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스웨트
'''제임스 스웨트(James Elms Swett : 1920년 6월 15일~2009년 1월 18일)'''
에어 메달 5회
퍼플 하트
우수비행 십자훈장 2회
의회 명예훈장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절대 다수의 에이스가 대도시가 아닌 야외 생활이 잦은 시골 출신들이 많다. 이에 대해 척 예거 같은 베테랑 조종사는 야외에서 자라면 멀리 보기 쉬운 시력과 높은 집중력, 그리고 주의력이 절로 길러지기 때문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2차 대전의 에이스로는 드물게 대도시인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임스 스웨트(James E. Swett)는 자라면서 캘리포니아주의 샌 마테오(San Mateo)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에 발전기와 터빈 같은 군함에 쓰이는 부품들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사세가 확장되면서 사무실과 공장을 군항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인구 4만의 소도시 샌 마테오는 미 해군 최대의 군항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30 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탓에, 어린 소년 짐은 1930년대 미국 해군의 확장기를 지켜보며 항공모함의 탄생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알록달록 칠해진 함재기들의 비행을 자주 볼 기회가 많았던 탓에 어린 마음에 조종 면허를 딸 생각을 하게 된다.
짐 소년은 샌 마테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비행클럽을 다니며 틈만 나면 비행기를 기웃거렸고, 1939년에 그가 샌 마테오 전문대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조종면허를 딴 뒤였다. 청년이 된 짐은 대학 재학 중에도 틈틈이 비행연습을 계속해 1941년 8월 26일에 해군에 자원 입대했을 때는 이미 비행시간이 450시간에 달해 또래 중에서 가장 비행 경험이 많고 어엿한 한 명의 조종사 몫을 해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경비행기를 모는 것과 강력한 엔진과 무장을 갖추고 가장 빠른 항공기인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어서, 별도의 전투 비행훈련을 추가해야만 했다.
1942년 초에 해군 비행학교를 상위 10%의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한 짐 스웨트는 해병 항공대를 선택해 텍사스주 코퍼스 크리스티 기지(NAS Corpus Christi)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 제12비행단(Marine Air Group 12) 예하 VMF-221 파이틸 팰콘스(Fightng Falcons) 비행대대로 배속되었다. 자대에 배치된 후에는 해군 조종사의 주특기인 함상 이착함 비행술을 연마하기 위해 미시간 호를 오가며 새내기 함재기 조종사들을 교육시키는 훈련용 항공모함인 USS 울버린(USS Wolverine)의 비좁은 비행갑판에서 이착함을 경험했다. 1942년 12월, 마침내 모든 준비를 갖춘 제임스 스웨트 소위는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인 과달카날(Guadalcanal) 공방전에서 생애 첫 전투 출격을 하게 된다.
1943년 4월 7일 아침, 러셀 섬(Russell Islands) 상공에서 전투공중초계(CAP) 임무 중이던 그는 일본 해군 연합함대 소속의 99식 함상폭격기 150여대가 새카맣게 무리를 지어 미군이 보급 및 물자 집적소로 이용하고 있던 툴라기 항을 공습하기 위해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접근하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지체없이 기수를 꺾어 차단에 나섰다. 이날 아침, 난생 첫 실전 요격을 하게 된 제임스 스웨트였지만, 전혀 망설임은 없었다. 짐 스웨트 소위는 불과 15분 동안 탄환이 전부 떨어지고 적기 후방 총좌의 사격과 아군 대공포의 오인 사격에 캐노피가 떨어져 나가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싸워 7대의 99식 함폭을 격추시키거나 공중 폭파시켰으며 2대에는 손상을 입혔다. 그가 타고 있던 와일드캣은 온통 탄흔 투성이에 날개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엔진도 망가져 다 죽어가고 있었지만, 이런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무사히 해상에 불시착시켰다.
제임스 스웨트는 이 믿기 힘든 무공으로 1계급 특진과 명예훈장과 퍼플 하트, 해군 십자훈장을 받는 명예를 누렸다. 초진에서 베테랑이 되어버린 그는 1943년 말부터는 신형 전투기 F4U 콜세어로 기종을 개편한 비행대에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103회의 실전 출격을 계속했다. 종전을 맞을 때까지 그는 확인 격추 15.5기 / 미확인 격추 4기의 전과를 세웠고, 1945년에는 에식스급 항모 벙커힐(USS Bunker Hill)의 대공화망을 뚫고 들어온 가미카제 특공기 1기를 격추시켜 모함과 동료 선원들을 지켜내는 대활약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1. 서훈
에어 메달 5회
퍼플 하트
우수비행 십자훈장 2회
의회 명예훈장
2. 450시간을 비행한 신참 조종사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절대 다수의 에이스가 대도시가 아닌 야외 생활이 잦은 시골 출신들이 많다. 이에 대해 척 예거 같은 베테랑 조종사는 야외에서 자라면 멀리 보기 쉬운 시력과 높은 집중력, 그리고 주의력이 절로 길러지기 때문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2차 대전의 에이스로는 드물게 대도시인 시애틀에서 태어난 제임스 스웨트(James E. Swett)는 자라면서 캘리포니아주의 샌 마테오(San Mateo)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에 발전기와 터빈 같은 군함에 쓰이는 부품들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사세가 확장되면서 사무실과 공장을 군항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인구 4만의 소도시 샌 마테오는 미 해군 최대의 군항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30 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탓에, 어린 소년 짐은 1930년대 미국 해군의 확장기를 지켜보며 항공모함의 탄생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알록달록 칠해진 함재기들의 비행을 자주 볼 기회가 많았던 탓에 어린 마음에 조종 면허를 딸 생각을 하게 된다.
짐 소년은 샌 마테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비행클럽을 다니며 틈만 나면 비행기를 기웃거렸고, 1939년에 그가 샌 마테오 전문대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조종면허를 딴 뒤였다. 청년이 된 짐은 대학 재학 중에도 틈틈이 비행연습을 계속해 1941년 8월 26일에 해군에 자원 입대했을 때는 이미 비행시간이 450시간에 달해 또래 중에서 가장 비행 경험이 많고 어엿한 한 명의 조종사 몫을 해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경비행기를 모는 것과 강력한 엔진과 무장을 갖추고 가장 빠른 항공기인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어서, 별도의 전투 비행훈련을 추가해야만 했다.
3. 함재기를 몰기 위한 훈련
1942년 초에 해군 비행학교를 상위 10%의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한 짐 스웨트는 해병 항공대를 선택해 텍사스주 코퍼스 크리스티 기지(NAS Corpus Christi)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 제12비행단(Marine Air Group 12) 예하 VMF-221 파이틸 팰콘스(Fightng Falcons) 비행대대로 배속되었다. 자대에 배치된 후에는 해군 조종사의 주특기인 함상 이착함 비행술을 연마하기 위해 미시간 호를 오가며 새내기 함재기 조종사들을 교육시키는 훈련용 항공모함인 USS 울버린(USS Wolverine)의 비좁은 비행갑판에서 이착함을 경험했다. 1942년 12월, 마침내 모든 준비를 갖춘 제임스 스웨트 소위는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인 과달카날(Guadalcanal) 공방전에서 생애 첫 전투 출격을 하게 된다.
4. 충격적인 데뷔전
1943년 4월 7일 아침, 러셀 섬(Russell Islands) 상공에서 전투공중초계(CAP) 임무 중이던 그는 일본 해군 연합함대 소속의 99식 함상폭격기 150여대가 새카맣게 무리를 지어 미군이 보급 및 물자 집적소로 이용하고 있던 툴라기 항을 공습하기 위해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접근하는 광경을 발견하고는, 지체없이 기수를 꺾어 차단에 나섰다. 이날 아침, 난생 첫 실전 요격을 하게 된 제임스 스웨트였지만, 전혀 망설임은 없었다. 짐 스웨트 소위는 불과 15분 동안 탄환이 전부 떨어지고 적기 후방 총좌의 사격과 아군 대공포의 오인 사격에 캐노피가 떨어져 나가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싸워 7대의 99식 함폭을 격추시키거나 공중 폭파시켰으며 2대에는 손상을 입혔다. 그가 타고 있던 와일드캣은 온통 탄흔 투성이에 날개에도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엔진도 망가져 다 죽어가고 있었지만, 이런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무사히 해상에 불시착시켰다.
제임스 스웨트는 이 믿기 힘든 무공으로 1계급 특진과 명예훈장과 퍼플 하트, 해군 십자훈장을 받는 명예를 누렸다. 초진에서 베테랑이 되어버린 그는 1943년 말부터는 신형 전투기 F4U 콜세어로 기종을 개편한 비행대에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103회의 실전 출격을 계속했다. 종전을 맞을 때까지 그는 확인 격추 15.5기 / 미확인 격추 4기의 전과를 세웠고, 1945년에는 에식스급 항모 벙커힐(USS Bunker Hill)의 대공화망을 뚫고 들어온 가미카제 특공기 1기를 격추시켜 모함과 동료 선원들을 지켜내는 대활약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