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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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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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의 여성 록 아이콘.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 기록과 골드, 플레티넘 앨범을 가지고 있으며 정통 록 장르로서 성공한 '''여성 로커'''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5][6]"남이 당신의 한계를 멋대로 정하도록 놔두지 마라. 당신만의 승리를 만들어라. 당신만의 실수도 만들어라." [4]
2. 개요
1975년 미국 10대 여성 멤버들로 이루어진 록밴드 더 러너웨이스(The Runaways)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데뷔하였다.[7] 밴드는 유럽, 캐나다, 남미 등지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8] 1979년, 해체 뒤 조안 제트는 솔로 활동을 준비하고, 밴드의 필요성을 느낀 조안은 1980년에 조안 제트 앤 더 블랙하츠(Joan Jett and the Blackhearts)를 결성한 뒤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다. 당시 싱글들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연이어 랭크되는 등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음반 활동은 뜸해졌으나 타 밴드들[9] 의 투어 오프닝을 서는 등 꾸준하게 공연 활동을 해나갔다. 2010년에는 밴드와 동명의 전기 영화 <The Runaways>가 개봉하며, 영화 내의 동성애 코드로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10] 2015년에는 Joan Jett and the Blackhearts의 이름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Joan Jett and the Blackhearts의 대표곡이자 빌보드 Hot 100 7주 연속 1위를 차지한 대표 트랙 I Love Rock'n Roll. 1975년 더 애로우즈가 발표한 곡을 82년 리메이크한 곡이다.
솔로 데뷔앨범 Bad Reputation의 셀프 타이틀곡. WWE에 론다 로우지가 레슬러로 활동했을때 테마로 알려져 있다.
I Hate Myself for Loving You. 88년 발표된 곡으로 이 곡 못지 않게, 이 곡을 개사한 Waiting All Day For Sunday Night는 미국 NBC의 대표 프로그램이자 NFL을 대표하는 방송인 선데이 나잇 풋볼의 오프닝 테마로 전 미국인이 알고 있는 트랙이다.
3. 생애
조안 제트는 1958년 미국의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보험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와 비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비교적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1967년, 조안의 가족은 메릴랜드로 이사하고, 조안은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된다. 조안은 13살에 처음으로 기타를 연주하게 되는데, 당시 기타를 잡은 초반에는 레슨을 받다가 이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유는 강사가 조안에게 계속해서 포크송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게 싫었기 때문이라고. 기타를 계기로 조안은 뮤지션의 꿈을 꾸게 된다.[11] 이후 1970년대에 들어 조안의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이때 조안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였으며, 조안은 현재의 이름인 조안 "제트"로 이름을 개명한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생활하던 조안은 밤에 클럽을 다니곤 했는데 당시 다니던 클럽들의 영향으로 글램 록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조안 제트는 더 러너웨이스를 결성하게 되는데, 당시 초창기 멤버로는 드러머였던 샌디 웨스트가 있었다. 이후 리키 스틸, 재키 폭스, 리타 포드, 체리 커리가 합류하며 밴드가 완성된다. 글램 록, 펑크 록을 위시한 더 러너웨이스로서의 활동은 해당 문서 참조.
1979년 밴드가 해체한 뒤 조안은 영국으로 떠난다. 솔로 활동을 위한 녹음을 진행하는데, 섹스 피스톨즈의 폴 쿡과 스티브 존스와 함께 3곡을 녹음한다. 이 중 한 곡이 후에 대히트를 치게 되는 <I Love Rock 'N' Roll>의 초창기 버전이다. 1975년 조안이 러너웨이스로 활동을 하던 무렵, 해당 곡의 원곡자인 Arrows의 공연을 보았고, 당시 곡을 처음 들어보았다고 한다. 당시 녹음 버전은 1993년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Flashback>에 실려있다.
같은 해 말, 조안은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러너웨이스의 커리어를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 <We're All Crazee Now!>의 작업을 돕는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하기 위해 조안은 당시 트랙 작업을 도울 작곡가 겸 프로듀서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조안과 이후 평생의 작업 파트너이자 동료가 되는 Kenny Laguna이다. 조안은 케니와 친해지며 거주지도 로스엔젤레스에서 케니가 살고 있던 뉴욕의 롱비치로 옮긴다. 정작 영화는 진행이 반쯤 되었음에도 조안의 건강 상의 이유로 촬영이 중단되었고, 당시 영화에 삽입되었던 조안의 모습들은 이후 조안이 더욱 유명해진 뒤에야 요긴하게(?) 쓰였던 모양.
1980년, 조안은 케니와 의기투합하여 유럽에서 솔로 앨범 <Joan Jett>를 발매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앨범을 발매하려고 보니 무려 23사의 메이저 레이블에서 앨범 발매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독립 레코드사 "The Blackhearts"를 설립하여 미국에서의 앨범 발매도 어찌저찌 해결한다. 당시 케니의 딸의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을 조안의 앨범 발매를 위해 레코드사 설립에 몽땅 써버렸다고 한다. 둘의 우정이 얼마나 끈끈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 인터뷰에 의하면 케니는 당시 레코드를 직접 발매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12]
조안은 밴드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밴드 멤버들을 모은다. 처음에는 케니가 조안의 밴드 결성에 반대하였는데, 이유는 레이블의 예산이나 규모나 밴드원들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조안은 "The Blackhearts"라는 회사의 이름을 따 밴드를 구축하였으며, 당시 조안이 직접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어 이를 보고 찾아온 남성들의 오디션을 진행한다. 이 중 블랙하츠의 베이시스트가 되는 개리 라이언은 당시 고작 15살이었으며, 조안이 더 러너웨이스로 활동하던 시절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조안은 그가 오디션장에 들어왔을 때 바로 알아보았다고. 결과적으로 그는 오디션에 합격하였다.[13]
이렇게 꾸려진 밴드는 유럽 투어를 시작한다. 투어 말미에는 케니가 기존의 드러머를 해고한 뒤 오디션을 열어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한다. 미국에서 마저 투어를 진행하던 때에는 회사가 재정난에 시달려, 케니는 외부 프로젝트까지 뛰는 등 밴드의 존속을 위한 자금 마련에 힘을 썼다. 회사 내부 사정이 나아지는 데 조안 역시 도움을 아끼지 않으며,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케니의 캐딜락 트렁크에 담긴 레코드판을 그 자리에서 파는 등 여러가지로 다같이 힘든 시기를 보낸 듯. 결국 회사를 운영하기 어려워진 케니는 오랜 친구였던 닐 보거트의 레코드로 들어가 새로운 레이블을 설립하고, 기존의 <Joan Jett> 앨범을 <Bad Reputation>으로 타이틀을 바꾸어 재발매한다.
서서히 사정이 좋아지던 밴드는 1981년, 뉴욕의 팔라디움 콘서트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이때의 퍼포먼스로 뉴욕의 팬층을 모을 수 있었다. 그 해에 조안은 앨범 <I Love Rock 'N' Roll>을 녹음, 1982년에 동명의 싱글을 함께 발매하며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를 7주 간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밴드는 여러 공연과 TV출연을 활발히 하며, 이어서 <I Hate Myself for Loving You> 등의 싱글들이 히트를 치면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4. 디스코그라피
5. 여담
- 무성한 레즈비언, 양성애자 루머들이 현재까지 꾸준히 있으나, 조안 제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성 지향성에 대해 명확히 언급한 적이 없다. 인터뷰에서 루머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싶기 때문이라고.
- 911 테러 직후 중동 지역에 위문 공연을 간 적이 있는데, 당시 조안 제트가 탄 비행기를 향해 탈레반이 로켓을 발사하였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는 갑작스럽게 "경고. 미사일 발사!" 하는 기계음이 나왔다고.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착륙했다고 한다. [14]
- 2020년 11월 인터뷰에 따르면, 키가 콤플렉스라고 한다. 젊었을 적엔 166cm(5피트 5.5인치)쯤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키가 줄어 현재는 161cm(5피트 3.5인치)정도라며 너무 작다고 하였다.
[1] "Jett" 라는 성은 10대 시절 스스로 개명하여 얻은 것이다. 본명은 Joan Marie Larkin으로, 부모님의 이혼 후 조금 더 로큰롤 가수스러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때 "Jett"는 어머니가 결혼 전 가졌던 성이라고 밝히기도 하였으나, 후에 사실이 아니었다고 번복하였다.[2] 간혹 1960년생으로 표기된 정보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3] 사실상 솔로 활동이다.[4] "Don't let anyone tell you can't do something. Make your own victories. Make your own mistakes." 조안 제트의 유명한 인용구이다.[5] 남성 중심의 정통 록 장르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이끌어낸 여성의 사례는 손에 꼽는다. 선대의 재니스 조플린, 수지 콰트로 등이 있지만, 1980년대 이후 대중음악 시장에서 록의 점유율이 서서히 떨어지던 시점에 성공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두 사람 못지 않게 대단한 커리어라고 볼 수 있다. [6] 같은 그룹이었던 리타 포드 역시 해체 뒤, 1980년대에 여성 로커로서 활약하였으나 조안 제트만큼의 커리어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대표곡으로는 <Kiss Me Deadly>, <Shot of Poison> 등이 있으며, 글램메탈 성향이 짙다.[7] 당시 보컬도 종종 맡았으나 기본적으로 프론트맨이자 리드 보컬은 체리 커리(Cherie Currie)였다.[8] 본국인 미국에서는 해외에서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다.[9] 데프 레파드, 그린데이, 에어로스미스 등. [10] 참고로 당시 조안 제트 역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맡았다. 조안 본인도 만족한 캐스팅이었던 듯.[11] 부모님이 조안에게 음악을 처음 접하도록 해주었고, 또 음악 쪽으로 커리어를 쌓는 것을 장려해주었기 때문에 환갑이 넘은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한다.[12] (원문) "We couldn't think of anything else to do but print up records ourselves."[13] 엄청난 성덕인 셈이다! 다만 그는 이미 로스엔젤레스의 펑크 씬에서 어느 정도 활동 중인 프로였고, 그에 걸맞게 실력 역시 탄탄한 편이었다.[14] (원문) Q: What is the closest you’ve come to death? / A: Right after 9/11, Kenny and I went to perform for the troops in Pakistan and Uzbekistan. As we were flying in, an electronic voice went off: “Warning: missile launch! Warning: missile launch!” The Taliban had fired a rocket at us. I was waiting to see the back of the plane blow up, but it didn’t and we la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