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5세

 


[image]
'''왕호'''
제임스 5세 (James V)
'''출생'''
1512년 4월 10일
스코틀랜드 왕국 린리스고 린리스고 궁전
'''사망'''
1542년 12월 14일 (30세)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포클랜드 궁전
'''장례식'''
1543년 1월
홀리루드 수도원
'''재위'''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
1513년 9월 9일 ~ 1542년 12월 14일
'''배우자'''
발루아의 마들렌 (1537년 결혼 / 1537년 사망)
기즈의 마리 (1538년 결혼)
'''자녀'''
로버트, 제임스, 메리 1세
'''아버지'''
제임스 4세
'''어머니'''
잉글랜드의 마거릿
'''형제'''
제임스, 아서, 알렉산더
1. 개요
2. 갓난아기 왕
3. 제위 기간
4. 결혼
5. 헨리 8세와의 전쟁
6. 그 후
7. 평가


1. 개요


중세 스코트어: Iames V
스코틀랜드 게일어: Seumas V
영어 & 스코트어: James V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자 헨리 8세의 조카였다. 메리 1세(스코틀랜드)의 아버지이다. 그의 외손자 제임스 6세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이 탄생했다.

2. 갓난아기 왕


부친이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하자 '''1살 5개월'''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다.[1] 제임스 4세의 유언에 의하면 모후인 마거릿 튜더가 재혼하기 전까지 새 국왕의 섭정이 되도록 되어있었으나 아무래도 그녀가 헨리 8세의 친누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악감정을 품은 친프랑스파 스코트인들은 그녀 대신 올버니 공작 존을 적임자로 보았다.[2][3] 그런데 마거릿 튜더가 갑자기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하면서 친프랑스파 세력의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1515년 올버니 공작 존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했다.[4]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로부터 국경지대를 방비하는데 성공했고, 올버니 공작은 능숙하게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그 후 마거릿은 올버니 공작이 프랑스에 가있는 틈을 노려 아란 백작 등, 친잉글랜드파 귀족들과 함께 1524년 쿠테타를 일으켜 올버니 정권을 종식시키고 제임스 4세는 12살의 나이에 친정을 선포하였다.

3. 제위 기간


국왕이 된 직후에도 자신의 새아버지였던 앵거스 백작은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었고 헨리 8세는 친잉글랜드파였던 앵거스 백작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국왕은 귀족들의 협조로 앵거스 백작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앵거스 백작은 영지를 몰수당한채 탠털론 성(Tantallon Castle)으로 은거하였지만 곧 성을 포위한 국왕군에게 체포돼 1529년 잉글랜드로 추방당했고 그의 일가는 모두 숙청되었다. 그후 귀족들의 도움으로 왕실의 재정을 늘리고 왕실의 권위를 어느정도 높였다.

4. 결혼


국왕의 친정과 함께 왕의 결혼 문제가 부각됐다. 1517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을 갱신하는 루앙(Rouen) 조약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의 딸과 당시 5살이었던 제임스 5세 간의 결혼이 약속된적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딸들의 건강 문제로 머뭇거렸고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프랑스로부터 떨어트리기 위해 자신의 딸 메리와 제임스 5세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밖에 후보로 카를 5세의 누이와 덴마크 공주 등이 있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따라 프랑스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나 프랑수아 1세가 딸의 건강 문제로 프랑스 공주 대신 방돔(Vendôme) 공작의 딸 메리를 추천하자 일단 메리와 혼인하기로 하고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메리를 만났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직접 보자 초상화와 달라서 실망한데다 마음에 들지도 않았는지 혼인을 무효화하고 바로 돌아가 버렸다.
제임스 5세는 다시 프랑수아 1세에게 딸을 달라고 졸랐고, 공주인 마들렌(Madeleine) 역시 제임스 5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결국 프랑수아 1세는 마들렌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 1537년 초에 제임스 5세는 마들렌과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그해 7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끝내 프랑스 여자와 결혼할 작정이었던 제임스 5세는 이번엔 프랑스 유력 가문인 기즈(Guise) 가문[5] 출신인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한테 청혼했다. 이 때 그의 경쟁자는 다름아닌 외삼촌 헨리 8세였다. 이 때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목을 치고 제인 시무어와 사별한 뒤라 홀아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마리 드 기즈는 헨리 8세의 구혼을 거절하고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되기로 결정했다.[6] 어쨌든 국왕이 프랑스 여자랑 결혼하며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은 강화되었고 이는 잉글랜드와 사이가 악화됐다.

5. 헨리 8세와의 전쟁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으로 로마 교황과 단절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자 양국 사이에 불안한 조짐이 흘렀다. 스코틀랜드를 프랑스로부터 떼어내려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조카 제임스 5세에게 자신처럼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되기보다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왕과 교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현재 상황이 더 만족스러웠다. 제임스 5세가 말을 듣지 않자 헨리 8세는 자기가 직접 토론으로 조카를 설득하려고 했다.[7] 그래서 헨리 8세는 자신의 북부 잉글랜드 순회 때 요크(York)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제임스 5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헨리 8세는 제임스가 올거라고 믿고 요크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흥분하지 않고 제임스 5세에게 '너그러운 삼촌으로서 조카가 오지 않은 것을 기꺼이 용서해 주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지만 뒤로는 자신을 무시한 조카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러다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프랑스가 바빠지자 헨리 8세는 드디어 괘씸한 조카를 손봐줄 기회가 왔다 직감하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며 전쟁이 터졌다.[8] 제임스 5세는 군대를 소집해서 맞서 싸웠고 결국 잉글랜드 군은 고전 끝에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한다. 이에 제임스 5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Battle of Solway Moss)에서 제임스 5세가 이쓰는 1만 8천여 명의 스코틀랜드군은 3천 명의 잉글랜드군에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 패했다.[9] 이 패배로 낙담한 국왕은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며 국경지대 방비를 강화하라는 몇몇 지시를 내리고 임신한 왕비와 함께 린리스고(Linlithgow)로 향했다.

6. 그 후


고작 3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상당히 좋지않았던 제임스는 병석에 누웠다.[10]
12월 8일 왕비가 자신이 기다리던 대를 이을 아들이 아닌 딸 메리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며 "우리 왕조는 여자 아이[11]로 시작돼 여자 아이로 끝나는구나"("It began with a girl and it will end with a girl")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딸이 태어나고 나서 일주일도 안 된 12월 14일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30세. 왕비가 메리를 낳기 전에 낳았던 그의 두 적자들인 제임스와 로버트는 모두 영아기에 죽었기에 메리가 그의 사후에 유일한 적자녀로서 여왕이 되었으며 훗날의 메리 1세가 되었다.

7. 평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과, 똑같이 패전으로 사망한 부왕보다 인간적인 매력도 다소 부족해 스코틀랜드의 역대 국왕 중에서 인기는 없는 편이다. 하지만 친정을 시작한 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던 새아버지를 제압하고 플로든 전투 이후 위태롭던 왕권을 안정시키는 등 능력이 없는 왕이 아니었다. 특히 제임스 5세는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훤칠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마지막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결과가 나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스코틀랜드 임금들이 잉글랜드한테 겪었던 패전보다 특별한 건 없었다. 더욱이 그가 죽었을 땐 아직 젊은 나이였고 헨리 8세는 노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였다. 만약 제임스 5세가 건강히 오래 살아서 계속 통치하며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면 스코틀랜드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1] 참고로 같은 케이스인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에 왕이 되었다.[2] 제임스 3세의 동생 알렉산더의 아들로 제임스 5세 다음으로 스코틀랜드 왕위계승 서열 2위였다.[3] 존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스코틀랜드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프랑스로 망명을 갔고 존이 아기였을 때 죽었다. 이후로 존은 쭉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었다.[4] 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동맹을 상징했다.[5]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를 배출한 로렌 가문의 분가이다. 참고로 기즈 가문의 본가인 로렌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제후이기에 유럽의 통치 가문 대우를 받아서 왕족과 동일한 혼인이 가능했다.[6] 이때 마리 드 기즈는 헨리 8세의 혼담에 죽은 앤 불린의 사례를 들며(당시 앤은 사형집행인에게 자신의 목이 가늘어서 치기 쉬울 것이라 말했다.) 자신의 목은 얇다는 말을 남기며 거절했다고 한다.[7] 헨리는 사제가 되기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고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논문의 반박문을 쓰기도 했다. [8] 헨리 8세는 메리 1세(스코틀랜드)가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혼인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을 거친 구혼(Rough Wooing)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전쟁은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할 때까지도 이어졌다.[9] 숫적으론 잉글랜드 군이 열세였지만 스코틀랜드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진흙탕에 군대가 있어 위치가 나빴고 무엇보다 잉글랜드군에겐 스코틀랜드 군이 없었던 경기병이 있었다.[10]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겪은 참패,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란 시도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평소에 앓던 신경쇠약이 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질이나 콜레라에 감염됐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1]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브루스가 월터 스튜어트와 결혼하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이으며 스튜어트 왕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