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보병사단 포병여단

 






'''제3보병사단 포병여단'''
'''第3步兵師團 砲兵旅團'''
'''The 3rd Infantry Division Artillery Brigade'''
[image]
''''''
'''창설일'''
0000년 00월 00일(제3보병사단 포병연대)
2020년 12월 1일('''제3보병사단 포병여단''')
'''상징명칭'''
'''왕벌'''
'''소속'''
[image]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3보병사단
'''규모'''
여단
'''역할'''
사단 예하 보병여단 화력지원
'''여단장'''
대령 000
'''위치'''
강원도 철원군

1. 개요
2. 상세
3. 예하부대
3.1. 여단 직할대
3.2. 제11포병대대
3.3. 제71포병대대
3.4. 제72포병대대
3.5. 제635포병대대
3.6. 과거 편제
4. 출신인물
4.2. 장교/부사관
4.3. 병
5. 사건사고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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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5군단 제3보병사단 예하 포병여단. 별칭은 '''왕벌'''.

2. 상세


포병연대 본부, 18연대, 23연대 등 신막사 건축이 완료된 곳도 있고 건축 중인 곳이 있는 등 현대화가 이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생활 환경은 열악한데, 특히 연대본부와 11포병대대(2010년 추석직전에 입주.), 71포병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2개 대대들은 그야말로 현시창. 특히나 포병의 경우 여전히 포반장을 병 출신 하사가 하는 등 아직 개편되지 않은 잔재가 남아있고, 병영 내 부조리나 악습 역시 알게 모르게 남아있으며 심한 곳의 경우 부대가 포대 단위로 독립되어 있어 열악한 환경은 물론이요 외딴 산속에 당직사관이나 기타 관리간부만 출근할 뿐, '간부의 천국 병의 지옥'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11대대의 경우 병영내 부조리가 2008년하고 2010년에 사단 기무부대와 기무사령부 불시검열에서 적발이 되는 바람에 한동안 대영창 시대의 개막과 함께 피바람이 불었었다.[1] 여타 관리의 눈길이 닿지 않아 분기별 실사격 훈련 등으로 포를 빼는 일도 잦아서 자신의 주특기가 155mm 견인포병이라면[2] 그저 묵념(...). 당장 수작업으로 박았다 뺐다 해야하는 견인포 발톱만 해도 40kg이 넘는 포병의 특성상, 분대원 하나하나가 제 일을 해주지 않으면 직접적으로 다른 분대원에게 타격이 가기 때문에 갈굼이나 체력단련 강요가 심하다.

3. 예하부대



3.1. 여단 직할대



3.2. 제11포병대대


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

3.3. 제71포병대대


3.7완전작전 포병대대 사단 내에서는 11포병대대 때문에 콩라인 취급을 받는경우가 많다.

3.4. 제72포병대대


사단 신병교육대랑 의무대랑 바로 옆에 있어서 신교대랑 23연대본부의 옆집 취급 받는다..

3.5. 제635포병대대


635대대는 155mm 견인포에 독립포대로 악명 높은 부대였으나 현재는 K-9 자주포로 개편되었다.

3.6. 과거 편제



4. 출신인물



4.1. 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연대장 및 여단장.
'''역대 제3보병사단 포병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000
예) 대령
육사 00기
연대장

00대
강인규
소장
육사 47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00대
000
대령
육사 00기
여단장


4.2. 장교/부사관



4.3. 병



5. 사건사고


  • 과거 1973년에 18연대 전방대대가 군사분계선 표지판 보수 작업 중에 북한군의 사격도발에 의해 아군이 부상당하자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이 포병연대 본부에 전화를 걸어 포병대응사격을 했는데 105mm 견인곡사포로 백린탄을 발사해 북한군 GP를 직격, 그것도 GP건물 내부에 작렬시킨 바람에 북한군 상주인원 36명까지 몰살시켜버린 적이 있으니 이른바 3.7 완전작전. 고폭탄 파편도 아니고 그 악명높은 백린탄 화염으로 군인 수십명이 끔찍하게 분살당하는 생지옥을 겪은 후 백골부대는 북한군 전방사단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사단이 통째로 교체된 건 물론이고 3사단에 대응하기 위해 2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마저도 북한 고위층이 가장 꺼리는 임지가 되어버렸다. 북한군은 한국으로의 귀순을 막으려고 최전방 사단에는 충성심이 확실한 고급 당원 일가만 배치하는데, 그 일가가 백린탄에 맞아 끔찍하게 죽었으니... 즉 당시 죽은 북한군들은 평양 핵심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 고위층의 큰 원한을 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12년 후인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평양에 갔을 때 북한 정치 보위부의 고위 간부가 방문단이 묵던 호텔로 불쑥 찾아와서는 "함경남도 출신에 박가 성을 가진 그 요란한 사단장은 요즘 뭘 하오?"라고 따져묻더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남북협상 기간이었고 이로 인해 약 1달 뒤에 박정인 장군은 불명예전역을 하게 된다(...). 다만 박 장군의 잘못도 있긴 한데 완전작전 후 사단 차량들을 일제히 비무장지대로 진군시키는 일종의 무력시위를 했고 당시 북한은 비상사태를 발령했다. 이는 작전권을 가지는 야전군사령관이나 군령권을 가진 육군참모총장(당시는 군령권이 육군참모총장에게 있었다.)이나 명령할 수 있을 정도이며 박 장군의 분명한 월권행위였다.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사태를 일개 사단장이 일으킨 것. 비슷한 사례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무타구치 렌야가 있다.

6. 기타


[1] 2010년의 경우에는 대대 주임원사가 대대 부사관단 회비 횡령으로 걸리는 바람에 당시 군생활 했던 부대원들이 갑자 [2] 635대대가 K-9으로 바뀌기 전에는 11, 71, 72대대는 105미리 견인포였다... 심지어는 11대대에서 1942년산 105미리 견인포가 발견된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