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三別抄
1. 개요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 탄생한 친위대. 여몽전쟁 이후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다.
2. 상세
고려에는 원래 '''별초(別抄)'''라고 하여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씨 무인 정권 시절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고 힘 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조직한 야별초(夜別抄)가 삼별초의 전신 세력이다. 간단히 말해 '''권력자가 부리는 사병들'''이었다. 하지만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준동하자 야별초에게 그들을 토벌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하면서 서서히 정규군으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바는 최씨 무인 정권의 진짜 사병은 따로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들은 여몽전쟁에도 동원되지 않고 말 그대로 정권 유지만을 목적으로 존재했다. 태생이 사병이어서 사병의 성격은 남아있었지만, 정규군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최우는 임시 조직이였던 야별초를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야별초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눴고,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쳐서 삼별초를 구성하였다. 이 시기에 삼별초는 치안 유지, 궁궐 수비, 요인 경호, 적장 암살, 몽골과의 전투(강화도 방위와 각지 유격전과 방어전) 등의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냥 혼자서 다 해먹었다고 보면 된다.
최씨 무신정권이 본토의 정규군을 양성할 경우, 본토의 정규군들이 자신들의 목을 노릴거라 생각해 삼별초를 키웠다는건 근거없는 인터넷발 뇌피셜이고 경외군 혼성제하에서 중앙군과 북계에 주력군을 배치하는 기존 체계가 거듭된 외우내환과 경제적 한계로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1차 침입때 북계의 주진군과 방어시설, 징발체계가 철저히 파괴되고 안북성에서 3군이 괴멸하며 북계와 중앙의 2군6위 체제는 한계를 맞이한다. 기존 전력은 소멸했고 무신정변 이전부터 시작된 흔들리던 전시과 체제의 한계점이 갈수록 커지며 군반씨족과 농민 번상병을 통한 인적 구성이 불가능해졌다.
사라진 정규군의 자리를 대신한 존재가 삼별초였고 때문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려 조정은 남도에서 병사들을 새로 뽑아야 했다.
강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의 새로운 중앙군으로 삼별초의 영향력은 무시못할 수준이었는데 아예 집권한 무인을 제거하고 그 일파를 숙청하려고 삼별초가 통째로 동원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김준은 삼별초를 동원해 최의 세력을 싸그리 쳐내고('''무오정변'''), 60년 유지된 최씨 무인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그 뒤에는 임연도 삼별초를 이용해 김준 세력을 없애버렸고('''무진정변'''), 나중에는 원종이 삼별초를 이용해 당시 실권자인 임유무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100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을 끝내버렸다('''경오정변'''). 이를 보면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혼란기 친위대의 행보와 유사할지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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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고려 원종은 무신 정권을 종식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원나라와 손을 잡으며, 개경 환도를 준비했기에 대몽 항쟁 일선에서 활동하던 삼별초 처지에서는 그에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도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원래 이런 거대한 조직을 해산할 때에는 내부에 포섭자도 만들고 부대별로 쪼개 놓고 반목하게 하여 저희끼리 알아서 해체되게 끔 유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대뜸 해산하고, 능력에 따라 재등용을 하거나 안 하겠다고 대놓고 못 박아버린 것이다. 이 말은 너희 중에 맘에 안 드는 놈은 다 모가지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고 이때까지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으로 왕실부터 문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원한을 쌓아 온 삼별초 내에 불안과 불만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270년 원종이 해산령을 내리자 당시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3] 를 중심으로 뭉쳐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일단 강화도에서 벗어나 진도로 이동하여 새 성을 짓고 본격적인 항쟁을 전개한다. 당시 장식품으로 전락한 고려 조정군은 삼별초에게 속수무책으로 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사이 삼별초는 나주에 이르는 호남지역과 남해안의 주요한 지역, 제주도를 석권하면서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 조정이라고 대내외에 선전하였다.
결국 고려 원종은 서둘러 난의 진압과 왕정 복위를 위해 원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1271년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여몽연합군을 결성하고 진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진도에 도착한 여몽연합군은 불창화포를 쏟아부었고 삼별초는 죽을 각오로 항전했지만 결국 패배해 배중손은 전사하고 명목상으로 왕위에 올랐던 승화후 왕온마저 피살당한다.[4][5] 잔존한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지만 1273년 여원연합군의 공격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3. 류큐와의 관계
사학계에서는 삼별초의 거점이었던, 전라남도 珍島郡 內面 龍藏里 龍藏山(진도군 내면 용장리 용장성)에 엄존했던 龍藏山城(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류큐 왕국에서 발견된 기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세웠거나 류큐 왕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아직까지 확실히 검증되진 않았다. 관련기사
위의 내용이 KBS 역사추적으로 방영된 적도 있다.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인데 용장산성 기와 외에도 오키나와 현지의 식습관, 제주도와 비슷한 돌담들,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구원요청, 연호 표시 유무, 류큐 왕국에 대한 미싱링크 등을 근거로 들어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완전히 토벌된 것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가서 살았다는 주장을 편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남은 삼별초를 잡아다 쳐죽이기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했을 정도였으므로 이들에게는 항복 후 고려로 다시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이다.
4. 일본과의 관계
실제로 삼별초는 1271년 일본에 구원을 요청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고려첩장불심조조'라고 해서 일본 다자이후 측 관리들이 "이번에 새로 온 국서[6] 가 전에 고려에서 받은 국서와는 내용 취지가 다르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의아해한 대목만을 추려 교토 조정에 보낸 것인데, 대체로 몽골을 칭찬하던 전의 국서와는 달리 몽골을 엄청나게 욕하면서 진일보해 몽골에 맞서서 함께 싸우자고 하면서 군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을 유추 가능하고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낼 단체는 시대 상황상 삼별초밖에 없다. 2001년 일본 NHK 대하 사극 <호조 도키무네>에도 이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중 나레이션으로 "이때 고려 본토에서 삼별초가 봉기해서 몽골에 맞서 항쟁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막부의 관리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라고 소개하면서, 국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들이 나오자 삼별초가 고려사 기록 그대로 반역자를 넘어서 친일 세력이 되어 김방경이 다시금 영웅이 되는 상황이 되고 일본 역사책에선 삼별초가 민중들의 영웅으로 격상이 되었으며 덕분에 다시 김방경에 대한 평이 올라갔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한편 고려첩장 불심조조가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1977년의 일이고 한국에서는 일본이 삼별초를 재평가하기 훨씬 전, 그것도 해방 이전인 식민통치 시절에 김상기가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7] 라는 논문을 발표해 삼별초를 '대외항쟁'이라고 하는 재해석을 시도했었다.
또한 삼별초를 대외항쟁으로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고려첩장 불심조조'는 당시 삼별초의 항쟁이나 결과적으로 삼별초 항쟁으로 일본 침공이 (삼별초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늦춰져서 일본에 '방비'할 시간을 주었던 점과 함께 해석하면 몽골의 일본 침공을 원구(元寇)라 부르는 일본에서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침략해 선량한 일본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에 대해 "삼별초가 몽골하고 피 터지게 싸우면서 일본에 국서를 보내 연합전선을 시도했지만 일본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결국 몽골 침공을 겪었다"고 반박할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중국 대륙에서, 그리고 고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곳에서의 상황이 일본 열도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첩보나 정보 수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한 정세를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막부의 실책이었다.[8]
국내에서 윤용혁이나 김보한 등 삼별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조명신사략》 등 제주 삼별초의 일부로 보이는 세력이 일본으로 가서 남송인들과 함께 몽골에서 보낸 사신 조양필 등이 일본 초유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훼방하려 했다는 사료를 발굴하고, 제주 삼별초가 쌓았던 환해장성이 일본 막부가 규슈 연안에 수축한 '원구방루'라 불리는 해안 상륙을 저지하는 방어용 성벽 축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5. 설화 속 삼별초
제주도에서는 김통정을 다룬 설화가 조금 남았다. 설화는 지역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데, 어떤 설화에서는 김통정은 지략과 도술을 부리는 장군으로 영걸 같은 인재지만, 다른 설화에서는 제주도 백성을 핍박하고 결국 실패하는 인재로 그려진다. 또 제주도에는 김통정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토벌군에게 사살당하는 이야기나 그 어머니나 장모나 둘 다 토굴에 들어가서 숨었다는 전설도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삼별초가 직접 지배하던 제주도 북부 일대에는 김통정을 나쁘게 표현한 전설이 많은데 제주도 남부에는 김통정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전설이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환생한 김통정이 왜구를 격퇴한다"는 내용의 전설이 다른 유형으로 전래하기기도 한다. 예컨대 제주도 북부에서는 '김통정이 포악하고 욕심을 부려 하느님이 장수 삼 명을 내려보내 김통정을 징벌토록 했다'는 전설이 있는 반면, 제주도 남부에서는 '원나라에서 김통정을 암살하고자 자객 삼 명을 밀파했으나 모두 김통정의 도술에 당하고 도망했다'는 내용으로 김통정에게 호의적이다. 삼별초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평가가 상반되게 전해지는 것은 반외세, 반개경정부에 대한 김통정의 항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에,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탐라 백성들의 삶을 매우 어렵게 만든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9]#
6. 관련인물
6.1. 무신
6.2. 왕가
7. 여담
- 마도-신진도 방파제가 들어서자 물길과 해저 지형이 바뀌며 뻘에 묻혔던 난파선이 2009년에 발견되었고 지금까지도 난파선에서 수집 중인 목간을 보면, 삼별초가 최소한 별초당 3개 조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시대는 강화도로 천도하던 시절이었는데도 공공에 관계되거나 사사로운 물품을 받는 등 국가 제도가 그대로 작동했으며 삼별초도 매우 정연한 군사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한국의 펑크 록 밴드인 타카피의 이름은 삼별초에서 유래했다. 三別抄 = Three Another Copy → T.A.Copy. 원래 삼별초로 지으려다가 반응이 안 좋아서 지금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한다.
- 국군, 특히 해병대에서 상무정신의 귀감으로 미화하며 제법 밀어주는 편이다.
8. 관련 문서
[1] 임연이 김준의 뒤통수를 쳐서 김준이 죽자 김준의 아들이 즉각 삼별초를 소환해 임연과 싸우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삼별초 지유(脂諭): (지휘관) 고여림은 막상 오기는 했으나 "중립을 선언했다." 외치고는 구경만 했고 결국 임연 일파가 승리할 때까지 손놓고 구경만 했다.[2] 이 고여림은 원래 탐라의 왕족인 고씨 일족인데 이 때문에 삼별초의 난 당시에 고려 조정의 명으로 제주도로 파견되어 제주도 수비를 전담했다. 그러나 막상 삼별초가 제주도에 상륙하자 수탈에 시달리던 제주도 백성은 모두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여기면서 환영했고 같은 고씨 일족조차 중립을 선언하며 구경만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자신이 지휘했던 삼별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3] 당시 삼별초 지유는 노영희로 배중손은 장군이기는 했으나 삼별초의 지휘관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지는 않았고 삼별초가 봉기하게 된 직접인 계기도 배중손이 노영희를 찾아가 봉기하자고 설득한 게 최대 이유였다. 그러나 그 후 노영희가 사실상 공기화 했는데 배중손은 사실상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것을 원나라나 고려 조정도 같이 인식했다.[4] 당시 왕족이었던 승화후 왕온은 배중손의 강압으로 삼별초 정권의 왕이 되었다가 여몽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온 매국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에게 피살당한다.[5] 여담으로 이 때 살해당한 승화후 왕온의 동생이 바로 홍다구의 아버지인 홍복원을 살해한 영녕공 왕준이었다. 왕준은 삼별초의 진압군으로 파견되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형인 승화후를 살아서 모시고 오라고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 뿐 아니라 원종 역시 자체적으로 승화후를 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6] 삼별초는 아예 왕궁을 새로 짓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의 정통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국가가 보내는 국서로 보낸 것이다.[7] 처음 발표된 것은 1938년과 1941년까지 진단학보를 통해서였다. 3부작에 걸쳐 발표된 해당 논문은 해방 직후에 재발표되었고, 삼별초라는 고려 무신정권의 군사조직이 벌인 몽골과 고려 조정에 대한 반발 행위들을 대외 항쟁으로 해석한 최초의 논문으로 평가된다.[8] 실제로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이미 호조 도키무네를 "몽골습래라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국난 앞에 저자세로 굽히는 일 없이 의연히 항쟁을 결정해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평가했고 일본 제국 시절에 황국사관의 관점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항쟁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원자폭탄을 맞고 패전한 뒤에는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몽골의 사절을 살해하여 대일 교섭을 결렬시키는 등 철저한 항전자세를 취한 도키무네의 태도는 일본의 글로벌화를 늦추고 세계화에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한 자"라는 비판도 함께 일게 된다.[9] 제주 설화에 따르면, 삼별초가 몽골군을 막으려고 환해 장성을 축조하는데 제주도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기도 하고, 세금을 거둔다고 민가 수탈을 일삼아서 나중에는 백성들이 삼별초에게 등을 돌렸고 이로 인해 삼별초의 몰락에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삼별초는 노비 문서를 불태운다든지,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삼별초 본진도 일부러 제주도 백성들이 살고 있던 중심지를 벗어난 서측 외진 곳에 마련했던 것 등 백성들과 토착 세력들을 존중하는 면모도 보였다. 진도에서도 전라도·경상도의 백성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이에 동조하였는데, 이를 봤을 때 어느 정도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삼별초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10] 宋萬戶. 고려의 장수는 아니고 몽골측 장수인데, 이름이 송만호인 것이 아니라 송씨 성을 가진 만호(튀멘)라는 뜻이다. 남송에서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1272년 진도를 함락시킬 때 참전했었다.[11] 1270년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 남해군을 점령하고 경상도 연안 공략을 맡고 있었는데, 진도가 함락되고 김통정 등이 제주로 퇴각할 때 유존혁도 함선 80척을 거느리고 여기에 합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