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루 술탄국
1. 개요
술루 술탄국은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2. 역사
2.1. 성립 이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에 닿기 141년 전인 1380년, 말라카에서 온 이슬람 선교사 마흐둠 카림(Makhdum Karim)에 의해 타위타위(Tawi Tawi) 등 필리핀 남부에 모스크가 세워지는 등 이슬람교가 전파된다.
1390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던 미낭카바우 왕국의 왕자 라자 바긴다 알리(Rajah Baguinda Ali)가 필리핀 홀로 섬의 부안사(Buanza 또는 Buansa)에 당도한다. 부안사의 원주민들은 라자 바긴다의 배를 공격했으나, 라자 바긴다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왜 날 가라앉혀 죽이려고 하냐?" 라며 되물었고, 원주민들은 라자 바긴다가 여행 중이며, 그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고는 공격을 멈추고 그를 받아들였다.
라자(Rajah راجا)는 왕을 뜻하는 우르드어 또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이것은 이미 술루 술탄국 이전에도 이 지역에 이슬람 계열의 나라와 역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2.2. 성립
브루나이 제국이 필리핀 쪽의 영토를 잃으면서 술루 일대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조호르 술탄국[1] 출신 아랍인인 샤리프 울 하심(Sharif ul-Hashim)이 라자 바긴다가 있는 술루에 당도한다. 샤리프 울 하심은 탐험가이자 종교학자였으며, 술루에 와서 원주민들에게 "너희 수도와 예배당이 어디임?" 하고 물어봤고, 사람들은 부안사로 그를 안내했다. 샤리프 울 하심을 만난 라자 바긴다는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의 딸인 다양다양 파라미술리(Dayng-dayang Palamisuli)[2] 와 결혼하였다. 1405년 라자 바긴다의 뒤를 이어 샤리프 울 하심이 술탄으로 즉위하였으며, 술루 술탄국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한다.
라자 바긴다의 아들도 아닌 샤리프 울 하심이 왕이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그가 무함마드의 후손[3] 인, 이른바 뼈대 있는 가문인 것도 한 몫 했다. 그리고 라자 바긴다가 딸인 파라미술리 이외에 남자 후계자가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술루 술탄국을 구성하는 주요 종족은 술루족이다. 이들은 술루크족(Suluk) 또는 타우수그족(Tausūg)라고 불리운다. 술루 술탄국 왕조의 시작은 말레이계 혈통이지만 대다수 주민은 술루족이며, 현재도 술루 주에는 약 80만명의 술루족들이 살고 있다. 섬 규모에 비해 인구가 상당한 편이며, 이들은 타갈로그나 비사야가 아닌 타우수그어를 사용한다. 술루족을 비롯하여 민다나오, 팔라완 등에 살고 있는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을 통틀어서 모로족(Moros)이라고 한다.
2.3. 성장
나라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초반에는 브루나이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17세기 중반 브루나이에 내전이 터지는데, 이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술루 술탄국의 도움을 받아 10년 넘게 이어지던 내전이 종료된다. 이때 브루나이의 술탄은 도움을 준 댓가로 술루 술탄국에게 사바 주 동부를 할양한다. 이는 술루 술탄국이 독립적인 지위를 갖추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영토분쟁 떡밥이 된다.
스페인이 필리핀에 필리핀 도독령을 설립한 후, 세부를 중심으로 마닐라, 파나이, 레이테, 민도로, 팔라완 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는 술루 해를 근거지로 삼은 술루 술탄국에서 직면한 위기였다. 이에 술루 술탄국을 비롯하여 마긴다나오 왕조[4] 등 필리핀 남부에서 북부로 세력을 넓히기 위한 모로계 이슬람 세력과 필리핀 중부를 근거지로 식민지를 넓히려는 스페인계 카톨릭 세력이 무려 300년 간 전쟁이 이어졌는데, 이를 모로 전쟁이라고 한다.
17세기까지는 큰 전쟁 없이 술루 술탄국이 스페인 세력의 주요 거점을 습격하거나 교역선을 해적질을 통해 터는 등 소규모 교전이 대부분이었다. 참다못한 스페인군이 1765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술루 술탄국을 직접 공격했으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 4년 후인 1769년 브루나이와 연합한 술루 술탄국이 마닐라를 역으로 침공하여 점령[5] 하는 등 전투종족으로 알려지게 된다.
필리핀 도독령의 스페인 세력과만 싸운 것이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와도 해전을 벌인 기록이 남아 있으며, 필리핀 전역과 인도네시아 북부, 보르네오 섬 등 사실상 동남아시아 동부 해역을 오가며 해적질과 약탈, 특히 사로잡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을 통해 성장해나갔다. 단순히 약탈만이 아니라 교역과 상업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같은 이슬람계 세력이었던 마긴다나오 왕조가 술루 술탄국의 세력이 견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자 친 스페인계로 돌아서고 스페인도 술루 술탄국의 수도를 일시적으로 점령 하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술루 술탄국을 비롯한 필리핀 도독령, 1851년 스페인 도독령에 점령된 마긴다나오 왕조, 브루나이 등 모두 세력이 약화되는 바람에(...) 한동안 평화가 찾아온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지면서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던 카리브 해 일대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에 점령되고, 서태평양 지역의 필리핀 역시 전쟁이 벌어진다. 스페인과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이미 리즈시절이 끝난 스페인으로써는 필리핀 도독령을 지킬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처지[6] 였다.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스페인 도독령이었던 루손 섬과 세부, 팔라완 북부, 레이테, 파나이 등 비사야 제도 등은 곧바로 미국령이 된다. 이후 미국은 술루 술탄국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고, 1915년에 술루 술탄국은 미국에게 점령되어 멸망했다.
3. 문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중국에 조공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 소록국(蘇祿國)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명나라 영락제 17년(1419년) 때 왕이 직접 명나라로 조공을 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병으로 죽자, 영락제는 그 정성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1421년 덕주(현 중국 산둥성 더저우시)에 세웠다. 이때 함께 온 340명의 소록국 사람들은 술루 술탄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주에 머물렀다고 한다. # 청나라 때 제작한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에 의하면 그 땅의 기온은 더우며, 사람의 성질이 강하고 사납다, 진주를 채취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으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데 사탕수수로 술을 담근다는 등의 내용이 남아 있다.황청직공도에 나오는 소록국 소개
필리핀에 있던 국가들 중 가장 중앙집권화가 잘 된 국가로도 여겨진다. 정치적 행정구역이 잘 짜여져 있었고, 술루족 이외 다른 모로족들도 술루 술탄국의 통치 하에서 통합된 상태를 유지했다.
술루 술탄국은 이런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군사강국이었다.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술루 술탄국의 군사가 15만명이었다고 한다. 앞전에 소개한대로 브루나이 내전에서 술루 술탄국의 전력을 활용해 승리했다거나, 영국과 스페인을 상대로 해전을 벌여 승리한 기록이 남아있다. 서양 국가들과의 해상전에서는 배 앞머리에 황동제 선회식 대포를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1899년 미국-모로 전쟁에서 경번갑을 입은 모로족 전사가 미군 장교에게 권총 여섯 발을 맞았지만 끝내 칼로 난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한 건 경번갑 항목 참조. 시기상 및 지리상 술루 술탄국 전사일 확률이 높으며, 아니면 서로 긴밀한 영향을 받아온 마긴다나오 지역 모로족으로 추정된다.
4. 술루 술탄국이 남긴 유산, 사바 영토 분쟁
1878년, 술루 술탄국의 술탄 자말 울 아잠(Jamal-Ul Azam)은 말레이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 노스보르네오특허회사[7] 와 사바 주 동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한다.
노스보르네오사는 사바 주를 식민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인도 회사와 궤를 같이하는 식민지 총독부다. 아무튼 이 회사는 1881년 개설됐는데, 1878년에 조약이 체결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회사가 설립하기 전인 1877년 독일인 사업가이자 외교가인 폰 오버벡 남작(Baron Von Overbeck)과 런던과 상하이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영국인 알프레드 덴트(Alfred Dent) 에드워드 덴트(Edward Dent) 형제가 보르네오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부르나이의 술탄 압둘 모민을 만나 사바 주를 15,000 스페인 달러에 넘기기로 했다. 문제는 사바 주 동부 지역은 부르나이 술탄이 아닌 술루 술탄국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 이를 위해 오버벡 남작과 덴트 형제는 자말 울 아잠과 추가 협상을 벌였고 5,000 스페인 달러에 사바 주 동부에 대한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오버벡 백작은 독일에서 이 땅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자 사바 주에 대한 통치를 알프레드 덴트에게 맡기고 떠났고, 알프레드 덴트는 임시적으로 회사를 개설한다. 이때가 1881년이다. 즉, 제대로 회사도 세우기 전에 협상을 통해 사바 주를 이양 받은 것.
문제는 이때 조약에 사용한 한 단어 때문에 발생했다. 조약문에 'Pajaka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Pajakan은 마인어로 점유의 의미이지만 영어로는 대여, 임대권의 의미인 Lease로 번역되기 때문. 한마디로 '''사바 주를 빌려준 것이냐, 아예 넘긴 것이냐''' 라는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63년 독립하면서 노스보르네오사에 사바 주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 받았으며, 사바 주는 말레이시아의 영토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술루 술탄국 왕족들에게 매년 5,000링깃[8] 을 사용료 명목으로 지급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반면 술루 술탄국을 병합한 미국을 상대로 독립한 필리핀은 "저 땅은 술루 술탄국이 영국에 빌려준 땅이고, 술루 술탄국이 필리핀의 역사이자 일부이니 당연히 사바 주는 우리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술루족은 술루족대로 "필리핀이고 말레이시아고 니들은 권리 없다. 사바 주는 그냥 술루 술탄국의 것이며, 우리는 필리핀이 아닌 독립국가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바 주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북칼리만탄 주 역시 술루 술탄국이 되찾아야 할 영토이다. 하지만 뚜렷한 구심점이 없는 상태[9] 에서 2013년 사바 주에 무장한 술루족 병력 230여명이 상륙하고,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투기까지 동원된 대규모 전투로 인해 양측 통틀어 70명 넘게 사망하고, 술루족 측 병력이 와해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이들 중 체포된 9명은 말레이시아 법원에 의해 사형이 확정되었고# 이에 필리핀 정부는 반발하는 상황이다.
[1] 현 말레이시아 조호르주에 있던 이슬람 술탄국[2] 다양다양은 귀한 신분의 여성을 뜻하는 존칭[3] 모계 혈통을 통해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의 14대손[4] 혹은 마구인다나오(Maguindanao) 왕조. 필리핀 민다나오 마긴다나오 주를 거점으로 한 이슬람 왕조[5] 이후 브루나이와의 갈등으로 철수한다[6]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이 미국을 지지하였다.[7] North Borneo Chartered Campany, 또는 British North Borneo Company. 한국에서는 보통 노스보르네오사라고 부른다.[8] 2021년 기준 한화 138만 4천원 정도[9] 술루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은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고, 이에 그의 여러 후손들이 통치권을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