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나 스펜서
1. 소개
영국의 귀족이자 사교계 인사, 패션 아이콘, 작가, 정치 운동가이다. 영국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스펜서 가[2] 출신이며 제 5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첫번째 아내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757년 6월 7일 존 스펜서와 조지아나의 장녀로 태어났다. 후에 여동생 헨리에타, 남동생 조지가 태어났고 유복했던 집안 덕에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조지아나의 부모는 금슬이 매우 좋아서 당시엔 흔했던 정부도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특히 첫째 딸 조지아나를 매우 사랑했다. 1765년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이 되어 조지아나는 '레이디'의 호칭을 얻게 되었다.
2.2. 결혼과 자녀
열 일곱번째 생일을 맞이한 조지아나는 1774년 7월 4일 8살 연상의 5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와 결혼한다. 결혼식은 윔블던 교구 교회에서 가까운 가족들만 참석한 채 조용히 치뤄졌다. 조지아나의 부모님은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는게 슬펐지만, 당시 데본셔 공작은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었기에 이를 위로삼았다.
하지만 데본셔 공작은 스펜서 백작을 싫어했고, 조지아나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생활을 하는 내내 불륜을 일삼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조지아나와 끊임없이 싸웠다. 심지어 그는 결혼 전에 정부에게서 샬럿이라는 사생아까지 두었는데, 조지아나는 이 사실을 결혼한 후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가 죽은 후에 아이의 양육은 전적으로 조지아나에게 맡겨졌다.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그녀는 샬럿을 사랑으로 키웠다고 한다.
1782년 조지아나는 바스 시에서 '엘리자베스 포스터'라는 가난한 여성과 매우 친해진다.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별거하면서 두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고 있었는데, 이를 딱하게 생각한 조지아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녀의 아들들까지 함께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데본셔 공작은 엘리자베스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녀는 데본셔 공작의 정부가 되어 세 사람은 한 집에서 지내게 된다. 다만 엘리자베스와 데본셔 공작이 서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섹스 파트너의 관계였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두 명의 사생아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이후에도 다른 사람과도 성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사교계의 유명한 가십거리가 되었다.[3]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조지아나는 1783년 첫째 딸 조지아나와 1785년 둘째 딸 해리엇을 낳는다. 그녀는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는데, 1790년 드디어 아들 윌리엄[4] 을 출산하였다.
아들을 낳은 후 그녀는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되는 찰스 그레이[5] 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사랑에 빠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791년 조지아나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몰래 아이를 낳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1792년 2월 20일 그녀는 딸 일라이자를 낳았고 이 아이는 그레이의 가족들에게 길러졌다. 후에 조지아나는 일라이자에게 종종 찾아갔으며, 일라이자는 조지아나가 죽을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첫 아이 이름을 어머니의 이름을 따 '조지아나'라고 지었다.[6]
한편 프랑스에 있는 동안 조지아나는 아이들을 매우 그리워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데본셔 공작이 찰스와 계속 만나면 아이들을 영원히 못 볼 것이라고 협박했고, 결국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가정에 충실하도록 노력했다.
2.3. 명성
데본셔 공작부인이라는 지위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던 그녀는 당대 영국의 최고 유명인사였다. 그녀는 여성들의 패션 아이콘이었고,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조지 4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등의 어마어마한 인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 문학, 과학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문사에서는 그녀의 모든 행보를 기사에 실었다.
정치적으로 그녀는 휘그당을 지지했는데,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조지아나는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 여러 정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먼 친척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위한 선거 운동을 활발히 했다.[7] 그녀의 정치 참여 활동은 후에 여성의 인권과 페미니즘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그녀는 도박을 좋아했던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남편이 그녀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나중에는 30만 파운드[8] 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남편에게 계속 숨겨야 했고 부모님에게 갚아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고 한다.[9]
2.4. 말년과 죽음
데본셔 공작이 통풍에 걸려 그를 간호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아들을 낳은 후에 몇번의 유산을 겪으며 부부사이가 원만해지기도 했다. 글을 쓰거나 정치 활동에 관여하며 여생을 보냈고, 전 연인인 찰스 그레이의 아내와도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1801년 큰 딸 조지아나가 칼라일 백작과 결혼하였다. 이는 조지아나가 생전에 자기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한 유일한 사례였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그녀의 건강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황달이 심하다며 불평을 하던 그녀는 간에 종양이 생겼고, 결국 1806년 3월 30일 남편, 어머니, 여동생, 큰 딸 조지아나[10] ,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데본셔 공작은 그녀의 사망 후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피커딜리[11] 에 모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는 더비의 올 세인츠 교구 교회에 묻혔다.
2.5. 사후
그녀의 죽음 후에야 데본셔 공작은 그녀가 남긴 빚을 알 수 있었다. 그 금액은 현재 가치로 372만 파운드(한화 약 57억 4천만원)에 달했다. 이것을 본 데본셔 공작의 첫마디는 "이게 전부인가...?" 였다고.[12] 그는 죽을때까지 이 빚을 다 갚지 못해서, 아들인 6대 데본셔 공작이 다 갚을 수 있었다.
데본셔 공작은 조지아나가 죽은 후 엘리자베스 포스터와 재혼했다.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입장에선 전남편한테 버림받고 애 둘 딸린 부인에서 데본셔 공작의 정부가 되었고, 결국 마지막에는 사망한 조지아나의 작위까지 가져가 통칭 ‘데본셔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캐번디시’가 되어 어마어마한 신분상승을 이뤘다. 또한 생전 조지아나의 호의로 미천한 사생아 신분이였던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자식들도 [13][14] 그야말로 벼락출세한 입장이였다.
당연하겠지만 조지아나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호의를 원수로 갚아 아버지와 불륜 관계가 되고, 끝내는 어머니가 죽자마자 아버지의 후처가 되어 공작부인 작위를 꿰찬 엘리자베스를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다. 결국 1811년 데본셔 공작이 사망하자 조지아나의 장남 6대 데본셔 공작은 엘리자베스에게 돈을 주며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나의 자녀들과 엘리자베스의 자녀들은 함께 자라서 그런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3. 매체에서
파란만장한 그녀의 인생은 여러 차례 드라마화 되거나 작품에 등장하였다.
- 정염의 미녀 (The Divine Lady) (1929년) - 에벌린 홀이 연기.
- 버클리 스퀘어 (Burkeley Square) (1933년) - 줄리엣 콤프턴이 연기.
- 더 하우스 인 더 스퀘어 (The House in the Square) (1951년) - 캐슬린 바이론이 연기.
-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2008년) -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 조지아나의 일생을 담은 영화이다.
[1] Eliza는 엘리자가 아니라 일라이자로 발음하는 게 맞다.[2]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도 스펜서 가문이다. 특히 조지아나는 다이애나의 5대조 고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비슷해서 주목받기도 하였다.[3] 지금으로 치면 영국의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 카밀라의 관계와 비슷한 셈이다.[4] 후에 제 6대 데본셔 공작이 된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5] 참고로 얼 그레이(Earl Grey)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6] 일라이자가 찰스의 딸이라는것을 모르고 그레이 가문을 방문한 이모 헨리에타는 일라이자가 찰스를 닮은것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한다.[7] 1784년 총선 때 공작부인이 폭스를 위해 표를 던지는 사람에게 키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8]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데본셔 가문에서 다 갚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값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심지어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조지 4세에게까지 갚아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10] 당시 임신 중이었다.[11] 데본셔 가문이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12] 다시 말해서 '빚이 더 많을줄 알았는데'라는 안심 혹은 허탈함이 반씩 섞인 반응.[13] 조지아나는 데본셔 공작이 결혼 전에 낳아온 딸 샬럿도 적자로 인정하고 양육해줬다. 본부인의 자녀가 아니면 왕의 자식이라도 웬만한 귀족대접도 받기 힘들었을 만큼 적서차별이 심했던 유럽 상류층 귀족사회에서 이런 조지아나의 행동은 샬럿과 엘리자베스 소생의 자식들에겐 정말 운이 좋았던 행동이였다.[14] 비록 데본셔 공작과 엘너자베스 포스터가 결혼했을지라도 혼인 전에 태어난 자식들은 계속 사생아 취급을 받는게 그 당시 당연한 관례였다. 때문에 조지아나의 아들인 6대 데본셔 공작이 상속자없이 사망한 후에도 공작 자리는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그의 사촌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자식들이 귀족의 영애/영식에게 붙는 lord와 lady 칭호조차 받지 못했던 건 물론이다. 그나마 이쪽은 이복형제이기라도 했지 그 당시 영국 귀족사회에서는 사실혼 혹은 불륜 관계였던 부모가 뒤늦게 결혼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동일한 친형제임에도 형누나는 사생아고 동생이 적자라 동생이 작위를 물려받은 일도 은근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