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성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조신성은 1873년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현 피현군 피현읍) 피현역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머니 한씨의 뱃속에 있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9살 되던 때에는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살 되던 해에 어느 남성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생활 6년 만에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결국 조신성은 22세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조신성은 평안북도 의주읍 교회에서 선교사 W.M.베어드에게 세레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과부로서 천대받고 있다가 기독교를 통해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고, 이후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살아갔다.
2.2. 교육 활동
조신성은 24세 때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다녔고, 이후엔 상동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28세 되던 때부터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했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창덕궁 방을 한칸 빌려서 이준과 함께 조선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녀는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민족운동가들과 교제했는데, 그중 가장 친밀하게 지낸 이는 바로 안창호였다.
조신성은 안창호와 교제하면서 자신이 배운 게 많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34세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녀는 일본 간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요코하마 성경여학교 고등과에 다녔다. 그러나 졸업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신경쇠약으로 인해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귀국 후에도 계속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그녀는 귀국하자마자 부산 규범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10년에 사직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했다.
평양 진면여학교는 안창호의 주도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안창호는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평양의 기생들과 기생학교 학생들을 대동강 놀이배에 태우고 애국의식을 일깨우는 연설을 몇차례 했다. 이에 감동받은 기생 중 10여 명이 학교에 입학했고 진명여학교는 점차 번창했지만,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안창호가 해외에 망명하고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던 평양부인회가 쇠퇴하면서 폐교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조신성은 이 학교에 부임한 이래 최선을 다해 학교를 다시 번창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1911년 4월부터 학생 모집에 주야로 힘쓴 결과, 진명여학교 설립 6년 만에 학생이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2.3. 독립운동
조신성은 1918년경 비밀사령을 받고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녀가 어떤 비밀사령을 받았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연계를 맺는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베이징을 다녀온 후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연계하여 맹산독립단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고, 구성원은 19명 정도였다. 1934년 <신가정> 잡지의 한 기자가 "직접 운동을 실행하시는 동안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러나 조신성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출옥 후 다시 교육운동에 매진해 평원군 한천에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1928년 1월 30일, 조신성은 박현숙, 박승일, 김선경, 김경옥, 백덕수 등과 함께 근우회 평양지회를 조직했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근우회 회관을 설립하고, 여성들에게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실업여성의 직업 확보를 위한 실행사업으로 속옷공장 설립을 기획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여성운동을 실행했다.가슴에도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중략)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가지고는 격투하거나, 오도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
1930년경 근우회 본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신성은 평양지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근우회 야학운동 활동에 힘썼고, 자신이 예전부터 운영하던 취명학교도 동시에 운영했다. 또한 1932년 6월 25일에는 무산 아동을 위한 조선교육학교(朝鮮敎育學校)를 설립했으며, 동년 9월 10여 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평양여자소비조합조직 준비회(平壤女子消費組合組織準備會)를 개최하여 여성 경제기관의 설립에 힘을 쏟았다.
2.4. 해방 후 경력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들어왔다. 김일성을 위시로 한 북한 정권은 그녀의 명성을 높이 사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에 임명해 공산주의 운동에 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조신성은 공산주의자들이 무산계급 독재를 외치며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는 것에 혐오를 느끼고 1948년에 월남해 대한부인회 총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다가 부산의 신망애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0세.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로 활동했던 최은희는 1956년 월간지 <여성계>에 '애국여성 조신성 할머니'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그녀는 조신성에 대해 "한평생 애국운동에 몸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동족을 위하여 가시덤불을 헤쳤고 엉겅퀴에 피를 흘린 이름 그대로 미쁘고 갸륵한 여성이다."라고 평가했다. 오기영도 조신성을 여걸로 평가했다.
그러나 조신성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완전히 잊혀졌고, 그녀의 유해가 어느 곳에 묻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 11월 30일, 조신성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조신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치은 여사의 딸 곽선부씨와 그 가족들이 5년간 부산 근교를 조사한 끝에 부산시 초읍동 원당골 공동묘지의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후 그녀의 유해는 1991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조신성이라면 우리는 얼른 근우회 말엽시대의 중앙집행위원장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양 사람에게 그를 물으면 그의 과거에서 평양 진명여학교의 교장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또한 평남 오지, 덕천, 영원, 맹산 등지에 가서 조신성을 물으면 기미운동 당시 직접 운동에 투신했던 그 때의 희귀한 '히사시까미'한 나이먹은 신여성을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