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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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후 공군 중령 복무 당시 사진
1923년 2월 13일 ~ 2020년 12월 7일
Charles Elwood "Chuck" Yeager
찰스 엘우드 "" 예거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기
2.3. 조종사가 되기 전까지
2.4. 2차대전
2.5. 전후
4. 이후
5. 기행(...)
6. 기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에이스 조종사이자 '''세계 최초로 수평 비행으로 음속을 넘은 인물'''이다.[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대 파일럿으로 11.5대를 격추시켰고 1945년 2월 전장에서 미 본토로 돌아와 종전 이후에는 미 공군 소속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 1947년 10월 14일 벨 X-1 실험기[2]로 세계 최초로 고도 13,700m에서 수평비행으로 마하 1을 넘는 데 성공했다.

2. 생애



2.1. 유년기


웨스트 버지니아의 마이라라는 작은 마을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주로 농업과 석탄 광산에 의존하는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깡촌 중에서도 깡촌인 주이다. 그의 가정은 너무 가난해서 대공황이 일어나도 수입규모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였고, 이런 이유로 예거는 시간만 나면 총들고 사냥을 나가 짐승들을 사냥해 껍질을 벗겨 물통에 담궈놓는 게 일이었다. 당시엔 먹고 살기 바빠 장래희망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고, 어린 예거는 유전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다쳐서 팔에 붕대를 감고 돌아오자 아버지의 고생을 실감했다고 한다.

2.2. 청년기


1941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이 되자, 그는 읍내의 당구장에서 일하면서 내기 당구로 소일하고 밤마다 동네 아가씨들하고 데이트나 하는 양아치가 되어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어느날 미합중국 육군 모병관이 마을에 찾아오자 집안에 박아둔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달만인 1941년 9월 12일 미 육군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입대 전까지 본 비행기는 15살 때 마을에 불시착한 비치크래프트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왜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는지는 미지수. 아마 하늘을 난다는 원초적 본능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2.3. 조종사가 되기 전까지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던 데다 부친이 있던 유전에서 일도 해봤기 때문에 육군 항공 정비병이 됐다.
이후 1942년에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육군 항공준사관에 지원, 1943년 3월 애리조나 루크 필드에서 비행훈련을 수료 후 육군 항공준사관인 Flight Officer 계급으로 임관했다. 임관 후 미 육군 제72전투비행단 357전투비행전대 363전투비행대대에서 P-39 전투기를 조종했다.
첫 근무지가 고향 근처라서 고향마을 시가지 상공에서 서비스라고 에어쇼를 하곤 했다는데 그 동네서 전투기 조종사가 된 건 예거 하나뿐이라 "예거 씨네 둘째 때문에 우리집 돼지들이 유산했다" 등의 불평이 쇄도 했다는데 곧 동네 주민들도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hey boy i have 12.7mm...)
이 당시 부인인 글레니스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43년 11월에 그는 소속부대와 함께 영국으로 파병되어 현지에서 P-51 머스탱 전투기로 기종을 전환했다.

2.4. 2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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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후 탈출해 복귀한 직후 찍은 사진.
2차대전 당시 통산 1킬 후 프랑스 보르도 상공에서 격추당했는데,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해서 복귀했다.[3] 탈출 과정에서 공로로 동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원래 이런 귀환자들은 작전 중 다시 격추 당해 나치 독일의 포로가 되면, 독일의 우월한 고문기술에 의해 레지스탕스에 대해 이것 저것 다 불어버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므로 전투 임무에서 배제되었는데,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잡힐 것 같으면 자결하겠다''''고 직접 청원하여 다시 전장으로 복귀, 나머지 10.5킬을 달성했다. 개중에는 제트 전투기인 Me262도 한 대 포함.[4] 그는 전쟁 중 61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했고, 대위까지 진급했다.
자신의 전투기 노즈 아트를 '''Glamorous Glennis'''라고 꾸몄는데, 이는 여자친구인 글레니스 페이 딕하우스(Glennis Faye Dickhouse)의 이름이라고...[5] 1945년 2월 26일 여자친구 글레니스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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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에도 항공기 노즈 아트로 '''Glamorous Glennis'''를 기재한 사진.

2.5.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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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이후 1946년 육군항공 개발시험 비행조종사 훈련을 이수하고 테스트 파일럿으로 각종 시험기를 조종하였다. 당시 동료들도 '''디크 슬레이튼, 거스 그리섬, 고든 쿠퍼'''[6]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다.
미 육군항공대의 아음속항공기 시험조종사로 선발되어 1947년 10월 14일 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했다. 그의 음속돌파는 1947년 9월 18일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한 직후라 의미가 컸다. 그 원래 2차대전의 에이스 미국의 전쟁영웅으로도 유명했지만 초음속 기록돌파가 대대적 언론을 타며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전후 미 공군이나 항공업계의 얼굴마담이 되었고 이런 초기 항공기술 시험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으로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니, 비행 이틀 전 을 타다 넘어져 갈비뼈가 2개나 부러졌는데 일반 외과에 갔다가는 의사의 신고로 비행업무에서 배제될까봐 수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고[7] 부인과 가장 친한 동료 한사람에게만 이야기 했다고.
조종을 할 때도 갈비뼈 통증으로 인해 작대기로 레버를 조작했다고 한다.
6.25 전쟁 직후 북한 공군의 노금석 소위가 MiG-15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자 몰고 온 기체를 시험평가 하기도 했다.
1955년 독일 주둔 제50전투폭격 비행단 417전투폭격 비행대대장(F-86H 세이버)으로 부임했다. 2년 후인 1957년에는 캘리포니아 주둔 제413전투비행단 1전투비행대대장(F-100D 슈퍼세이버)으로 부임했다.
우주 경쟁이 시작되자 시험비행사 동료들이 우주 비행사로 선발돼서 엄청난 인기와 부를 거머쥘 때도 그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걸림돌 때문에 우주비행사가 되지 못했다.[8] 이 당시 척 예거와 초창기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게 1983년작 영화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
1962년 미 공군대학 졸업 후 미 공군 개발시험 비행조종학교장으로 부임했다. 1966년 필리핀 주둔 제405전술전투비행단장(B-57 캔버라)으로 부임하여, 비행단과 함께 월남전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8년 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제4전술전투비행단장(F-4 팬텀 II)으로 부임하여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9년 준장으로 진급, 미 제17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1971~1973년 사이에는 주파키스탄 미국 대사관 무관으로 파키스탄 공군 군사고문관직을 맡았다. 1975년 퇴역 후 미 항공우주국 시험비행 조종사로 근무했다.
고졸의 사병 출신으로 준장까지 진급한 흔치 않은 케이스. 2차대전 중 파일럿의 부족으로 사병 중에서 파일럿을 모집해서 훈련시킨 후 항공준사관(Flight Officer)으로 임관시켰는데, 육군 항공정비병 근무 중 여기 지원했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대위까지 진급했다. 본인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런 경력 때문에 알게 모르게 차별을 좀 받은 모양이다. 미합중국 공군이 아무래도 늦게 생기고[9] 기술군이다보니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 모양인 듯. 결정적으로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 선발시 대학졸업장이 없어서 애시당초 의지에 상관없이 원서도 못 썼다.[10] 그리고 비행사 자질 평가에 대해선 나름대로 확고해서 흑인 비행사 뽑으라는 지시에 비행사 지원 인원 중에서는 우수한 흑인 비행사는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그때 흑인 교육생 실력이 모자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일에서 함께 근무했던 흑인 조종사들보다 실력이 떨어졌다고 평가했다고.[11]
이후 제너럴 모터스의 기술 및 홍보 고문으로 취업해 일하면서 1985년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과 함께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에는 STS-51-L 우주왕복선 챌린저 폭발사고가 터지자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로저스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같이 활동한 인물들 중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닐 암스트롱, 샐리 라이드,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얼굴마담 노릇을 했다.[12]

3. 뉴타입


이 양반의 조종사, 특히 테스트 파일럿으로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 시력
쌍안경을 능가한다고 하며, 전투기에 레이더가 없던 2차대전 당시 지평선에 아른거리는 적기를 맨눈으로 포착하여 공격한 적이 여러번 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많이 다녔는데, 그 덕에 시력부터 사격 감각 등 여러가지로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고...별세 직전까지도 조준경 없이 저격 수준의 사격이 가능했다.
  • 정밀한 조종능력
조종실력 뿐만이 아니라 비행할 때의 속도와 고도, 조종특성을 느끼는 감 또한 타고났다고 한다. 비행학교 시절, 비행기의 고도와 속도를 자동으로 모눈종이에 기록하는 장치를 한 채 비행을 한 적이 있는데, 자로 대고 그은 것 같은 선이 나왔다고...
  • 악운에 강한 점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격추되든, 사고가 나든 반드시 살아남아서 돌아왔다. 특히 과거에는 원격감시장치나 블랙박스가 부실했기 때문에 조종사가 살아남아야만 사고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개발자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F-100 슈퍼 세이버 전투기의 경우, 초기 모델에서 원인 불명의 추락 사고가 많았는데, 이 양반이 살아 돌아오는 덕에 조립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음을 알아냈다고. 추락율이 높기로 악명이 높았던 F-104 전투기의 파생형인 NF-104A를 조종하다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척 예거가 워낙 악운에 강한 사나이인지라 살아남긴 했지만, 얼굴과 목에 심한 화상을 입어서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이 입수한 MiG-15의 테스트 파일럿을 맡았을 때도 기동테스트를 하다 실속에 빠져 아슬아슬한 상황을 맞았다가 간신히 기체를 회복하고 살아돌아왔는데, 나중에 그를 만난 소련 기술자들의 반응은 "농담합니까?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즉, 척 예거가 겪은 실속은 MiG-15의 태생적 설계결함이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

4. 이후


가끔 에어쇼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다. 1997년에는 음속 돌파 50주년 기념으로 F-15D를 타고 플라이바이를 펼치기도. 취미로 낚시를 즐기면서 여생을 즐겼었다. 1990년 부인과 사별하고,[13] 2000년에 등산하다 만난 36세 연하인 41세 여배우 빅토리아 스콧 단젤로(Victoria Scott D'Angelo)와 2003년에 재혼했는데 예거의 자녀들은 여배우 빅토리아가 예거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빅토리아는 그런 의도가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예거의 자녀들은 빅토리아가 예거의 재산에 손대지 못하도록 고소했고, 예거는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의 연기금 수십만 달러를 빼앗아 갔다고 비난했다. 2008년 8월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은 예거의 딸 수잔이 수탁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예거에게 유리한 판결을 했다.
F-20 전투기가 개발되었을 때 노스롭 사에서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척 예거는 F-20을 극찬하면서 완벽한 전투기라고 평했지만 그 결과는....
2002년 10월 14일,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전폭기를 타고 날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 주소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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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21일에는 F-16으로 비행했다. 이날은 아폴로 15호 사령관 데이브 스콧, X-15 테스트 파일럿 조 엥글도 동참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14일에도 음속돌파 65주년 기념으로 또 한번 비행했다고 링크
2005년에는 국회 청원에 의해 예비역 소장으로 명예진급 하였다. 강연이나 책 등으로 번 돈도 있고, 결정적으로 특정 전투기[14] 제작사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적도 있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인생의 승리자.
한때는 자기 사인 들어가있는 물품을 프리미엄 붙여서 팔기도 했다. 우표나 사인 새긴 자기 동상, 여러 물품을 팔았는데, 동상 가격이 무려 '''1만 달러'''…. # 해외배송도 된단다(...)
1990년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비행 시뮬레이션도 나왔다. 한국 출시 제목은 '척 예거의 공중전'. 적들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뛰어난 AI를 가지고 있는데 놀랍게도 학습 기능이 있어서 플레이어가 자주 쓰는 공중기동에 대응까지 한다고 한다. 고전게임 중 흔치 않은 비행 시뮬레이션 계열에선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다.[15]정발은 동서게임채널이 맡았는데 동봉된 매뉴얼이 매우 개념넘치는 수작이었다.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 으레 그렇듯 게임 매뉴얼이라기보다 간단한 비행 매뉴얼 수준으로 두꺼웠는데, 대부분의 전문용어 번역이 거의 완벽한 수준. 특히 중간중간 들어 있는 척 예거의 충고나 짤막한 경험담을 읽는 재미가 깨알같다. 다만 아래아 한글로 작성한 게 눈에 보이는 레이아웃과, 다소 조악한 편집[16]이 옥에 티. 뒤에는 본인의 인터뷰 내용도 들어 있다.
2020년 12월 7일, 재혼한 부인 빅토리아 단젤로가 트위터를 통해 예거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향년 97세.

5. 기행(...)


똘끼가 충만한 인물이다.
상병 때 후임들 모아놓고 사격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사막에 기관총을 쏴갈겼는데 그게 목장에 날아가 남의 말이 맞아죽는 바람에 군법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파일럿 교육 도중에 장난이랍시고 난로에다 마치 석탄을 집어넣듯 기관총 탄약을 아주 자연스럽게 던져 넣고는 자기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이에 불안을 느낀 동기들이 대피하려는 순간 탄약이 유폭되었고,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17]
임관 초기 본토에서 근무하던 시절, 본인의 P-39 전투기 케이블로 인근 농가의 나무를 부러뜨렸다가 징계를 받는 일도 있었다.
부대인근 후보생들이 애용하는 단골 아가씨집이 있었다는데 그집 마담이 이웃마을에 있는 경쟁업소로 후보생들이 몰려갈까봐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넘어가버렸고, 빡친 예거는 술마시고 패싸움을 벌였다. 출동한 마을 보안관들이 권총을 겨누자 두 손 들고 도망쳤다고, 그리고 다음날 전투기를 몰고와 그 가게의 물탱크에 기총소사를 하고 튀었다고 한다.

6. 기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다. 항공기가 날아가는 것도 본 적도 없는 시골 깡촌 빈곤층에서 태어나 아무런 배경도 없이 대학이나 사관학교 졸업장도 없이 노력만으로 말단 정비병 사병에서 미 공군의 대표적인 장성이 된 인물이다. 그러니까 이등병부터 시작해서 준장이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선 대표적인 제2차 세계 대전 전쟁영웅 대접에 공군/항공업계의 대중적인 스타/우상으로 위인전에 등장하고 그의 이름을 딴 게임이 나올 정도의 세계적으로 유명인사에 대중적 인기 덕에 상당한 부자가 되었으니 소장 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영화 탑건톰 크루즈 이전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는 모든 아이들의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항공기는 제2차 세계 대전기에서는 P-51 머스탱, 한국전쟁기에서는 F-86이라고 한다.
당대 생존했던 에이스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볼 수 있는 영상이다.
장수를 하다보니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링크
전투기 에이스 모에화 애니 스트라이크 위치스샬롯 E. 예거로 모에화되어 연출되었다(...)
비행실력이나 이 분에 따르는 운을 보면 60-70년대 충분히 우주비행사로 선발될 수 있었으나, 대졸자를 우선시하는 미공군 및 NASA의 정책 때문에 선발되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필사의 도전 (Right Stuff)에서는 이분 이야기와 함께 동시에 활약한 우주비행사들 (존 글렌, 거스 그리섬, 고든 쿠퍼 등등) 이야기가 평행적으로 나온다. (영화 내에서 이 두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전개되는데 접점은 하나도 없다.)

[1] 모든 속도 기록은 수평 상태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하강하면 속도가 더 올라가고 상승하면 속도가 줄어들기 때문인데 이는 자동차의 최대 속도 측정을 할 때에 평지에서 직선으로만 가는 것과 비슷하다.[2] 폭격기에서 투하되어 미사일처럼 로켓 엔진으로 비행하는 비행기였다.[3] 이렇게 된 건 헤드온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Fw190와 헤드온 패스를 했는데 기체는 날개가 부러지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었다. 이때 머스탱의 윈드쉴드는 MG 151/20의 탄환을 막아냈다고 한다.[4] 단지 이건 공중전의 결과는 아니고 Me262 항목에도 나오는 억지로 선회하다 엔진에 이상이 생겨버린 기체를 격추한 것이다[5] 사모님 성만 봐도 얼마나 글래머러스(한국에서의 뉘앙스와는 다르게 영어에서는 '매력적인'이란 뜻.)할지 짐작이 안 간다.[6] 머큐리 세븐 중 공군 출신인 세 명이다. 나머지 넷은 해군 출신인 앨런 셰퍼드, 월리 시라, 스캇 카펜터와 해병대 출신인 존 글렌.[7] 뼈가 대상이라 절개하고 붙이고 고정하고 써쳐하면 끝인, 난이도는 비교적 높지 않은 수술이다. 외국에서는 시험에 합격한 소수의 간호사가 간단한 처방이나 수술을 대행하는데 그 수술 목록에 들어가는 정도. 다만 흉막공간은 그래도 꼼꼼하지 않으면 복막부터 어딜 절개할 지를 모르니 다리 쪽보단 약간 위험성이 있다. 오히려 사람 진료경험이 적은 마취나 쇼크가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저혈압성 쇼크나 effusion이나 특히 마취제의 용량이 문제가 되었을 뻔 했는데 다행히 잘 넘긴 편. 어쩌면 영장류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었거나 인간의 마취 책을 하나 구매해서 당 용량을 봤을 수도 있다.[8] 다만 예거를 비롯해 일부 테스트 파일럿들은 모름지기 파일럿이라면 우주에 갈 때 '''조종'''을 해서 가야지 머큐리처럼 짐짝처럼 얹혀서 올라갔다 짐짝처럼 떨어지는 것은 간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대중에게 엄청 유명한 점은 아니지만 '''조종'''을 해서 우주에 진출한 최초의 기록은 미국의 X-15 테스트 파일럿 로버트 화이트조셉 워커, 조 엥글 등이 가지고 있다.[9] 미 공군이 생기기 전에는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따로 존재하였다. 좀 쉽게 설명하면 해군의 해병대 같은 이미지.[10] 머큐리 우주비행사의 자격 요건에는 대졸인 미군 파일럿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일단 대학 졸업장을 (예비역) 병으로 입대한 뒤 장학금을 받든지 해서 대학에 갔다가 장교로 임관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실제로 오늘날 미군에서는 그렇게 해서 장교가 되는 경우도 흔하고, 그런 사례 중에 우주 비행사 선발 사례도 있다.(STS-51-L 사령관이었던 딕 스코비의 사례) 하지만 입대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예거에게는 그런 여유가 보장되지 안 했다.[11] 그렇다면 터스키기 에어맨들과 함께 근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대는 '''호위하는 폭격기 손실 0'''에다 '''프롭기로 제트기를 잡은''' 전적도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붉은 꼬리날개의 천사들'.[12] 그러나 이들 중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암 투병 중 서부에서 추운 워싱턴 DC까지 끌려와서 골골대던 파인만이었다. 사실 척 예거와 두 우주인과 파인만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영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13] 원인은 난소암[14] 이때 밀었던 전투기가 F-20, 우리나라에 팔아먹으려다 시범 비행 중 추락한 그놈[15] 게임제작시 척 예거가 고문으로 참여했기에 고증도 상당히 좋은편이다.[16] 스플릿 S 등 항공 기동 방법 설명 일부가 중복되어 있다[17] 사실 이런 경우 탄피가 고정이 안 돼서 탄두랑 탄피가 함께 날아가면서 탄피랑 탄두가 운동에너지를 나눠가지며 위력이 급감하고, 여기에 가스가 다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에 또 위력이 급감해서 치명적이지도 않다. 다만 눈에 맞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