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전한)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29위 감천후(甘泉侯) (왕)경'''

'''107위 수창후(須昌侯) 조연'''

'''108위 장수후(長脩侯) 두염'''
1. 개요
2. 행적
3. 총평


1. 개요


'''생몰년도'''
? ~ 기원전 164년
'''이름'''
조연(趙衍)
'''작위'''
수창후(須昌侯)
초한쟁패기유방의 휘하 장수.

2. 행적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알자(謁者)[1] 신분으로 한중에서 처음으로 유방을 따랐다.
유방항우의 분봉 조치에 따라서 한왕이 된 후 한신의 계책을 따라 관중으로 동진을 시작하는데 첫 상대는 옹왕 장한이었다.
유방은 처음 한중으로 입성할 때 장량의 조언대로 잔도를 불태워서 항우로 부터의 의심을 덜었는데 아직 잔도는 수리 전인게 문제.
암도진창의 고사를 보면 나오지만 옹나라로 향하는 길이 불태운 잔도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유방이 이끄는 한군이 고도를 따라서 장한이 머무르는 진창을 공격해서 승리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잔도 외의 진창으로 향하는 길을 조연이 알려줘서 한군 본대의 기동을 성공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한군은 유방이 이끄는 본대 뿐만 아니라 조참, 번쾌가 별동대가 각각 하변(下辨)[2] 과 서현(西县)[3] 부근[4]을 공격하는 등 옹나라에 대한 길을 어느정도 아는 상태였다. 다만 제일 주요한 거점이자 장한이 지키는 진창과 폐구로 향하는 길을 조연이 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연 본인도 한중 출신으로 보이는만큼 지리에는 익숙했을 것이다.
나중에 조연은 하간수[5]가 되었고, 진희의 반란 진압에 종군하여 진희의 도위 상여(相如)를 죽였다.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수창후(須昌侯)에 봉해져 식읍 1,400호를 받았다.
문제 16년(기원전 164년)에 죽어 시호를 정(貞)이라 하였고, 아들 조복이 작위를 이었다.

3. 총평


암도진창한신의 일화로 알려져서 묻혔지만 한나라의 초반 공세에 큰 기여를 했다. 유방이 신속한 기동으로 관중의 삼진을 무찌르는데 필요한 기동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시무보다 1년 먼저 사망해서 공신들 중 3번째로 오래 살았다.
[1] 고대 중국에서 황제에 대한 상소문을 관리하여 출납하는 자리[2] 현재 감숙성 룽난(陇南) 시 청현(成县)[3] 감숙성 룽난(陇南) 시 리현(礼县)[4] 번쾌는 서현의 승(丞)을 위수의 지류인 백수(白水)에서 무찔렀다.[5] 하간(河間)의 태수. 하간은 현재의 창저우와 헝수이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