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李儒
(? ~ ?)[1]
1.1. 개요
자는 문우(文優) 또는 효유(孝儒).[2] 사례(司隷) 풍익군(馮翊郡) 합양현(郃陽縣) 사람이다.[3]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기록이 없으며 후한서와 여러 사서, 비석 등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1.2. 정사
조정에서 박사(博士)를 지냈으며, 광화 7년(184) 거록 사람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합양 사람 곽가(郭家)[4] 또한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성과 관청을 불태웠는데 합양령 조전(曹全)은 곽가의 난을 진압하는 한편 현의 학자인 이유·정인(程寅) · 난규(欒規)를 조정에 천거했다. 이에 이유는 이듬해에 동향인 상량(商量)·사마집(司馬集) 등과 함께 조전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5]
동탁의 명령으로 소제를 독살했다.[6] 초평(初平) 원년(서기190년), 산동 지역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나 동탁의 난을 토벌하고자 했다.(후한서 영사하황후전) 동탁은 동방에서 병사가 일어나자 두려워서 홍농왕(소제)를 곧 죽였다.(후한서 동탁열전)[7] 동탁은 홍농왕을 누각 위에 머물게 한 후, 낭중령 이유에게 짐독을 올리게 하면서 말했다.(후한서 영사하황후전)
192년에 동탁이 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이각을 통해 시중(侍中)에 천거되었다. 헌제는 거절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의와 달리 역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이유는 동탁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고, 동탁에 연류되어 처형되기는커녕 이각이 집권할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연의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인간이 삼국지연의에서는 나관중에 의해 대폭 개작되어 엄청난 비중을 가진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나관중은 이유가 상당히 나이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연의에서는 대폭 젊어진 대신 원래 나이에 걸맞은 학식을 부여했다. 그래서 연의에서의 이유가 영민한 것이다.
연의에서는 동탁의 사위이자 최고 모사로 동탁이 진작에 그의 영민함을 알고 딸을 주었으니 연의에서의 동탁은 어느 정도 인물 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다.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 환관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동탁을 불렀을 때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부추겼으며, 가기 전에 먼저 사심이 없다는 의미의 조서를 먼저 하진에게 보내 하진을 안심시키라고 간하였다. 동탁이 낙양에 올라 정권을 쥔 뒤에는 현재 황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을 황제로 모셔 천하의 대권을 잡으라고 계책을 올리고, 여포를 포섭하는 것도 적극 주청하는 등 삼국지 초반 동탁의 대성공을 도운 최고 공로자다.
하지만 직접 하태후를 2층에서 던져 죽이고 폐위된 홍농왕(소제)에게 목구멍을 억지로 벌려 독주를 부어 죽이는 등 매우 간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동탁이 초선에게 빠져 여포와 관계가 나빠지는 걸 불길한 징조로 보고 동탁에게 초선을 여포에게 주라고 간했으나, 동탁이 거부하자 이후 곧 초선에 의해 동탁이 몰락할 거라고 예견한다. 그래서인지 동탁이 반대파들에게 속아 황제가 되는 줄 알고 가짜 선양식에 갈때 동탁의 측근 중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동탁이 주살된 뒤 바로 집에서 하인들에게 잡혀 여포에 의해 척살되었다.
1.4. 평가
삼국지의 전체적인 평가는 잔인하고 비열한 간신, 악신으로서의 평가가 대부분인 듯하다. 기본적으로 간신이자 악인이지만 동탁에게만은 충성하고 뛰어난 지략을 보이는 모습이 나름대로 인상적이라 여러 삼국지 각색물에서도 자연스럽게 '''연의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쉽게 참고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인 정사에 이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데다가, 그나마 있는 기록도 소제를 독살했다는 등 좋은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정사와 연의의 비교가 성황일 때 이유는 창작 캐릭터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1.5. 미디어 믹스
이유(삼국지)/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2.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李遺
생몰년도 미상
이회의 아들로 《정사 삼국지》 〈촉서〉 〈이회전〉에서만 언급된다.
아버지 이회가 관직을 역임하면서 남중을 다스리다가 죽자 후사를 이었다는 언급만 나오며, 관직조차 나온 게 없기 때문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유의 사촌인 이구가 언급된 반면에 이유의 아들이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실한 원인은 이유가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거나 자손을 낳지 못한 것이거나, 기록이 부족한 〈촉서〉의 기록 부재나 소실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 설화에서는 이유 대신에 이회의 아들로 이울이 나오며, 관우의 딸인 관삼소저가 이회의 아들인 이울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설화를 기초로 해서 이회의 출신지인 건녕군 유원현에 관삼소저와 함께 묘가 합장되어 있다고 한다.
[1] 조전비에 따르면 화평 원년에 백모곡의 수재를 입었고, 그 폐해를 물리친 다음 성곽을 쌓았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안이나 수신하던 선비들 중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 중 이유, 난규, 정인등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화평 원년은 150년이니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관례에 오르는 나이인 15세로 최대한 낮게 잡더라도 이유는 136년생이 된다. 허나 이후 내용엔 화평 원년의 폐해를 무술년~기해년(158~159년이 된다)에 물리치고 성곽을 쌓은 다음 이유, 난규, 정인을 천거했다고 하니 이 시기를 160년 이후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전 편집인 136년 이전이라고 출생시기를 단언할 수는 없다. [2] 조전비에는 이유의 자가 문우(文優)라고 기록되어있는데《태평어람》 인용 원산송의 《후한서》에서는 이유(李儒)가 이효유(李孝儒)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자에 들어가는 글자가 이름 글자와 같은 것은 드물고 금석문이 신뢰성 원탑이기 때문에 이효유는 이유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3] 《조전비(曹全碑)》[4] 조조의 모사 곽가가 아니다.[5] 출처: 조전비[6] 출처: 후한서, 자치통감[7] 아이러니하게도 관동에서 병사가 일어난 까닭은 소제를 죽였다는 얘기가 퍼졌기 때문이었다.[8] 출처: 후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