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쾌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4위 강후(絳侯) 주발'''

'''5위 무양후(舞陽侯) 번쾌'''

'''6위 곡주후(曲周侯) 역상'''


[image]
'''생몰년도'''
? ~ 기원전 189년
'''이름'''
번쾌(樊噲)
'''작위'''
무양후(舞陽侯)
'''시호'''
무후(武侯)
'''고향'''
패군(沛郡)
[image]
1. 개요
2. 행적
2.1. 거병 이전
2.2. 반진 전쟁
2.4. 전쟁 이후
3. 성격
4. 업적
5.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
6. 기타 이야깃거리
7. 기타 매체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군인. 유방(劉邦)의 최측근 무장으로 함께 하며 전한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2. 행적



2.1. 거병 이전


출신은 개 잡던 백정이었고 유방의 친구였다고 전해지는데, 관상을 볼 줄 아는 여문이 그의 장래를 알아보고 그의 둘째 딸인 여수를 아내로 주었기에 여문의 첫째 딸인 여치(여후)와 결혼한 유방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삼국지연의장비와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천한 출신과 산적 두목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번쾌는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바르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우했다고 한다. 백정 시절부터도 사람들을 잘 대우하여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도 옛 인연으로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장비가 군자에게는 잘 대했지만 범인들에겐 가혹하게 대했고, 관우가 사대부와 윗사람을 업신여겨 결국 사망으로 이어진 것하고는 정반대. 다만 이런 점 때문에 유방이 그를 견제했을 수도 있다.[1]

2.2. 반진 전쟁


유방이 거병하자 유방을 따라 패를 함락한 후, 유방이 패공이 되자 사인이 되었고, 사마이를 탕현 동쪽에서 물리치고 국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그후 유방이 복양현에서 장한의 군사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적군 23명을 죽여 열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또 성양현을 칠 때도 제일 먼저 성 위로 올라가 호유향을 함락시키고 삼천군수 이유를 무찔러 상간작을 받았고 동군수 등이 지키는 성무를 격파해 오대부가 되었다. 또한 개봉에서 조분의 군대를 격파하고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경작을 받았다. 완릉 공격에서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후에 봉해지고 현성군의 봉호를 받았다. 장사와 환원을 공격하고 남양수 의가 지키는 양성을 공격하고 완성에서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이 공적들로 봉읍이 더 늘어났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함양을 점령한 후 궁궐에 들어가 놀려하자 장량과 함께 유방을 막고 약탈을 금하게 하도록 했다. 그 후 유방이 함곡관을 닫아 항우를 분노케 해 벌어진 홍문연에서 범증이 유방을 암살하려 하자 영채로 들어가 유방을 구했다. 홍문연 참고.

이후 항우가 유방을 한왕에 봉하자 열후가 되어 임무후의 호를 받고 낭중이 되었다.

2.3. 초한전쟁


유방이 삼진으로 진격할 때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서현승을 공격했으며 장한의 경기병과 경전차를 무찔렀다. 또한 옹, 태를 무찌르고 장평이 있는 호치를 격파했으며 가장 먼저 적진에 올랐다. 이후에도 조분, 하미, 괴리, 유중, 함양을 쳤고, 폐구 수공에서는 그 공이 으뜸이었다 하여 식읍으로 두릉현과 번향을 받았다. 외황에서 왕무와 정처를 격파하고 노, 하구, 설 등을 함락했다.
그러나 팽성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번쾌의 점령지는 모두 항우가 수복해버렸다. 이후 형양으로 돌아와 식읍으로 평음의 2천 호를 더 받았고 광무를 수비하다가 한왕 5년(기원전 202년) 광무대치 이후, 유방이 항우를 추격할 때 양하현을 함락시켜 초나라 병사 4천 명을 사로잡았고 진현에서 항우를 포위해 격파하고 호릉을 몰살하였다.

2.4. 전쟁 이후


항우가 죽고 유방이 황제가 되자 번쾌는 성을 든든하게 지키고 싸울 때마다 공을 세웠으므로 식읍 800호를 더 받았다.
7월,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반란을 평정했으며 초왕 한신이 반란을 모의하자 다시 유방을 따라 한신을 사로잡고 초를 평정했다. 그 공로로 또다시 열후에 봉해졌으며 무양을 식읍으로 받고 앞서 받은 식읍은 해제하였다. 이후에도 유방을 따라 종군하며 한왕 신이 모반하자 주발과 함께 관인에서 운중까지 평정하여 식읍 1500호를 더 받았으며 진희를 치고, 만구신의 군대를 백인현에서 격파할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청하에서 상산에 이르는 27현을 항복시켜 이 공으로 승상의 자리를 받았다. 계속해서 진희의 부대장 왕항을 대 남쪽에서 무찔렀고 이어 삼합현에서 한왕 신을 공격하여 부하가 신을 죽였으며, 대나라 장군 조기를 베고 승상 풍량 등 10여명을 포로로 잡고 대의 향읍 73개를 평정하였다.
그 뒤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중상을 입은 유방을 대신해 진압군을 지휘하여 노관의 승상 저를 계남에서 격파하고 18현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식읍 1300호를 더 받았으므로 번쾌의 식읍은 모두 5400호에 이르게 되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지병이 악화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여 환관의 시중만을 받을 뿐 어떤 신하도 자신이 기거하는 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10일이 지나도 중신들이 유방을 만나지 못하자, 번쾌가 궁문을 밀치고 궁안으로 뛰어들어갔고 대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번쾌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략)폐하께서는 우리들은 하찮은 신하들이라고 여겨 접견을 허락하여 국사를 의논하지 않으시고, 단지 환관 한 사람만을 곁에 두어 우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옛날 조고(趙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2]

그러자 유방은 웃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정사를 돌보았다고 한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적군 176명의 목을 베고 288명을 사로잡았으며 군대 일곱을 깨뜨리고 성 다섯 개를 함락시켰으며, 군 6개와 현 52개를 평정하고 승상 1명, 장군 12병을 사로잡았다.
혜제 6년 사망하여, 시호를 무후라 하였다.

3. 성격


성품은 과묵하면서도 타인에게 의지가 되며, 거칠어보이는 외면과는 달리 믿음직하고 예와 의리를 중시하는 협객 기질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미천한 출신과는 다르게 언변에서도 설득력이 있어서 향락에 빠진 유방이나 홍문연에서의 항우가 반박하지 못했다. 후대의 사가들은 그를 평가할 때 백정에게서 선비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칭찬하였다.
더불어 가정적으로 자상한 남편이기도 하였는데, 유방의 바람기 때문에 나중에는 원수지간이었던 유방과 여후와는 달리 번쾌와 여수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여수는 나중에 번쾌를 압송한 진평을 증오하여 그를 죽이고자 헛소문을 퍼뜨릴 정도였다.[3]
식견과 무예 양쪽에서 출중했던 초반의 모습에 비해서 통일 이후엔 한신에게 과장스럽게 굽신거리는 태도를 취한다던지, 반란한 노관을 잡아오라고 보냈더니 그대로 놓아주거나 여수가 억하심정으로 진평을 핍박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흉노를 토벌하겠다며 조정을 선동하는 등 태도가 곧다기보단 그냥 공사구분을 못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이기도 한다. [4]

4. 업적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홍문연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유방을 구해낸 것이 있다. 연회장에 난입한 번쾌의 모습에 천하의 항우가 지릴 정도였다니 나름 취급이 괜찮은 듯. 사내다운 녀석이라 생각한 항우가 술을 주자 사발로 마셨고 돼지고기 안주는 방패를 접시삼아 칼로 썰어먹었다고 전해진다.[5] 이를 보고 항우는 연신 "참으로 장사로다!"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남자답고 용맹한 사람을 좋아한 항우의 성품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부 판본에서는 패공(유방)은 재물에 손도 안대고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왜 해하려 하냐며 일갈해서 홍문연의 살벌한 분위기를 단숨에 진정시켰다는 내용도 나온다. 유방이 화장실 핑계로 밖으로 번쾌와 함께 빠져나오자 번쾌는 어서 도망가자고 권하나 유방은 망설이며 작별 인사도 안 남기면 항우가 불쾌하게 여길 거라고 하자 '항우의 진영은 칼과 도마고, 우린 생선인데 그런 말이 나옵니까?'라 한소리 하고 더 늦기 전에 도망치자고 다시 권한다.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한 유방은 장량에게 자기는 술에 취해서 더 이상은 연회에 있기 힘들어 먼저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전해달라고 한 후 항우와 범증에게 주려던 선물도 대신 주라고 맡기고 얼른 빠져나가 살아났다.
행정적인 능력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정치적 식견은 나름대로 지녔는데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이 쾌락(?)에 빠지자 강경하게 경고해[6] 유방이 한 수 접을 정도로 막역하고 신뢰하던 사이였다. 무장으로서도 뛰어나 훗날 한이 세워지고 난 후, 왕항과 조리[7]가 흉노를 등에 업고 공격해 왔을 때 빼앗긴 땅을 회복한 것은 다름아닌 번쾌였다.
천하통일 후 유방이 즉위한 뒤 좌승상, 상국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의심에 사로잡혀 편집증과 광기에 젖은 유방에 의해 숙청의 위기를 맞아 죽을 뻔하지만, 진평이 훗날을 염려해 손을 쓴 덕택에[8] 목숨을 건지고 반역혐의도 벗겨져서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의심을 받은 까닭은 특이하게도 고제와 동서간이기 때문. 고제는 말년에 첩의 자식인 유여의 때문에 아내 여후와 사이가 나빠졌는데 번쾌는 아내 여수와 사이가 좋았다. 그러던 차에 누가 고제에게 번쾌가 여수의 언니인 여후 편을 들어 유여의를 죽일 거라고 모함한 것에 고제가 홀딱 넘어가버렸다.[9] 여수는 이 일로 진평을 집요하게 괴롭혔다가 여태후가 죽은 뒤 진평과 주발이 들고 일어날 당시 분노한 폭도들에 의해 맞아 죽는다.
번쾌와 여수 사이에는 번항(樊伉)이라는 자식이 있었는데, 여후 시절에 권세를 누리다가 여씨 몰살 때 죽었다. 이렇게 번쾌의 대가 끊기는가 싶었지만 번씨 가문은 번쾌의 공적으로 복권되어 서자 번불인(樊市人)이 열후로 대를 이었다. 그러나 번불인의 아들 번타광(樊他廣)이 열후가 된 후 번타광이 사실 번불인의 아들이 아님이 밝혀지자[10] 경제가 작위를 몰수하여 번타광은 서인이 되었다. 야인이 된 번타광은 후일 사마천이 역사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하러 오자 자기 조상을 디스하였고 아래의 사마천의 인물평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5.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


흉노선우묵돌이 여후에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자[11] 자신에게 10만 군사를 주면 다 박살내고 오겠다고 얘기했지만 계포[12]가 "선제께서도 40만에 명장들을 데리고 갔다가 깨졌는데 '''번쾌 따위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라는 식으로 깠다(...)는 일화가 있다.[13]
한신이 회음후로 강등된 후 분을 삭이며 지낼 때 한번은 번쾌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번쾌는 깍듯하게 한신을 존중하고 배려했으나 한신은 번쾌의 집을 나오면서 "내가 '''번쾌 따위와''' 동급이 되다니"라고 한탄했다. 개국공신을 무시한 한신이 괘씸하게 여겨질 법도 하지만, 사실 한신과 번쾌 사이에는 포지션의 격차가 있었다. 한신은 전군 총사령관에서 시작해 아예 북부전역을 온전히 담당한 방면군 사령관으로 공을 세우고 위에 앉았고, 번쾌는 유방 직속의 최전방 지휘관에서 시작해 제후의 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한신의 한탄은 자신의 입지가 그만큼 낮아졌음을 분하게 여기는 것이다. 한편 다른 해석도 있는데, 회음후로 강등당했을 때 신하들이 입을 모아 한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 때문에 한신이 삐딱(...)해졌을 수도 있다.
계포한신의 일화 외엔 네임드가 번쾌를 평가한 것이 없어서 당대의 취급이 참으로 별로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계포의 일화는 조정 내에 모험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고[14], 한신의 일화는 왕에서 후로 격하된 한신이 자격지심으로 외친 것이니, 그것이 진정 당대에 번쾌의 평이 그닥 좋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한신은 여기서 번쾌뿐 아니라 관영과 주발도 함께 깠다. 그런데 여기서 한신이 깠던 이들은 비록 한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신중엔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공을 세웠던 사람들이고 거기다 고제와의 관계는 낙하산인 한신보다 훨씬 가까웠던 만큼 디스를 할 게 아니라 이 사람들과 친해져서 도움을 받았어야 했는데 이딴 소리나 하는 걸 보면 정말로 한신은 처세술이 빵점에 가까웠다. 특히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의 남편이고 군공도 높은데다 위아래로 인망이 있는 여씨일파의 핵심인사다. 재기를 노린다면 어떻게든 친해져야 할 인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물인데도 저런 태도이니 여후에게 찍혀 죽을만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번쾌의 열전은 역상, 하후영, 관영과 함께 <번역등관열전>[15]에 실려있는데, 사마천은 번역등관열전의 말미에 "내가 풍패에 가서 이 사람들 자료수집을 해 보니까 참 재밌던 게 모두 칼부림하거나 개장수였거나 비단을 팔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양반들은 자신이 우리 고조를 만나 한 제국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을까?"라는 소감을 덧붙이고 있다.[16] 또 재미있게도 사마천은 이 사론에서 번쾌나 하후영 등이 유방에게 붙은 것을 "'''파리떼가 준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이'''[17] 고조를 만나게 되어"라고 표현하였다. 사마천의 센스가 느껴지는 대목.

6. 기타 이야깃거리


이런 인물이 일개 개백정으로 살던 패현이라는 동네는 도대체 무엇인가 싶다.
조조는 자신의 부하인 허저를 이 사람에 비유하며 '나의 번쾌'라고 칭해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번쾌는 한고제의 심복이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 한고제를 조조 자신에 빗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동맹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유방에, 혼다 타다카츠를 번쾌에 비유했다.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혼다 타다카츠도쿠가와 사천왕의 필두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전국시대의 여포 같은 위치로 각종 매체에서 그려지고 있다.

7. 기타 매체


한나라 이야기에서는 비중이 크게 줄었다. 뭐 중요한 부분에서 나오긴 하지만...진평이 그를 압송하려고 할 때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이후 여후가 진평을 용서할 때 번쾌는 "기분이 나쁘긴 해도 뭐... 날 막 대하지 않았으니까...." 이러면서도 뭔가 아리송한 반응을 보인다.
고우영의 초한지에서도 현대로 치면 사채업자 두목마냥 어린애는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릴 정도의 험상궂은 거한으로 나오며, 위의 홍문연에서 난입했을 때 파티 장식용으로 탁자에 놓여 있던 커다란 돼지 뒷다리를 한 손으로 잡고 으적으적 씹어먹는 게 항우의 마음에 들어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고 주군의 위기를 구해낸다. 그리고 유방을 모시고 피신하는데, 이 와중에 과음을 한 상태로 뜀박질을 하다보니 숙취로 인사불성이 되는 개그장면도 나온다. 십팔사략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데, 유방의 호위를 위해 잔치에 들어오자 왠 거한의 난입에 항우가 놀라며, 술을 권하자 사발로 들이키며 안주로 준 돼지고기를 방패에 얹고 장검으로 썰어먹었다고 묘사된다. 이후 유방의 한군에서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팽성 전투에서는 무려 항우와 영혼의 일기토를 벌이기도 한다.[18]번쾌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해하 전투인데, 항우를 포위할 때 산 위에서 큰 깃발과 등불을 이용해 항우의 위치를 알리고 한군을 지휘하는 역을 맡는다. 이좌거가 '왜 번쾌와 같은 최고의 선봉장감에게 산 위에서 교통 정리나 시키는 걸까?'라고 의아해하는 장면으로 여운을 남긴다.
고우영의 다른 작품인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도 초한전쟁 편에서 잠깐 등장한다. 초한지에선 고슴도치 수염인데 반해 여기에선 매끈하게 면도를 하고 얼굴 살이 빠진 모습이어서 초한지의 모습보다 진중하고 우직한 면모가 더 강하다.
적룡왕에서의 이미지도 비슷하다. 충직하고 용맹한 유방의 심복이며 어벙해 보이는 얼굴이 포인트. 유방이 패현을 점거하기 직전 다른 도적떼와 패현 성문 앞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혼자서 적진으로 닥돌하여 적들을 무인지경으로 베어 인간흉기의 일면을 보인다. 이 때 적을 벨 때마다 카운트를 하다가 열 명째 벤 후에 '''"헤헤, 이 다음부터는 셀 줄 모르니까 알아서 해~"'''라며 계속 적을 도륙하는 장면이 백미. 홍문연에서의 난입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예 유방을 베려 한 항장을 몸으로 눌러서 제압해 버린다.
문정후의 '영웅 초한지'에서는 수염이 덥수룩한 거한으로 등장. 다소 개그스러우면서도 진지할 땐 간지폭풍인 맹장으로 나온다. 극중 넘사벽인 항우를 상대로 그나마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장수로, 특히 팽성대전에서 유방을 노리고 내려쳐진 항우의 초천검을 막아내며 대치하는 장면이 백미.
일본TV 삼국지의 비디오 더빙판에서는 조운이 자신의 이름을 번쾌라고 소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그 이후의 장면에서는 제대로 조자룡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인 '초한지 천하대전'에서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젊은이[19]로 나온다. 여기서 장량과 범증이 둘이 바둑을 두는 장면이 있는데 서로 유리한 흑돌을 가지겠다고 신경전이 오가자 번쾌가 자기 손가락이 몇 개인지 맞추는 쪽이 흑을 두게 하자고 한다. 항우는 당연히 10개라고 하고 번쾌는 자기 손을 보더니 다짜고짜 새끼손가락을 물어 뜯어내서 9개로 만들어(...) 장량에게 흑돌을 쥐어준다. 이렇게 충직한 번쾌도 천하통일 후 유방이 벌이는 숙청질을 보고 마음의 상처를 입어 눈물을 흘리다 자살한다.(....)
초한전기에서는 위의 장비와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했는지 신삼국에서 장비를 연기한 캉카이 씨가 번쾌를 연기하였다. 신삼국의 장비처럼 봉두난발에 턱수염도 그대로다. 여문이 둘째 딸인 여수를 유방에게 여치를 시집보내듯이 보낸 것이 아니라, 원래 노관에게 시집가지로 한 여수가 번쾌랑 눈이 맞아서 번쾌가 여수를 NTR한다(...). 부역을 가던 일행들을 이끌고 망탕산에 도주할 무렵엔 일행 중 하나였던 조무상이 영양실조로 죽어가자 이를 살리기 위해 유방의 개 '호랑이'를 잡았는데, 정작 그 조무상이 홍문연 때 배신을 하자 분노해서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났다. 백정이란 컨셉이 있어선지 한동안 '''백정시절 쓰던 칼'''로 전선을 누빈 말 그대로 '''인간백정'''이었다. 진나라 군대의 수송부대를 기습할 땐 말을 타고 달아나던 지휘관을 두 발로 쫒아가서 잡고, 매 전투마다 돌격대장 역할을 맡는 등 맹장 기질을 제대로 보여준다. 항량이 장한에게 패배해 전사할 때 유방은 항량을 구하러 가려 했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 부하들이 반대를 했고, 이를 찍어 누르고 군을 움직이려던 유방을 기절시켜 부대를 보전하게 했다. 이후 깨어날 때 잘했다며 했다가 항우가 온다고 하자 채찍으로 태형을 받는 안습한 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인지라 살살 맞기도 했다. 항우도 이때 매 맞던 걸 기억한 듯 홍문연에서 번쾌를 보고 거론하기도 한다. 한신이 대장군이 되었을 때 반발이 제일 심했는데, 한신의 전략이 계속 맞아 떨어지니 한신을 많이 따르게 된다. 홍문연 때는 자신은 정치는 모르나 의리는 안다며 특유의 의리론으로 항우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파한집에서는 주인공 백언이 자신의 호위무사 호연을 두고 '나의 번쾌'라고 부른다. 기생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중 춤추던 무희가 갑자기 백언에게 칼을 들이대는데 이걸 호연이 막자 저렇게 말한 것.[20] 작가가 삼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조와 허저의 일화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높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초한지)에서는 항우도 능가하는 떡대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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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했다. 검술 책략에 특화된 검사 병종 장수로, 오랫동안 아는 사람만 잘 쓰는 숨겨진 강캐였다가 2020년부터 섬멸전과 경쟁전 메이저 픽으로 올랐다.
[1] 사실 그보다는 외척인 여씨의 힘을 줄이기 위해 견제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2] 진의 환관 조고가 문고리 권력을 틀어쥐고 전횡을 휘둘러 마침내 진이 천하를 잃고 대란이 벌어진 것을 지적하며, 유방이 중신들과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곁에만 머물다가는 망한 진나라 꼴이 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3] 하지만 진평은 번쾌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호송(마침 유방이 죽어간다는 정보가 있었기에)하였으므로 이는 번지수를 잘못 잡은 원한이었다. 김태권은 한나라 이야기에서 진평이 이런 것이 자칫하다가 번쾌를 죽이거나 기분 상하게 할 경우, 여수나 여후에게 자신이 분풀이로 당할 것을 우려해서라고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4] 한신 부분은 그렇다쳐도 노관에 대한 처우는 당시 노관이 반란군 수괴였는데 이런 노관을 사적으로 놓아주었다면 꽤 문제있는 행동이고, 여수가 진평을 핍박한 건 유방 사후부터 조참의 죽음까지 무려 5~6년간 이어진 집요한 괴롭힘이었는데 번쾌는 죽을때까지 이 문제에 어떤 참견도 한 정황이 없다. 흉노 정벌 운운은 다른 문제도 있는데, 혜제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끼리 이만한 중대사를 날치기로 정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영포의 난 당시엔 황제인 유방의 지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유방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번쾌가 이때와선 이랬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좀…. 하지만 본래 순박한 성격이던 번쾌가 이런 정치싸움에 적응을 못한 것이라 보인다. 이미 죽음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오로지 여후의 매부라는 이유 떄문에 살아남은 것이니만큼,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살아간 듯하다.[5] 《사기》 원문에는 돼지 생고기로 나와있지만. 《사기색은》에 따르면 오자(誤字)라고 한다. 애초에 잔치하면서 다같이 먹을 음식에 못 먹을 것을 올려두겠는가. 가장 유력한 추측으로는 훠투이라 불리는 염장한 돼지다리가 거론된다.[6] 일설에 따르면 유방이 미녀와 보물에 완전히 맛탱이가 가자 번쾌가 쳐들어가서 바짓가랑이 잡고 끌어내다시피 하면서 데리고 나왔다고도 한다. 옆에서 장량도 한마디 했다.[7] 흉노에 항복한 장수들.[8] 진평 항목 참조.[9] 노관열전을 신뢰한다면 이때 번쾌는 반란한 노관이 제 발로 나왔는데도 뻔한 변명만을 믿고 그대로 놓아준 셈이 되는데, 이 일도 유방의 분노에 기여했을 수 있다.[10] 번불인이 병약한 탓에 아이를 만들지 못하자 자기 부인과 동생을 간통하게 하여 나온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고 속이고 대를 이었다. 번불인이 정말 병약했거나 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11] 이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대략 '난 내 아내를 잃었고 너도 남편이 없으니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자'였다.[12] 그는 항우의 부하였으나 항우 패망 후 유방에게 사면받고 한 조정에서 일했다. 항장 출신이다보니 아주 높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직위에는 자주 올랐던 데다가 무엇보다 당시 강직한 인물로 이름을 날렸다.[13] 거기에 저런 망발을 하는 번쾌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까지 말했다.[14] 당시가 워낙 혼란했던 시기였고 또, 항우가 하도 학살을 해대서 당시 중원의 인구가 심각하게 줄었다고 한다. 도저히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때가 아니었다.[15] '''번'''쾌, '''역'''상(역이기의 동생), '''등'''공(하후영의 작위), '''관'''영의 머릿자를 딴 제목.[16] 그런데 사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떵떵거리면서 2대 이상을 버틴 양반들이 거의 없다. 사실 자식의 능력과 처신은 부모와는 별개인 것이라. 자손들이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는 정도의 뜻.[17] 당연히 '파리떼'는 번쾌 등을, '준마'는 유방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사마천이 중니제자열전에서 안회를 평가하며 이미 한 번 써먹은 바 있다.[18] 항우 어딨냐고 일갈하며 등장하는 모습이 일품. 둘의 싸움의 결과는 보여주진 않았고 팽성전투가 워낙에 유방이 대패한 전투다보니 번쾌도 난전 중에 후퇴한 듯 하다. 팽성 전투 대패 후에 유방이 애타게 번쾌를 찾으나 초군이 걔 이미 죽었다! 하면서 유방을 절망시키는데 어디까지나 도발. 나중에 자연스럽게 다시 유방과 합류해있다.[19] 배우는 진소춘으로 67년생이다. 참고로 유방역의 여명이 66년생.[20] 사실 이건 당시 장안 기생집에서 유행하는 놀이였다고 한다. 춤추다가 갑자기 칼을 들이대 태연하게 있으면 의기가 있다고 띄워주고 칼을 막아내면 무예를 칭찬받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