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포스
'''조 포스(Joseph Jacob Foss / Joe Foss : 1915년 4월 17일~2003년 1월 1일)'''
1. 서훈
해군 비행사 기장
미 공군 파일럿 기장
명예훈장
해군 십자훈장
에어 메달 2회
2차 대전 승전 메달
공군 장기 근속장
2. 약력
미국 해병대에서 군인 경력을 시작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가해 해병대 최고의 격추수를 거둔 수퍼 에이스가 된 조 포스는 과달카날 전선에서 눈부신 무공을 인정받아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에는 주방위 공군에서 복무하면서 공군 준장까지 진급한 뒤, 군복을 벗고는 정계에 진출하여 1955년부터 4년간 자신의 고향 사우스다코타주의 20대 주지사로 활동했다. 전미총기협회 회장을 지내는 한편, 내셔널 풋볼 리그의 위원도 역임했으며 텔레비전 방송국에 들어가 브로드캐스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3. 우렁찬 탄일성
1915년 4월 17일, 미국 중부 사우스다코타주 수 폴스(Sioux Falls)의 한 농가에서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조 포스라 이름붙여진 이 아기는 울음소리가 워낙 커서 거의 반 마일이나 떨어진 이웃집까지 들렸다고 하는데, 무럭무럭 자라나 10대 소년이 되었다. 시골 소년 조가 살고 있는 농장은 주의 남동부 지역인데다 미네소타주와 아이오와주 경계지역이어서 북미 대륙의 동서남북을 오가는 비행기들이 썩 잘 보이는 위치였다. 소년 조는 폭음을 내며 다가오다가 하늘을 가로질러 멀리 사라져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날고 싶다는 꿈이 싹트게 된다.
아직 십대 중반이던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조는 장남으로써 가족 농장을 계속 운영해나가야 했지만 평생 시골 구석에서 농사나 짓기는 싫었다. 마침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 횡단에 관한 뉴스는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조 포스는 더더욱 비행기를 몰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고, 결국 미련없이 농장을 남동생에게 넘기고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교로 진학해 그곳에서 비행클럽을 다니며 조종을 배우게 된다.
4. 해병 항공대로
조 포스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그 무렵의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아 마음에 드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비행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이에 청년 조 포스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26살이 되어서야 펜사콜라(Pensacola) 기지에서 비행사 뱃지를 가슴에 달게 되었지만, 전투기 대신 샌디에이고 기지에서 OY-1 관측기를 모는 해병 제1사진정찰 비행대(Marine Photographic Squadron 1 : VMO-1)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투비행대로 옮겨달라고 상부에 청원을 넣었지만, 전투기를 몰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거절당했다. 상관들도 전투기 보다는 비행정이나 폭격기를 모는 편이 낫다고 했지만, 고집 센 포스는 꿈을 꺾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일본이 진주만에 기습을 걸어왔고,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어 늙은 조종사 조 포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조 포스가 학교동창 준 샥스태드(June E. Shakstad)와 결혼식을 올리고, F4F 와일드캣 전투기로 기종전환 훈련을 모두 마친 다음 일선에 배치된 때는 해병대가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와 비행대원들이 보그급 호위항공모함 USS Copahee에 실려 도착한 이름 모를 섬, 과달카날은 놀랄 만큼 열악한 곳이었으나 조 포스는 자신의 가치를 멋지게 증명해냈다. 캑터스 항공대에 배치된 조 포스 중위는 불과 6주만에 일본군 항공기 23대를 확인 격추한 것이다. 대위로 진급한 몇 달 후, 다시 전투에 뛰어든 그는 3대를 더 제물로 삼았다. 해병대 최고의 조종사가 탄생한 것이었고, 조 포스는 일약 엄청난 명성은 물론 1943년 5월 18일에는 백악관에 초청받아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그의 목에 명예훈장을 걸어주었다. 1943년 6월 7일에 나온 라이프지의 표지에는 활짝 웃는 조 포스의 사진과 함께 ''넘버원 아메리칸 에이스(America's No. 1 Ace)''란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기록은 나중에 그레고리 보잉턴이 28대를 격추시키면서 깨졌지만, 그렇다고 그의 무공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5. 종전 후의 눈부신 경력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 말에 그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몇 달 동안 생사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병은 떨쳐냈지만, 신체가 지나치게 쇠약해진 그는 더 이상 비행은 할 수 없게 되었다. 1945년에 그는 고향 사우스다코타로 돌아와 친구와 함께 자동차 딜러 사업을 하다가 1955년에는 주지사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배경도 변변하지 않던 그가 쟁쟁한 지역 유지들을 제치고 당선된 것은 과거의 유명세도 있었지만, 실제로 전후에 사우스다코타 주방위공군의 창설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주민들이 조 포스의 공익에 대한 봉사 정신에 열광한 결과였다.
4년의 임기를 마치고 그에게 주어진 또다른 명예는 내셔널 풋볼 리그의 첫 번째 감독관이었다. 그는 동시에 ABC 방송국에 전미를 향해 인기리에 방송되던 2개의 스포츠 쇼에서 브로드캐스터를 맡았고, 비즈니스 임원으로서 많은 자선 단체와 조직을 지원했다. 특히 1988년부터 2년 동안 전미총기협회장이 된 것은 그의 경력에서 더욱 빛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 포스는 평생 캑터스 비행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을 잊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날 수 없지만, 아직도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노라면 먼저 간 캑터스의 내 전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케이시 브랜든(Koller C. “Casey” Brandon : 1918~1945)과 대니 도일(Cecil J. "Danny" Doyle : 1920~1942) 같은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종종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뭘 할 건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함께 할 수 없었지요. 나는 편대원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고 죽는 것을 함께 하기로 굳은 맹세를 나눈 전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지요."'''
6. 떠나간 영웅
은퇴하고 늘그막의 조 포스는 미 공군으로부터 경의의 뜻을 담아 준장 계급이 주어졌고, 아리조나주 스콧데일(Scottsdale)에 살면서 이따금씩 행사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었다. 2003년 1월 1일, 해병대가 낳은 위대한 에이스였던 조 포스는 87세의 나이에 자신의 저택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자랑스러운 미국인의 표상으로 알려진 그는 같은 해 1월 22일에 딕 체니, 존 글렌 같은 수많은 저명한 조문객들의 배웅을 받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서 당시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빌 잔클로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주비행사 출신 상원의원 존 글렌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전했다.'''"미국이 가장 절실하게 영웅을 필요로 했던 1940년대 초반의 깊고 어두웠던 시기에 그는 창백한 어둠을 뚫고 하나의 빛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데니스 로드먼 이상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조 포스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애국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 분은 진정 올곧게,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또한 우리 중에 하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