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윤
[image]
王允
(137년 ~ 192년)
1. 개요
후한 말의 정치가. 자는 자사(子師).
삼국시대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왕윤의 전기는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빠져 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여포와 같은 병주의 태원 출신이다.[1] 병주에서 등용되어 소신있고 깨끗한 인물로 명성을 떨쳤다.[2]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수로 등용되어 여러 차례 황건적을 격파했으며, 도중에 십상시와 황건적이 내통하고 있었다는 편지를 입수하여 십상시를 고발한다. 황제는 진노했지만 환관들의 아부에 그만 그들을 용서해주었고, 왕윤에게 원한을 품은 환관들은 오히려 왕윤에게 거짓죄를 덮어씌워서 죽이려 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지인들이 독약을 보내 자결할 것을 권했지만 왕윤은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으나 여러 공경들의 탄원이 있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에 환관들의 보복을 피해 잠적하여 사예주 일대를 유랑했다고 한다.
이후 환관들과 대립하게 된 대장군 하진에게 재등용되어 종사중랑 하남윤이 되었다. 하진이 환관들에게 암살당한 뒤 반환관파의 대표가 된 원소의 반격으로 궁궐이 점령되어 환관들이 소제와 진류왕을 데리고 궁궐 밖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원소를 지원하기 위해 하남중부연 민공을 보냈다. 동탁이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자 동탁에게 중용되어 삼공의 하나인 사도가 되었다. 동탁은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명성이 높은 왕윤을 중용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왕윤은 실력으로는 동탁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일단은 동탁 정권에 협조적으로 행동했으며, 동탁도 겉으로는 협조적으로 나오는 왕윤에게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동탁 측에 붙은 것은 아니고 동탁에게도 어느 정도 쓴소리를 하면서 양심적인 면모를 보였던 모양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당시 황제와 여러 조신들은 왕윤밖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동탁의 무자비한 장안 천도 과정에서 서적들을 보호하여 진귀한 도서들이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사실 동탁 집권 초기 왕윤이 동탁 정권에 협조적으로 행동한 것이 왕윤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흠결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환관 세력'과 -'하진+청류파=반환관 세력'이 박치기끝에 둘 다 날아가버린 당시 상황에서 조정(중앙 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쨌건 군사적 기반을 갖춘 세력가가 필요했고, 동탁이 한나라의 신하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동탁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동탁에게는 갑툭해서 벼락출세한 변방 군벌 출신에 정당성이 부족한 집권 과정, 정권 장악 이후의 폭정 및 특히 (유교적 세계관으로는 거의 정당화가 불가능한) 신하로써 집권하자마자 황제를 갈아치움 같은 많은 정당성의 흠결이 있었지만 이 당시 한나라 조정이 겪고 있던 심각한 혼란과 권위 실추를 생각하면 왕윤(이 대표하는 한나라 충성파) 입장에서도 얘는 이래서 싫고 쟤는 저래서 싫다고 입맛대로 고를 수 있을 만큼 여유있는 처지는 아니었고 조정을 지탱해 줄 다른 대안 역시 당장은 막막한 상황이었으니 동탁이 가진 무수한 흠결들도 조정의 권위를 지탱하는데 공헌하기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할 부분으로 여길만 했던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면 동탁은 공공연하게 찬탈의 야심을 드러냈으니 이 시기 왕윤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그래서 그 동탁을 날려버린 건 결국 왕윤이다. 결국 왕윤의 가장 큰 정치적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원칙론과 강직함이지만, 그 역시 한나라 조정의 유지와 재건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한 현실정치가로써의 측면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 다만 (하술된것처럼) 동탁 제거 후 정세 판단에 실패함으로써 그의 한나라 재건 드라이브는 최종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2.2. 동탁 제거
왕윤은 동탁에게 신임을 받으면서도, 은밀히 동탁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기회를 보고 있던 왕윤은 여포와 동탁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기회로 보았다. 결국 여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동탁을 제거한다. 후세에는 여기에 가공 인물인 초선#s-3을 끼워넣어 사건을 윤색했으며 삼국지연의에서 인기있는 대목 중 하나로 재창작되었다.
왕윤은 동탁을 척살한 이후 동탁의 구족을 깡그리 잡아다 다 멸했다. 이 과정에서 황보숭을 시켜서 동탁의 동생인 동민, 동탁의 조카인 동황, 동탁의 어머니인 지양군을 추격하게 했는데 이때의 지양군은 나이가 90살에 달했다. 지양군은 자신이 고령이라는 것을 이유로 황보숭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이미 왕윤으로부터 동탁의 구족은 무조건 다 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황보숭에 의해 사살당했다.
2.3. 채옹을 죽이다
채옹은 동탁으로부터 삼대(三臺)에 연이어 임명될 정도로 실드&버프를 받고 있던 터라 왕윤 눈에는 여간 고깝지 않았던 듯하다. 확실히 사실상 기록으로 전하는 부분만 생각하자면,
이때 사마천의 고사를 들며 채옹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서에서 황제를 비방해서라고 말하긴 하지만 겨우 살아남은 사마천의 업적을 아는 현대인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왕윤의 선명성을 생각해봤을 때 온갖 폭정을 저지른 동탁의 어용지식인으로서 동탁이 죽어서도 그를 위해 한탄하는 채옹을 좋게 보기만은 어려웠을 것이다.
2.4. 최후
왕윤은 모든 원흉인 동탁만 제거되면 그 이후엔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동탁 사후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으며 점차 교만해진다. 왕윤은 녹상서사로 의동삼사로 임명된 여포와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등은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에 병주인 남녀 수백 명[3] 을 학살했다. 이에 왕윤이 이들에게 절대 사면불가 방침을 고수하자 결국 이각 등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또 동탁의 잔당들을 무장해제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사면령은 거부했기 때문에 동탁이 근거지를 두고 있던 양주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동향민들인 양주인들을 모조리 죽인다 카더라"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결국 이각, 곽사의 반란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동탁의 잔당이 두려워하며 섬현에 주둔했는데 호문재(胡文才)와 양정수(楊整脩)는 모두 양주 출신 유명인들로 왕윤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왕윤은 이들을 불러 양주인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풀게 했는데, 좀 좋게 말해주지 않고 "관동의 서자(쥐새끼)들을 경들이 불러오라"라고 오만하게 말했고 이해 두 사람이 오해를 푸는게 아니라 동탁 잔당의 군사들을 되돌아 오게 했다고 한다. 사이도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너무 오만하게 나간터라 애당초 왕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저 두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각과 곽사는 장안을 치자는 가후의 계책을 썼고 서쪽으로 가며 군사를 거두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군사가 10여 만명이 되어, 곧 장안성을 포위했다. 왕윤은 여포 등을 보내 이를 막게 했지만 여포가 패배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윤의 오만한 태도에 반감을 갖고 있던 옛 동탁 휘하의 장교들이 반란군과 내응하며 칼을 돌렸기 때문에 전세가 완전히 기울게 된다.[4] 성이 함락되기 전에 여포는 도망치는데 문 밖에 말을 매어두고 왕윤에게 같이 달아날 것을 권하나 왕윤은 "단지 국가를 편안히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오. 그렇지 못한다면 몸 바쳐 죽으리다. 조정의 어린 임금이 나를 의지하는데 어려움에 임했다고 구차하게 벗어나려하는 건 내가 차마 못 할 짓이오. 그대는 노력하여 관동의 여러 공들과 협력하여 나라를 위해 힘써주시오."라는 멋들어진 대사를 남긴다.[5]
결국 왕윤과 그 일족들은 모두 살해되고 왕윤의 시체는 저자에 효시되었다. 헌제는 왕윤의 죽음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장안의 남녀노소 중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왕윤의 시체는 옛 부하였던 조전이 수습해서 장사를 지냈다.
아들 둘을 비롯해 일족 1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으나, 조카 왕신(王晨), 왕릉(王凌) 형제는 몰래 성벽을 타 넘고 간신히 도망쳐 살아났다. 왕릉은 후에 위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봉직한 뒤 사마의와 맞서다가 전사한다. 왕윤 사후에 함께 《효경》(孝經)을 강론할 수 없게 된 전 태사령 왕립(王立)은 혼자 쓸쓸해 하였다고 한다.
뒷날 이각에게서 벗어나 조조의 보호로 허창으로 천도한 헌제는 왕윤의 충절을 기려 그를 호분중랑장에 추증하고 그의 손자 왕흑(王黑)을 안락정후로 봉하고 식읍 300호를 내렸다.[6]
3. 연의
연의에서의 캐릭터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동탁 집권 이전의 모습이 모두 생략되고 나관중의 창작인 칠성검이나 연환계의 일화가 주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삼국지 문화계에서는 이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연의에서 묘사된 "이미지"에 더 쉽게 사로잡히는 편이다. 특히 연의에서 묘사되지 않은 왕윤의 전반생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지 평가에서는 손해를 보는 경향이 있다. 후한서 왕윤전과 자치통감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나오지만 문제는 삼국지 문화에서는 후한서보다 정사 삼국지에 편중되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다.
4. 평가
긍정적으로 평가될 때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백성들을 위하려다 안타깝게 실패한 충신 정도로 여겨진다.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수청무대어).
평소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권력을 잡은 뒤로는 그 성격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정의에 대한 집착'이 그에게 있어선 실책이었지만 그것을 결점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애초에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과 정의에 대한 꼬장꼬장한 고집을 가진 왕윤 같은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동탁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진 셈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점이건 아니건 그 실책이 이각과 곽사의 반란으로 이어져 결국 한 왕조를 전면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가볍게 볼 수도 없다. 동탁 사후 그가 좀 더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였으다면 이각과 곽사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왕윤은 당시의 상황을 "군사력을 장악한 동탁이 갑자기 사망하고 권력에 공백이 생긴 비상사태"가 아니라 "황실이 그 권위를 회복하고 정상으로 돌아간 상태" 정도로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파악한 듯이 보인다. 이런 비상시에는 군대의 움직임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왕윤은 군을 이상할 정도로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동탁이 사망하고 그의 군사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왕윤에게는 동탁의 군사력을 자신(혹은 황실)의 세력으로 흡수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묶어놓고 스스로의 군사력을 양성하거나, 혹은 외부의 근왕세력에게서 군사력을 빌려서 동탁의 잔당을 토벌하는 등의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왕윤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동탁 잔당들을 흡수하거나 사면하지 않으면서도 무장 해제를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맞설 군사력을 외부에서 빌려오지도 않았다. 비록 이각, 곽사가 왕윤에게 위협을 느끼고 군대를 해산할 생각도 했으니(가후의 선동만 아니었다면) 강경책이 전혀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동탁 잔당이 그 군사력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당연한 가능성을 왕윤이 과연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자신의 대업이 정당성이 있었고 한 왕조를 망가뜨린 동탁의 주구들은 언젠가는 죄값을 치루어야 했을 것이며 자신에 동조하는 여포, 서영과 같은 장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한나라의 치세에서 태어나 성장한 한나라의 중신이었던 왕윤의 입장에서는 '한 황실 중심의 천하'에 대한 관념이 너무 확고하여 그 외의 상황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후세인인 우리는 황건적의 난에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집권을 거치면서 한나라가 이미 멸망 수순에 접어들었음을 알고 있지만... 한나라의 충신인 왕윤 입장에서는 400년에 이르는 한의 치세가 당대에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지 않았고, 이 때문에 조정과 황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황실의 권위와 영향력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하지 못하고 '권신 동탁의 영향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정의 권위가 위축된 상태'로 파악하여 권신 동탁만 제거하면 다시 조정과 황실의 영향력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 판단하였으나, 실상은 동탁을 제거한다고 해도 자생이 어려울 정도로 한나라의 체제 자체가 약화된 상태였다는 것. 사실 이각이나 곽사가 왕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군대를 해산할 생각도 했다는 점을 보면 이 시점까지는 한나라의 황실 및 조정에 어느 정도의 권위가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오판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었다고 볼 정도는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왕윤의 시도가 실패하고 황제가 이각과 곽사의 전리품이 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뒤 조조에게 옹립되어 겨우 체면치레나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권위까지 완전히 상실하고 한나라는 완전한 멸망 수순을 밟게 되지만...
이와 같은 왕윤의 오판을 전후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왕윤의 철천지 원수라 해야 할 십상시들이 저지른 오판이 의외로 왕윤의 오판과 비슷하다. 황제와 황후를 손에 쥐고 있고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십상시들은 하진만 제거하면 황실의 권위를 뒷배로 삼아 다시 자신들이 정국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겠지만... 황실과 조정의 권위가 십상시의 예상보다 훨씬 약화되어 있었기에 분노한 하진 세력의 역습을 전혀 견뎌내지 못하고 끔살당하고 만 것. 물론 왕윤 입장에서야 십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정당성과 명분을 가진 입장이었고, 무리한 권력욕 때문에 오히려 자충수를 둔 꼴인 십상시에 비해 한실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통탁의 제거는 필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1:1로 비교하기엔 왕윤이 좀 억울하긴 하겠으나, 황실과 조정의 권위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는 점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반면, 왕윤 이후 비슷한 방법으로 권신(조조)를 제거하려 했던 동승의 경우, 조정 자체의 권위로는 더 이상 현실권력을 제압하기 어려움을 인지하고 유비 등 수도 내의 조력자들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조조를 제거한 후 조조파 자체를 일소하려면 수도 내의 조력자뿐 아니라 (연의에서처럼) 외부의 군벌까지 끌어들였어야 했겠지만... 어쨌건, 왕윤과는 달리 동승의 조조 제거 시도가 실패한 것은 밀고 등 우연적 요소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동탁 시기에 비해 권신의 권위와 영향력, 정국 장악력은 더 강력해지고 황실의 권위는 더 실추했다는 시대적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동탁 암살 이후 어느 정도 국정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던 왕윤과는 달리 동승의 경우 설령 조조 제거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조조파의 반격을 감당할 반격이 도무지 막막한 것. 이를 통해 볼 때 왕윤의 시도는 실질적으로 한의 재흥(황실과 조정의 재건을 통한 한의 재흥)을 이룰 가능성이 있던 사실상의 마지막 시도였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왕윤이 당시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했다면 이후의 정국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역시 흥미로운 문제인데... 만약 왕윤이 '한나라 황실과 조정의 권위가 스스로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실추된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 상황에서 한실 재건을 시도했다면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현실적인 권력(특히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이 스스로를 유지할 힘이 없는 이상 일단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한실을 지탱해줘야 하는 것. 즉, 군사력과 정치력을 확보한 왕윤이 황제를 옹립하고, 황제의 권위를 빌어 조정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 있는 군웅들을 복속시킴으로써 한나라의 영향력을 복구하고 이를 통해 황실의 권위까지 회복시키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조조가 선택한 길과 똑같다(...). 문제는 왕윤에게 조조와 같은 성과를 낼 만한 재능(특히 군사적 재능)이 있는가, 그리고 처음 가졌던 목표는 '한실의 재건' 이었다 할지라도 세력 확장을 거듭하면서 자의로,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라도 뜻이 바뀌지는 않는가의 여부겠지만(특히 이 시점에서 나이가 적지 않았던 왕윤이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중도에 왕윤의 지위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고, 이 경우 그 후계자가 다른 마음을 먹을 가능성도 있다).
5. 기타
왕윤은 그 포지션 때문인지 노신(老臣, 늙은 신하)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는데, 죽을 때 나이는 50대 초중반 정도였다. 현대 기준으로는 백발이 성성할 정도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60살까지 사는 것도 힘든지라 50대 중반에 노환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현대에는 의학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누구나 웬만하면 80살까지는 다 살기 때문에 이게 나이가 많은 건지 체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서는 고령인 나이임이 틀림없다.
또한 칠성검 에피소드에서 나온 문관 이미지 때문인지 단순히 책상물림 선비로 여겨지는 경향도 있는데, 실제로는 변방 출신에 궁마술에 능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황건적 토벌에서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의외로 무장다운 모습도 있었던 셈이다.
6. 미디어 믹스
왕윤/기타 창작물 항목으로.
[1] 여포 이민족 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이긴 하지만, 여포의 출신지 오원군 구원현은 왕윤의 출신지 태원과도 한참 떨어진 북쪽에 있다. 지금의 네이멍구 자치구 바오터우시에 위치하며, 한무제때부터 이미 한족들이 이주해 산 곳이기는 하지만 당시 흉노나 선비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기도 하다.[2] 순욱의 별명으로 알려진 왕좌지재라는 말로 먼저 불린 사람이다. 왕좌지재에 어울리게끔 일을 했으나, '''황제가 막장'''이었다.[3] 왕윤, 여포 등을 필두로 동탁 주살의 주요 세력이 병주 출신이다.[4] 정확히 덧붙이자면 이몽, 왕방이 왕윤에게 등을 돌렸으며 여포는 이각, 곽사의 유인책에 넘어가고 본래 장안성 수장이었던 장제, 번조가 호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5] 조조전에서는 자살로 기록되지만 타 매체에서는 이각, 곽사 등에게 살해당하는 묘사로 나온다.[6] 다만 왕윤에게는 왕개, 왕경정 두 아들이 있었는데 왕흑은 그중 누구의 아들인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