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니스 조플린
1. 개요
미국의 여성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싱어송라이터이다. '''1960년대 말 히피 문화를 대표한 인물들 중 하나'''로써, 빅 브라더 앤드 홀딩 컴퍼니에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거침없는 음악 스타일과 '여가수'라는 관습적 제약에서 벗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앨범 《치프 스릴스》 등이 유명하다.'''이런 표현이 뭐하지만... 재니스 조플린이야말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떠났다는 말이 가장 맞는 가수인 거 같습니다.'''
- 배철수
27세에 요절하였기에 27세에 요절한 음악인 클럽인 27세 클럽의 멤버 중 한 명이며, 동 나이인 27세에 사망한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의 보컬인 짐 모리슨과 더불어서 '3J'라고 불린다.[2]
2. 상세
그녀는 1943년 1월 19일에 미국 텍사스주 포트아서 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세스 워드 조플린의 딸로 태어났다. 그렇게 뛰어난 외모를 지니지 않은 탓에 어렸을 때부터 많은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3] 이러한 성장과정은 그녀를 사람의 애정에 굶주리게 만들었으며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다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는 친구로부터 블루스와 포크음악을 알게 되었고, 가수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텍사스, 보몬트에 위치한 라마 대학교를 입학하고 후에 텍사스 대학교에 편입을 하지만 2년 후 1962년 학교를 떠나 당시 사이키델릭 록의 중심이었던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사이키델릭 록 밴드 "Big Brothers & The Holding Company"의 메인 보컬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재니스 조플린의 데뷔 이전까지 비비 킹이나 머디 워터스 등 흑인 블루스의 대가들은 백인은 완벽한 블루스를 할 수 없을 것이다고 믿었으나, 그녀가 데뷔한 후 백인 블루스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가 당대에는 비교할만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백인 여성 블루스 싱어였던 것이다. 1967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의 최고 스타는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한을 토해내듯 무대에서 신들린 듯 노래를 불렀으며 그것은 마치 이제 새로운 여성 락커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는 듯한 포효와도 같았다.[4]
1968년까지 Big Brothers&The Holding Company 활동을 하던 그녀는 1969년 새로운 백 밴드인 Kozmic Blues Band를 구성하여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1969년에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더 후 등과 함께 공연한다. 특히 같은 시간대에 공연을 했던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는 이후 그녀의 공연이 엄청났다는 후일담을 남기기도 하였다. 1970년 8월 12일, 그녀는 보스턴 소재 하버드 대학교 스타디움에서 열린 단독 공연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가졌다.
솔로 앨범 작업을 하며 공연을 다니던 그녀는 1970년 10월 4일, 공연에 나타나지 않은 그녀를 찾아온 프로듀서와 매니저에게 헐리우드의 한 호텔방 바닥에 쓰러져 사망한 채 발견된다. 이후 공식 발표에서는 헤로인 과다 투여로 사망한 것으로 나왔으나, 원래 사용하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투여한 것을 보고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전술한 것 처럼 그녀는 성장과정에서 많은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택한 것이 음악과(특히 블루스) 더불어 무절제한 사생활로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술, 마약 등에 취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주변의 질타 및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생활을 그녀는 "못난 나에게 향락이야 말로 가장 걸맞는 행위."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죽기 몇 개월 전에는 세스 모건이라는 대학생과 결혼도 앞두고 있었고 새 앨범 <Pearl>의 발매도 눈앞에 두고 있는 등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플린의 장례식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치뤄졌고 그녀의 시신은 화장후 캘리포니아 해변에 뿌려졌다.
그녀의 사후 1971년 1월 11일, 재니스 조플린의 유일한 솔로 앨범이자 시대의 명반으로 꼽히는 ''Pearl''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발매 후 미국 내에서만 400만장이 넘게 팔리며 4x플래티넘을 기록하였으며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앨범의 녹음 세션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재니스 조플린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Buried Alive in the Blues"라는 곡은 보컬 없이 연주곡으로 실려있다.
3. 디스코그래피
-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 (1967)
- Cheap Thrills (1968)
- I Got Dem Ol' Kozmic Blues Again Mama! (1969)
- Pearl (1971)
4. 대표곡
1971년 빌보드 HOT100 1위.[5][6]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 148위.
그녀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Monterey Rock Festival에서 부른 Ball and Chain.
5. 기타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물론 세계 3대 어쩌구를 좋아하는 일본에서 만든 말이다. 예를 들면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던지...[3] 학교에서 가장 못 생긴 '''남자'''(...)로 뽑혔을 정도였다- 교실에서 상당히 미움을 받았다는 걸 알수 있는데, 사실 이 원인은 외모보다는 제니스 조플린의 진보적 성향에 기인했다고 한다. 보수적 분위기가 강한 텍사스에서 진보적 성향을 보여 집단 따돌림 당한 것이다.[4] 실제로 재니스 조플린 이후의 여성 락커들은 예외없이 그녀와 비교될 운명이었음을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보컬인 그레이스 슬릭이 고백하곤 했다.[5] 컨트리 장르다, 자기 장르가 아닌 장르가 최고 대표곡이 된 셈이다.[6] 이 노래는 가수 겸 영화배우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작곡한 곡으로 컨트리 가수인 로저 밀러(Roger Miller)가 1969년에 처음 불렀다. 다만 히트한 버전은 재니스의 버전이기에 커버곡이 원곡보다 유명해진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