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브룩
[image]
'''James Brooke '''
'''1803년 ~ 1868년 '''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의 전신인 사라왁 왕국의 국왕이자, 영국의 군인이다. 동남아시아 역사상 유일한 유럽계 왕조인 백인 왕조의 개창자이다.
인도의 후글리 지방[1] 의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12살에 영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자랐다. 1819년에 인도로 돌아와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군대의 장교가 되어, 아삼 지방에서의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다. 1838년에는 브루나이의 술탄의 의뢰를 받고 해적을 토벌했으며, 이 공로로 지금의 사라왁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아 사라왁 왕국을 세우고 왕을 자칭했다.[2][3] 이후에 영국 정부로부터 라부안 섬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847년에 거주지를 영국으로 옮기면서 당시의 영국 여왕이던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바스 훈장 2등급을 수여받고 기사 작위에 서임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라왁 지역에는 여전히 해적이 들끓어서 수시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브룩은 영국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고, 사라왁으로 군대를 끌고 가서 해적 토벌에 전념해야 했다.[4] 결국 해적들과의 오랜 싸움에 지친 브룩은 때마침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여 영국으로 돌아갔고, 사라왁 왕국의 왕위도 조카인 찰스 브룩에게 양위하였다. 결국 1868년에 영국 데본 주에 있는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의외로 현대 진화론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찰스 다윈과 함께 진화론의 근간이 되는 자연선택의 개념을 확립시킨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여러가지 생물 표본을 동남아시아에서 대거 수집하였는데, 그때 월리스가 브룩이 주도한 항해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왁 현지에서의 평은 생각 외로 괜찮은 편이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영국의 문화나 풍습, 종교를 현지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은데다가 온정주의를 내세워 외국 자본가들이 사라왁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는 일을 금지시켜서[5] 사라왁 왕국에서 심각한 착취가 벌어지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적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말레이인들도 덩달아 때려잡는것이 문제가 되어서 조사 받은 일이 있었고[6] , 해적을 때려잡아서 말레이인들에게 호평을 받은 편이나, 통치가 순조롭게 진행된것은 아니라서 제임스 브룩의 지배에 대항하는 저항도 여러 차례 있어 왔고, 후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라왁 왕국에도 대규모로 들어왔기 때문에 간간히 말레이인들이나 사라왁 주민들에게 까이기도 한다는 듯.
'''James Brooke '''
'''1803년 ~ 1868년 '''
1. 개요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의 전신인 사라왁 왕국의 국왕이자, 영국의 군인이다. 동남아시아 역사상 유일한 유럽계 왕조인 백인 왕조의 개창자이다.
2. 생애
인도의 후글리 지방[1] 의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12살에 영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자랐다. 1819년에 인도로 돌아와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군대의 장교가 되어, 아삼 지방에서의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다. 1838년에는 브루나이의 술탄의 의뢰를 받고 해적을 토벌했으며, 이 공로로 지금의 사라왁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아 사라왁 왕국을 세우고 왕을 자칭했다.[2][3] 이후에 영국 정부로부터 라부안 섬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847년에 거주지를 영국으로 옮기면서 당시의 영국 여왕이던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바스 훈장 2등급을 수여받고 기사 작위에 서임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라왁 지역에는 여전히 해적이 들끓어서 수시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브룩은 영국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고, 사라왁으로 군대를 끌고 가서 해적 토벌에 전념해야 했다.[4] 결국 해적들과의 오랜 싸움에 지친 브룩은 때마침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여 영국으로 돌아갔고, 사라왁 왕국의 왕위도 조카인 찰스 브룩에게 양위하였다. 결국 1868년에 영국 데본 주에 있는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3. 여담
의외로 현대 진화론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찰스 다윈과 함께 진화론의 근간이 되는 자연선택의 개념을 확립시킨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여러가지 생물 표본을 동남아시아에서 대거 수집하였는데, 그때 월리스가 브룩이 주도한 항해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왁 현지에서의 평은 생각 외로 괜찮은 편이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영국의 문화나 풍습, 종교를 현지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은데다가 온정주의를 내세워 외국 자본가들이 사라왁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는 일을 금지시켜서[5] 사라왁 왕국에서 심각한 착취가 벌어지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적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말레이인들도 덩달아 때려잡는것이 문제가 되어서 조사 받은 일이 있었고[6] , 해적을 때려잡아서 말레이인들에게 호평을 받은 편이나, 통치가 순조롭게 진행된것은 아니라서 제임스 브룩의 지배에 대항하는 저항도 여러 차례 있어 왔고, 후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라왁 왕국에도 대규모로 들어왔기 때문에 간간히 말레이인들이나 사라왁 주민들에게 까이기도 한다는 듯.
[1] 여러 사정을 거쳐서 지금은 인도 서벵골 주 소속[2] 브룩에게 사라왁을 하사하면서 브루나이는 국토가 반토막 났다. 원래 브루나이는 지금의 사라왁과 사바를 포함한 보르네오 섬 북부를 다스리던 큰 나라였다. 아예 보르네오라는 지명이 브루나이의 국명에서 유래했을 정도인데 이 때의 일로 브루나이는 영토가 조금씩 외세에 침탈당하기 시작한다. 안습.[3] 사라왁 왕국의 건국 이후에 영국은 사라왁 왕국의 왕실이 영국계인 점을 이용해 사바의 합병을 돕도록 강요했다. 사라왁이 브루나이 침공의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거기다가 영국의 도래 이전에도 지금의 필리핀의 민다나오, 술루 제도에 있던 술루 술탄국이 북보르네오의 북동쪽 끝부분에 대해 영유권 드립을 치면서 침략해와서 '''21세기'''인 오늘날까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이래저래 브루나이만 안습이다. 다만 이제 사바는 말레이시아의 영토인 만큼 이제 술루 술탄국 군대의 주적은 브루나이가 아닌 말레이시아가 되었다. 즉, 이젠 브루나이가 겪던 문제를 말레이시아가 이어받았다. 안습.[4] 지금도 사라왁 지역에서 말레이 해협에 이르는 지역까지는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이다. 소말리아가 해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원래 이곳이 해적으로 더 악명이 높았던 지역이다.[5] 사실 이때 투자라는건 말이 투자이지 사실상 침탈이나 다름없었던게 대다수였기는 했다. 당장 서유럽 국가라고 해도 착취가 벌어지는 판이었고 식민지에서는 말도 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던 게 태반이었다.[6] 관련 기록이 적어서 한국의 4.3 사건처럼 애먼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인지, 진짜로 해적들과 결탁한 마을들을 개발살낸 것뿐인데, 주민들이 적반하장으로 브룩을 깐 것인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