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훈(1979)
1. 소개
대한민국의 축구선수로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다.
2. 클럽 커리어
2.1. 울산 현대
정성훈은 2002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여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다. 프로 데뷔 후 정성훈 선수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주로 교체 선수로 출전하는데 그쳤다. 그러자 2003시즌 종료 후, 선수 본인의 요청에 의해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게 된다.
2.2.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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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전에서는 입단하자마자 피로골절로 결장하면서 2004시즌 대부분을 쉬었고, 2005시즌에도 기량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대전팬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2005년 하반기 결혼 후, 안정감을 찾으면서 기량이 급상승했다고 평가 받았다. 장가 가기전까지는 헤딩하나 못따내는 무늬만 타겟이었다는 증언이나, 이후 컵대회서만 4경기 연속골을 집어넣는 등 2006시즌 대활약을 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06시즌 막판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페이스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 흠이였다.
2.3. 부산 아이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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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박성호와 트레이드로 부산으로 이적하는데, 당시 부산과 대전 팬들 모두가 쓰레기 주고 쓰레기 받는 격이라며 큰 기대를 안했으나 결과적으로 양팀 모두 윈윈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당시 부산 황선홍 감독은 정성훈의 뛰어난 체격 조건과 장신치곤 괜찮은 발기술을 주목, 부산의 주전 공격수로서 낙점해 집중 조련했다. 정성훈이 잡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처음 트레이닝을 가질때 수비수 등지는 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고 한다. 결국 리그와 컵대회를 합쳐서 2008년 9골, 2009년 8골, 2010년 11골을 넣으며 K리그 최고의 타겟 스트라이커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성장세를 눈여겨본 허정무 감독은 2008년 10월 정성훈을 대표팀에 차출한다.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박주영과 스타일이 다른 타겟맨으로서 월드컵 출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 허정무 감독은 최종 엔트리에 2009년 K리그 득점왕 이동국을 뽑았다.
타겟 스트라이커로서 리그 최상의 재원이었지만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부상이 많았던게 문제였다. 대전 시절부터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폼이 올라와도 그걸 이어가지 못했다. 월드컵 멤버 탈락도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 때문에 이동국에 밀린 것이었다.
2.4. 전북 현대 모터스
2011년 1월 11일 팀 동료 이승현과 함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했고 3월 20일 부산전에서 친정 팀을 상대로 골을 터뜨렸다. 전북에서는 이동국의 백업 내지 로테이션으로 기용되었다. 로브렉과 함께 주전 이동국과 에닝요가 상대 진영을 헤집어 힘을 빼놓으면 투입되어 매조지 하거나, 경기 진행이 루즈해질때 김상식의 롱패스를 단번에 받아 넣는 역활을 맡았다.
2011 시즌 기록은 25경기 5골 6 도움. 출장한 25경기 가운데 선발은 8번이었다. 이동국, 에닝요, 루이스 등 수준급 공격수들이 포진한 전북임을 감안하면 로테이션 멤버로서 준수한 기록이라 하겠다. 2011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부상당한 이동국 대신 선발 출장해 장신을 앞세워 시종일관 알 사드 수비진과 제공권 다툼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끝내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2.5. 전남 드래곤즈
2012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남의 공격수 김신영과 맞트레이드되어 전남으로 이적했다. 전북 팬덤 내에서는 K리그 정상급의 공격수를 무명 선수와 바꿨다며 논란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2.6. 대전 시티즌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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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즌부터 친정팀인 대전 시티즌으로 복귀하였는데, 처음에 정성훈이 과거 부산 아이파크 시절 선수와 코치 신분으로서 인연이 있는 김인완 감독에게 대전에 입단하고 싶다고 구애를 했고,[1] 김인완은 처음에는 연봉과 몸값이 너무 높은 정성훈의 구애를 거부했었으나, 연봉 삭감을 감행하면서까지 대전에 입단을 원하는 정성훈의 모습에 진정성을 느끼고 협상을 진행했으며, 높은 몸값과 이적료 문제로 초반에는 난항을 겪다가 하석주 감독이 노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정성훈을 풀어주기로 하며 가까스로 대전에 입단하게 된 것이였다.
정성훈은 친정팀 전북 현대와의 홈개막전에서 만회골을 성공시키며 대전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등 노장임에도 상당히 의욕적으로 매경기에 임했지만, 이후 전반기동안 리그에서 단 6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특히 김인완 감독과는 심각한 불화를 겪으며 대전에서의 생활이 그다지 순탄치 못하였으며, 결국 김감독과의 불화를 이기지 못하고 반년만에 대전 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2.7. 경남 FC
이후 자유계약으로 경남 FC로 이적했으며, 하반기동안 10경기를 나서 1골에 그치며 경남의 상위 스플릿 행을 이끌지 못한 정성훈은 결국 13시즌 종료 후 경남과도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나고 말았다
2.8. J리그, 내셔널리그
2014년 성남 FC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이마저 불발되면서 결국 J2리그 콘사도레 삿포로에 1년 계약으로 이적하면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주전 등극에는 실패한 모습으로 리그 9경기 1득점이라는 저조한 기록에 그쳤다
2015 시즌 후반기에 한국 내셔널리그 김해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고, 노장 반열에 올랐기에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김해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선보였으며, 그간의 하향세를 만회하는 모습으로 2016년까지 주전으로 활동하는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2017년 김해에 윤성효 감독이 부임한 이후로는 경기력 저하로 인하여 11경기 무득점에 그치고 말았고, 여름 이적 시장이 다가오기 전인 6월 1차 선수등록 현황에서 김해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은퇴 수순을 밟는듯 하였다.
2.9. 부천 FC 1995
2017년 7월 K리그 챌린지의 부천 FC 1995로 이적하며 프로 무대로 복귀했다. # 인터뷰에 따르면 부천이 자신의 현역 마지막 팀이 될 것이며, 자신을 따라서 축구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프로 무대에서 은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또 4골 6도움을 기록해 30-30 클럽 가입과 통산 60골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고 싶다는 소감도 밝혔다.
9월 3일 아산 무궁화전에서 골을 성공시키며 프로 복귀골응 성공시켰고, 만 38세의 나이로 부천 구단 역사상 최고령 득점자가 되었다.
2017시즌 종료 후 부천과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동남아나 미국 2부 리그팀 플레잉 코치직을 알아보며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지만, 끝내 자신의 SNS를 통해 은퇴를 선언하였다.
3. 지도자
은퇴 후 김도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중국 코디온 FC의 코치로 활동하였다.
4. 여담
- 전북 현대와 대전 시티즌을 떠난 후에는 매번 전북 현대이나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 종료 후 전북과 대전 서포터즈석을 찾아 인사를 하고 간다. 대전의 경우 감독과 불화가 있었기는 했지만 팬들과의 관계는 원만했기 때문에 팬들도 정성훈을 좋게 기억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2011시즌을 앞두고 김인완이 부산의 코치로 부임했는데, 부임한지 한달만에 정성훈이 팀을 떠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