리청정.
쇼와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대리청정. 그래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리 서명하고 취임식에서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신 수여했다.

[1] 경종의 경우 하긴 했는데, 위기에 몰린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종 스스로가, 의견개진을 거의 하지 않고 중간만 가자는 식으로 임해서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다.[2] 다만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본인도 너무 빨리 승하하는 바람에 아들 단종이 왕위를 너무 어린나이에 이어받았다.[3] 정조의 경우 3개월만 했다. 대리청정후 석달 후에 영조가 승하했기 때문[4] 아들 단종이 워낙 정통성이 뛰어나서 그렇지 문종 본인도 적장자-원자-세자루트를 다 밟았고 세자수업도 착실히 잘 받아 흠 잡을게 하나도 없었다.[5] 사실 신하들로서는 과민반응할 수밖에 없던 것이 바로 전대의 태종은 재위한지 고작 6년만에 뜬금없이 선위하겠다고 나서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한 적이 있다. (그는 왕자리에 12년이나 더 있었다) 심지어 한번도 아니고 총 세번이나 선위 쇼를 한 뒤에야 네번째에 진짜 상왕으로 물러난 것. 태종은 신하가 수상하다 싶으면 바로 철퇴를 내릴 정도로 왕권을 세우는데 집착한 왕이었가에, 그 모습을 본 신하들 입장에서는 (선위는 아니지만) "내가 왕 노릇 하기가 버거운데 말이지..."란 제스쳐에 "아니옵니다 전하!!"라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6] 실제로 숙종과 이이명이 독대를 했는데 그래서 더 의심을 산다.[7] 당시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홍인한과 정후겸이 대리청정 막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8]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훈육과 기대치 때문에 부자간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대리청정 체제로 간 뒤에도 대부분의 정무를 영조 본인이 처리했기에 아무리 오래했어도 의미는 없다. 사실상 대리청정 선언 역시 당시 분열된 정부의 당파싸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영조의 정치책략 중 하나라고 봐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용당한거나 마찬가지인 사도세자의 스트레스는 장난 아니었을 것. 심지어 영조는 태종이 했던 선위 파동까지 했다.[9] 사실상 조선 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섭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문종은 확실한 정통성과 아버지의 전폭적인 신뢰, 할아버지 대에서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돌봤으며, 그 기간에 여러 업적을 세웠다. (특히 세종 말기의 군사적 업적은 사실상 문종의 공이라 보면 된다) 또한 그 기간동안 확실한 후계자 수업과 차기 왕으로서 권위를 세웠기에, 아들 단종까지 이어지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본인이 오래 못 살고 동생이 배신하면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바람에 세조대에 신권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해지는 계기가 생겨서 문제지, 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제도를 확실히 다진 명군으로 남았을 확률이 높다. 살아있는 왕의 권위와 의지를 존중하면서 젊고 유능한 섭정이 사실상의 왕으로서 훌륭히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대리청정의 가장 모범적인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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