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류큐 관계

 


'''조선-류큐 관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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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류큐의 관계.

2. 상세


류큐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해상무역을 생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 및 중국, 동쪽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교류하고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도 나하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가게 등을 차려 장사를 한다.

신숙주,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한국의 남방 우호국이었다. 실제 류큐에선 조선을 형으로 모시거나 우호의 제스처를 종종 보냈는데, 사쓰마 침략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후에도 너희에게 가까운 나라가 어디냐는 물음에 조선이라고 대답했다. 사쓰마가 류큐 왕국을 칠 때 했던 말 중 하나가 일본에 귀속된 주제에 요즘에 '''일본을 배반하고 조선에 귀속되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이건 그저 어거지 트집. 조선은 초기부터 류큐 왕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시큰둥했다.
물론 이런 류큐 왕국의 행동이 정말로 조선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교역으로 먹고 사는 류큐에게 있어서 명나라와 같이 자기보다 강국이자 새로운 교역로가 될 수도 있는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또한 왜구나 일본 문제에 대해 멀리 있는 명나라보다 가까운 조선의 힘이 더 절실한 것도 있었다. 대충 조선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와 후금(청나라)이 흥하자 명나라의 힘을 빌리려 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의 선우영준이라는 교수는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의 주민들이 류큐 일대로 이주해 와서 지배했다는 주장을 했다. 2007년엔 고려삼별초가 류큐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건설했다는 학설과 그에 상응하는 역사 증거들이 발견됐다. #, 또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류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근거는 없어 믿기 힘들다. 고려의 기와가 발견된 걸로 보아 고려의 문물과 영향력 전파는 사실로 보이나, 아직까지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우호국가로서 시작은 류큐에서 먼저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 이전까지 양국은 교린을 하던 관계였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고 나온다.[1] 꾸준히 사신과 예물을 보내면서 교린하였지만[2] 유구국이 사쓰마 번에 정복된 뒤에는 교류가 줄어들어서 거의 없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과 류큐 쪽 자료를 근거로 조선과 유구의 상호교류와 상호 인식을 시대순으로 분석한도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도 좋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에 제주도 사람들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반대로 류큐 사람들이 제주도로 표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과 류큐 양국 간에 이런 사람들을 상대국에 돌려 보내는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광해군 3년(1611년)에는 류큐 왕자가 보물을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하기도 했는데, 당시 제주도의 탐관오리들인 제주목사 이기빈, 제주판관 문희현이 이를 왜구라고 주장하며 약탈하여 왕자가 목숨을 잃는 사태도 있었다.[3]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한양의 조정에 알려져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다가 흐지부지 됐었던 듯. 이기빈은 오히려 함경도 병마절도사까지 승진했다. 조선왕조실록기록이 있다. 지금도 이에 관련하여 제주도에는 설화가 전하고 있기도 한다.
조선에서는 1416년에 이예(李藝)를 사신으로 류큐에 파견하였고, 왜구에게 잡혀 끌려갔던 조선인 44명을 구해서 돌아왔다.
1802년, 조선의 평민 집단이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류큐 현지인들은 이들을 약 8개월간 후하게 대접하고 귀국할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때 표류민이었던 문순득은 훗날 여기서 직접 체험한 것들을 모아 정약전이 '표해시말'을 집필하는데 도움을 줬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는 당시 일본과 류큐국에 대한 자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류큐 일대가 현재는 일본에 소속돼 있지만 과거에는 별도의 나라를 이루었던 점 때문에 한국의 제주특별자치도(옛 탐라)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3. 관련 문서


[1] 당시 공식 표기가 이거였다. 류큐 왕국이니 하는 명칭은 현대에 이 나라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동아시아에서 제국, 왕국, 공국, 민국/공화국 같은 표현들을 국호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관례가 동아시아에 유입·정착되면서 이뤄진 것이다.[2]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유구왕 찰도가 조선에 臣을 칭한 적도 있고 조공을 먼저 바치거나 광해군에게 명나라에 왕작을 받은 것을 알리며 조선은 형, 유구는 동생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3] 류큐가 아니라 베트남 선박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