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전쟁

 


1. 개요
2.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2.1. 개요
2.2. 콘도르 작전
2.3. 성고문과 강제 입양
2.4. 민주화 이후 과거청산
3.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
4. 스페인의 '더러운 전쟁'


1. 개요


Guerra sucia. 20세기 중후반 중남미 지역에서 있었던 우익 독재정권의 좌익 탄압 정책을 가리키는 말. 가장 유명한 건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이지만 냉전 후반 70-80년대 니카라과, 브라질, 우루과이, 볼리비아, 과테말라, 콜롬비아, 파라과이, 칠레 등 중남미 우익 독재정 전반이 저지른, 국제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중남미 정부들의 자국민 반공 테러, 학살의 뒤에는 CIA미국이 조장한 콘도르 작전이 있었다. 세계기록유산에서도 더러운 전쟁과 관련된 기록물 4건이 등재되어있다. 실질적으론 특정 국가 내에 있었던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중남미 현지, 미국, 스페인 삼각 관계에서 형성된 냉전 후기 일련의 조직적인 국가적 폭력, 우파 테러 전반을 일컬는 광의의 의미로 쓰인다.

2.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2.1. 개요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서 좌익페론주의자들을 상대로 벌인 백색테러.
이사벨 데 페론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은 호르헤 비델라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1976년 3월 29일 ~ 1983년 12월 10일)했다.[1] 이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좌익들과 민주주의자들을 일소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벌인 게 이 더러운 전쟁이다.

2.2. 콘도르 작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5개국 우익 독재정권과 함께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콘도르 작전’을 벌였다.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으며, 이 만행을 인접국가까지 펼쳤다. 희생자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점으로 위장한 군부 독재 정권의 조사실에서 고문,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악명높았던 해군공병학교 지하감옥에서는 매일같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주변이 울릴 정도였다고 하며, 군인들은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시끄럽다며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는 그렇게 숨진 사람들과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밤마다 비행기에 태워 라플라타 강이나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렇게 군부가 좌파 인사를 색출하기 위해 벌인 ‘콘도르 작전’으로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40만여 명이 고문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30만~2백만 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서 라틴계 국가를 제외한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탈출하는 걸 법으로 금지했기에 탈출하다 잡혀 죽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탈출에 성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국, 유럽 등지에 탈출한 사람마저도 국가 간 범죄인 인도 협약에 의해 송환되어 처벌되거나 요원을 보내고 현지에서 납치한 뒤 죽이기도 했으며, 이들을 도운 미국인, 유럽인까지 처벌하였다. 법적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당당히 집행됐고,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당시에는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당일 그 시각에, 그 경기가 치러진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정권 반대인사를 고문하고 있었다.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렸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아르헨티나의 국민 시인 후안 헬만의 며느리 마리아 클라우디아 이루레타 고이에나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임신한 상태로 ‘자동차 수리점’으로 납치되어 그곳에서 딸을 출산한 뒤 아르헨티나 공군기로 우루과이로 옮겨진 후 머리를 총에 맞아 바다에 던져져 살해됐다. 또한 헬만의 아들도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뒤 기름통에 넣어져 페르난도 강에 던져졌다. 이렇게 죽어간 그들이 남기고 간 딸 마카레나 헬만은 최근에서야 진짜 신분을 확인하고 할아버지 후안 헬만과 만날 수 있었다. 기사 그리고 미국은 중남미의 안정을 명분으로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 정권을 적극 지원하였다.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군부독재정권들이 공동으로 벌인 콘도르 작전은 CIA의 물적, 기술적 지원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2]

2.3. 성고문과 강제 입양


성고문도 자주 있었다. 성고문 방식에는 기존의 흔한 도구를 이용한 고문이나 성폭행, 윤간 등의 전통적 방식(?)뿐만 아닌 군견, 경찰견을 훈련하고 발정제를 투약시킨 다음 여성 수감자를 강간시켰다. 물론 여성 수감자에게도 동물용 발정제나 최음제를 강제로 투여했다. 그 여성 수감자들은 흔한 죄수가 아닌 반군부 정치인, 민주화 운동권 인사, 시위 참여 대학생이나 그 가족들이었다. 군부의 고문기술자들은 해당 민주화 인사가 바로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나 딸[3]을 수간시키기도 했고 해당 인사 본인을 수간시키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은 도중 군부 협력 정치인, 군인, 경찰, 혹은 죄수(파렴치 범죄를 벌인 흉악범)들에게 수도 없이 강간당해 임신한 경우도 많았다.
임산부들은 살려뒀으며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몇몇 임산부들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서는 대우를 받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좁은 수용소 안에서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강간 임신당하여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출산해야 했으며, 심지어 어떤 임산부들이 고문을 받으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출산하면 바로 옆 방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아이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임산부가 아기를 낳고 나면, 산모들은 용도폐기가 되었다는 듯이 죽이던가 군용기에 실려가서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수용소에 끌려간 임산부는 출산일까지 감시하다가 출산 후에 총살당했으며, 임산부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가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산부가 낳은 아기들은 출산 직후 아르헨티나 군인들에게 보살펴져서 군인과 경찰 등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의 가정에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고, 몇살 미만의 아이들 즉 사리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친정부 인사들의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다.
이런 아이 입양 정책은 '''스페인의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가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코 독재 정권을 위해 일한 나헤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티묻지 않는 건강한 아이들을 만들어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고,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 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어린 반정부 인사들의 아이들이 잔혹한 탄압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경우 이 아이들이 정권에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자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아르헨티나의 인구가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에[4] 정치범 죄수 여자로부터 아이들을 잉태시켜 낳게해 그 아이들을 친정부의 핵심 인사들로 만들면서 아르헨티나의 인구도 늘리겠다는 일거양득의 생각도 있었다.
군부는 이것을 좌익 환경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우며 자행했고, 아이들을 친정부 인사에 입양시켜 키워졌다. 몇몇 아이는 자신의 모친을 강간하고 죽인 사람에게 길러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군부의 예상대로 양부모와 같은 친정부 인사의 성향을 가지며 자랐고 반정부 인사에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2.4. 민주화 이후 과거청산


군부정권의 몰락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집권(1983년 12월 10일 ~ 1989년 7월 8일)하자마자 호르헤 비델라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의 군부 독재자들이 자행한 반인륜범죄 청산을 시도했다. 그는 이전에 군부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동사면법을 폐기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위원회를 설치해 더러운 전쟁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결과물로 발표된 보고서가 바로 ‘눈카마스 (Nunca Más)’. 영어로는 'Never Again', 한국 말로 ‘더 이상은 안돼’였다. 약 50,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약 340곳의 비밀 지하감옥 등 수용시설의 위치와 실상이 자세히 적혀 있는 성과물이었으며 더러운 전쟁 동안 자행된 수많은 인권유린 사례들이 바로 이 ‘눈카마스’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알폰신은 1986년 12월에 ‘60일 이내에 모든 군정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마무리한다’는 ‘기소종결법’을 내놨으며, 1987년 6월에는 중하급 장교들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기소대상에서 제외시켜주는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이 통과되었다. 이후 1989년에 들어선 카를로스 메넴 정권도 두 차례의 대규모 사면을 통해서 과거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는 군인들과 그 뒤 과거청산 작업에 저항해 네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던 군인들을 풀어줌으로써 알폰신의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여전히 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과거 군정 책임자들, 중하급 장교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쿠데타 위협 앞에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옹호론도 있다.
이후 2003년 5월에 좌파인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과거 청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기구가 다시 설치되어 지금까지(2015년) 5,400여 건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가로 접수했으며, 재판 녹취록, 영상 자료, 언론 자료, 수만 명의 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DNA 뱅크에 이르기까지 150만 건의 자료를 모으고 디지털화하고 있다. 201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묻혀왔던 군대의 모든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다.
2005년 6월에 대법원은 1986년의 기소종결법에 위헌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5년 10월 연방검찰이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 등 약 460여 명 이상이 구속 및 수감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추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신청되어 재판에 넘겨져 형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던 라플라타 강변에는 기억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무자비한 고문이 행해졌던 해군공병학교에는 군정 역사박물관이 건설되고 있다.


3.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


1968년에서 1982년까지 일어난 멕시코 정부와 학생운동 세력의 갈등.
멕시코1930년대 이래 제도혁명당이라는 좌파 정당이 정권을 독점해오는 일당 우위 정당제 국가였으나 장기집권으로 점차 보수화되어갔고, 이로 인해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이 자라나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러한 갈등은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과격 진압하면서 폭발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멕시코가 한창 7%대 고도성장을 보이면서 국력을 과시하려고 야심차게 벌였던 사업인데 여기에 엄청난 돈을 쓴다는 게 알려지자 시민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5] 마침 정부에서 점점 반정부 세력의 주 구성원인 학생운동을 옥죄자 개막식 전날에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멕시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과격 진압을 벌였다. 이 때 죽은 학생은 대략 3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후 멕시코의 반정부 운동은 점차 과격해져갔고 일부는 아예 무기를 들어 게릴라에 나섰다. 정부도 이에 대응해 과격하게 반정부 운동을 진압하는 등 양측이 끊임없는 갈등을 벌였다. 1971년에도 멕시코시티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20명이 죽는 코르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참사가 벌어졌다. 또한 멕시코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들여 고문 등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갈등과 탄압은 1970년대에 멕시코 정부가 반정부 운동가들을 사면하고 이들의 정당을 합법화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 일부 반정부 세력은 여전히 무기를 놓지 않았으나 1982년이 되면 이들도 합법적 공간 안에서의 투쟁으로 방침을 전환한다.
2000년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이 된 이후 더러운 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멕시코 정부의 인권 탄압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4. 스페인의 '더러운 전쟁'


1983년에서 1987년 사이에 있었던 바스크 분리주의 테러단체 ETA와 반분리주의 테러단체 GAL의 갈등을 말한다.
바스크 민족주의를 극렬하게 탄압했던 프랑코 정권이 물러가고 스페인은 민주화되었으며 바스크의 자치권도 회복되었지만 바스크의 분리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프랑코 정권 시절부터 테러 활동에 나섰던 ETA는 1980년대에도 테러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반분리주의자 세력도 스스로 무장하고 BVE(Batallón Vasco Español), 그리고 이를 확대개편한 GAL(Grupos Antiterroristas de Liberación/반분리주의 자유 단체)을 조직하여 바스크 분리주의자에 대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고문, 유괴,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은 몇몇 분리주의와는 무관한 인사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다가 궁지에 몰리기도 했으며 결국 1987년에 해산되었다.
GAL의 대원들은 대원 스스로가 특별히 강한 신념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원을 받는 살인청부업자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실제로 1996년에 GAL의 활동에 스페인 경찰이 개입했고, 당시 내무부 장관과 정보기관이 그들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정치적으로 큰 논란이 된 바 있다. 특히 내무부 장관이 연루되는 바람에 당시 총리였던 펠리페 곤살레스도 GAL의 테러를 묵인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1] 물론 이 쿠데타에는 아르헨티나의 당시 정권에게 불만을 가진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었다.[2] 당시 군부정권의 잔혹한 고문기술과 심리전 요법은 모두 CIA 요원들이 전수한 것이다.[3] 물론 여성이 민주화 인사일 경우에는 그 남편이나 자식들, 혹은 부모님이나 남자 형제.[4] 당시 아르헨티나의 인구증가율은 매년 1.6-1.7%대로 상당히 높은 수치로 매년 40만씩 증가하던 상황이므로 기우지만 그에 준할만큼 사람들을 죽였다는 얘기다.[5] 지금처럼 그 때에도 멕시코의 빈부격차는 심각했다. 올림픽 벌일 돈 있으면 빈민구제에 쓰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