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후한)
1. 개요
趙岐
(?[1] ~ 201)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빈경(邠卿).
2. 생애
경조 장릉 사람으로 초명은 가(嘉)로 어사대에서 태어나 자를 대경(台卿)이라 한 것이지만 훗날에 난을 피하면서 이름과 자를 고쳐 고향을 잊지 않다는 것을 나타냈다.
젊어서 경서에 밝고 재능과 기예가 있어 마융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마융이 외척의 유복한 집안인 것을 경멸해 마융과 대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군을 섬겨 결백하고 정직하면서 악을 미워하기에 공경받으면서도 두려워해 꺼려졌으며, 나이 30여 세에 중병으로 7년 간 병상에 있었다.
병이 치유되고 154년에 사공연이 되었으며, 태수가 부모의 상 때문에 관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도록 상소했다. 양기에게 배속되어 현자들을 부를 수 있도록 진언했지만 수용되지 않았으며, 피씨현장에 임명되었고 좌승이 하동태수가 되자 내시의 부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화를 내 서쪽으로 돌아갔다.
경조윤 연독의 공조를 지내다가 사촌형 조습이 중상시 당형의 형인 당현에게 비난의 편지를 종종 보냈는데, 158년에 당현이 경조윤이 되자 재난을 미칠 것을 두려워해 조전과 함께 난을 피해 도망갔다. 당현이 조기의 집안 사람이나 일족들을 잡아 죽였으며, 조기는 사방으로 난을 피하고 돌아다니다가 이름을 숨기면서 북해 시내에서 떡을 팔았다.
손숭이 조기를 보고 비상한 사람이라 여겨 수레를 세우고 청해 동승하도록 했는데, 조기가 놀라 안색이 변하자 손숭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자 조기는 평상시부터 손숭의 이름을 들었기에 자신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고 함께 그 집으로 돌아갔다.
손숭 덕분에 조기는 숨어지낼 수 있었고 당씨 일족이 멸하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166년에 호광의 초빙을 받아 출사했고 남흉노, 오환, 선비 등이 봉기하자 천거받아 병주자사가 되었다. 조기는 변경 방비의 대책을 상주하려고 했지만 상주가 이르기도 전에 집안이 당고의 금에 연루되면서 관직에서 박탈되었고 이 때 어구론을 저술했다.
당고의 금으로 10여 년 동안 금고형에 처해지다가 184년에 황건적의 난으로 관리들을 선발하면서 의랑이 되었으며, 186년에 장온이 관중에서 서쪽을 정벌하러 가자 휘하의 장사가 되어 별동대로 안정에 주둔했다. 하진의 추천으로 돈황태수가 되었지만 부임하러 가던 도중 양무에서 변장에게 붙잡혀 수하로 삼으려고 하자 거짓말로 피해 소재를 옮기다가 장안으로 돌아갔다면서 헌제가 서쪽으로 천도하자 의랑이 되었다가 태복으로 승진했으며, 이각이 정권을 잡자 마일제를 천하를 위무시키도록 하자 조기는 부사가 되어 동행했다. 원소, 공손찬이 기주를 두고 다투자 조기가 이들을 중재했으며, 원소, 공손찬과 기일을 정하고 낙양에 모여 거가를 봉영하기로 약속했고 조기는 진류에 도착하자 병에 걸렸다.
2년이 지났지만 원소, 공손찬은 오지 않았고 194년에 조정의 조서를 통해 낙양에 소환되었으며, 헌제가 동승을 보내 궁전을 수리시키자 조기는 동승에게 자신은 유표를 설득하겠다고 하자 동승이 이를 상소로 올려 조기는 형주로 가서 조세하도록 독촉했다.
조기가 오자 유표가 군사를 내어 낙양에서 궁전의 수리를 돕게 했으며, 손숭이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것을 알고 손숭의 극진한 행동, 의리가 있음을 칭찬해 청주자사로 삼도록 상소를 올렸다. 조기는 노환으로 인해 형주에 머물렀고 조조가 사공에 임명되자 조기가 조조의 추천을 받았으며, 환전, 공융도 이를 지지했고 사자가 파견되어 조기는 태상에 임명되었다.
90여 세로 201년에 사망했고 그는 맹자장구, 삼보결록 등을 저술했다.
3. 유학자로서의 면모
삼국시대의 인물이지만 삼국지의 중심 서사와는 큰 관계가 없는 인물로, 마일제 등의 중앙 관료들이 그렇듯 삼국지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잘 나오지 않고 삼국지 팬덤에서의 주목도도 매우 낮다.
그러나 중국철학사에서는 꽤 중요한 영향을 미친 학자인데, 현전하는 맹자 주석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인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저술한 인물이기 때문. 맹자장구는 주자 이전 맹자 이해의 경향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저술이다. 논어, 상서 등의 다른 유가 텍스트는 한대부터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고,[2] 노자나 주역 등 도가적 색채가 강한 저술들 역시 꾸준히 조명을 받다가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청담론으로 발전하는 등 인기가 있었던 것에 비하여, 맹자는 주자의 재발견 이전까지는 공자의 적통 후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다.[3] 때문에 맹자를 체계적으로 다룬 저술도 주희 이전까지는 많지 않았음에도, 조기가 맹자장구에서 기초한 장구 구분과 훈고적 해석이 주자의 맹자집주를 거치며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맹자 이해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학자.[4] 이 덕에 조기와 주자는 맹자의 가장 중요한 두 주석가로 꼽힌다.
조기의 맹자장구는 약 400년의 격차가 있음에도 맹자의 원뜻을 비교적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훈고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맹자를 해설한 주석의 완성도도 뛰어나다. 특히 맹자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중시하였다. 이는 후대의 주자가 맹자를 형이상론과 심성론에 기초하여 거의 오독과 다름없다고 할 만큼 파격적으로 재해석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것과 대비된다. 조기 스스로가 당고의 금으로 화를 입는 등 후한의 정치 현실에 비애를 느꼈고, 여기에 황건적의 난, 동탁의 폭정 등 삼국지의 오프닝에 해당하는 난세까지 경험했으니 맹자의 사회정치적 의미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주희 역시 조기의 주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훈고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조기의 주석을 별다른 반박이나 수정, 설명 없이 인용한 경우도 많을 정도로 조기의 견해에 수용적인 면을 보인데다가 장구의 구분 역시 조기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조기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주희는 조기의 견해를 맹자집주에 이용했음에도 "졸렬하여 분명하지 않다"면서 맹자장구를 비판했다(...). 훈고학적 방법에 주희가 비판적 태도를 보인 것이 그 이유겠지만, 대학자임에도 가끔 괴팍하거나 졸렬한 면이 있었던 주희의 흑역사 에피소드로도 볼 수 있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내 학계의 경우 조기만이 독립적으로 연구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1] 중국 위키백과에선 108년이라 기술되어 있다. 맹자장구에서 조기는 "나이 50 무렵 하늘이 슬픔을 내려 어렵고 곤란한 상황을 당했다. 이름을 바꾸고 몸을 숨겨 천하 팔방으로 떠돈 지 10여 년이었다." 라고 본인의 경험을 진술하는데, 이것이 당현이 경조윤이 되자 조기가 피난한 것을 가리킨다면 158년이다. 중국 위키백과에서는 여기서 50년을 뺀 108년을 생년으로 표기한 듯하다.[2] 삼국지 인물로는 논어집해를 지은 하안과 상서장구를 지은 노식이 좋은 예.[3] 이것을 주자 이전까지는 맹자가 '인기가 없었다'고 보는 통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후한 말이나 삼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설제 역시 맹자의 가르침에 능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등 맹자의 파급력은 결코 낮지 않았다.[4] 장구(章句)란 각 장(章)과 구절(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조기가 맹자의 목차를 나누고 각 장에 이름을 붙여 편집한 것이 오늘날에도 표준으로 쓰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