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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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다이애나,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3] 영국의 전 왕세자비[4] 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윌리엄 왕세손)과 6위인 서식스 공작 해리의 친어머니이다.'''People's Princess'''[1]
'''민중의 왕세자비'''
'''England's Rose'''[2]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영국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영국의 왕세자비[5] 였다. 한국에서는 흔히 다이애나 비(妃)라고 부른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1992년부터 별거에 돌입한 후 1996년에 이혼했다. 이혼 후로도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여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전세계적인 애도를 받았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당시 영국과 영연방 왕국에서는 대대적인 추모 열기가 일어났고, 영연방 공화국이나 영연방이 아닌 국가에서도 추모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한국 역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애도를 표시했고 주영 한국대사관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2. 작위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을 때 정해진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았다.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체스터 백작부인, 콘월 공작부인, 로스시 공작부인, 캐릭 백작부인, 렌프루 남작부인, 아일즈의 레이디, 스코틀랜드 왕자비이신 다이애나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and Countess of Chester, Duchess of Cornwall, Duchess of Rothesay, Countess of Carrick, Baroness of Renfrew, Lady of the Isles, Princess of Scotland)'
그리고 1996년 이혼한 후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Diana, Princess of Wales)'로 호칭이 변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이 빠졌다. '전하'는 왕족에게만 허용되는 경칭이므로, 전하로 불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왕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는 '왕족이 아닌' 다이애나가 공식 석상에서 '왕족'인 자기 아들들에게 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이걸 잘 알고 있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전하'의 경칭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과 신경전을 벌였으나, 장남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내가 왕이 되면, 엄마한테 다시 전하의 칭호를 돌려줄게요"라고 말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남동생인 앤드류 왕자의 전부인 요크 공작부인 사라 퍼거슨도,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기 얼마 전에 이혼했다. 다이애나에게는 손아래 동서가 된다. 사실 다이애나와 사라는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이애나가 사라를 왕실이 주최하는 행사에 초대했고, 앤드루와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사라 역시 왕족의 뜻인 "전하"의 경칭이 빠진 채 단지 "요크 공작부인"으로만 불리고 있다.
다이애나 사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추도연설에서 그녀를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 불렀는데,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호칭보다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칭호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 아너러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The Honourable Diana Frances Spencer (1961년 7월 1일 ~ 1975년 6월 9일)
- 레이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Lady Diana Frances Spencer (1975년 6월 9일 ~ 1981년 7월 29일)[6]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Rothesay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캐릭 백작부인 Countess of Carrick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랜프루 남작부인 Baroness of Renfrew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아일즈의 레이디 Lady of the Is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의 왕자비 Princess of Scotland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Rothesay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1996년 8월 28일 ~ 1997년 8월 31일)
3. 친정
다이애나의 친정인 스펜서 백작 가문(House of Spencer)은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 찰스 2세의 사생아들 중 하나였던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의 후손이다. 15세기인 1469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555년을''' 이어져 왔으므로, 역사만 놓고 보면 '''현 왕실인 윈저 왕조보다 더 유서가 깊다.''' 다이애나의 8대조 할아버지 존 스펜서를 통해 윈스턴 처칠과도 혈연이 닿아 있다. 존 스펜서의 방계 후손이 바로 처칠의 집안인 말버러 공작이며,[7] 그 유명한 조지아나 공작부인이 스펜서 가문출신이다. 즉, '''다이애나는 엄연한 귀족 가문의 딸이다.'''[8] 외가는 퍼모이 남작 가문(House of Fermoy)으로 어머니 프랜시스 로셰(1936~2004)는 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셰의 차녀이다.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와 결혼한 이유도 '귀족 가문의 딸'이라는 신분이 결정적이었다. 가문의 선대들이 무역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백작 작위로 귀속된 영지와 신탁금이 귀족사회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어마무시했으며, 아버지인 8대 스펜서 백작의 개인자산도 엄청났기 때문에 덕분에 다이애나와 그 언니들, 남동생 모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외가인 퍼모이 남작가도 만만찮은 가문이였는데, 다이애나의 외증조부가 미국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다이애나의 외조모인 퍼모이 남작부인이 시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의 절친이였을 뿐만 아니라[9] 다이애나의 외조부가 조지 6세의 사냥에도 참석했을 정도로 퍼모이 가문 자체가 왕실 가족들과 상당한 인맥을 맺고있던 가문이였다. 다이애나의 부모님인 존과 프랜시스는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 결혼식엔 엘리자베스 2세 여왕부부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 마거릿 공주. 네명의 고위 왕족들이 귀빈으로 참석했다. 매년 엘리자베스 2세 소유의 별장인 샌드링엄에 방문해 휴가를 보냈고,[10] 다이애나의 남동생이자 고명아들 찰스 스펜서(현 스펜서 백작)는 엘리자베스 2세의 늦둥이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종종 어울려 놀기도 했다. 동생 찰스 스펜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자이기도 하다. [11] 현재는 세월이 지나면서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 스펜서 백작 찰스[12] , 그리고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물려받을 외가 스펜서 가문의 재산도 상당하다고 알려진 바 있었다.[13]
4. 일생
4.1. 어린 시절
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14] 와 프랜시스 백작부인 사이의 3녀로 왕실가족의 휴양지인 노퍽 주 샌드링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으며,[15]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아버지가 있는 샌드링엄으로 돌아갔고, 7대 스펜서 백작이던 친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버지 존이 백작위를 계승하자 스펜서 백작 가족저인 알소프 저택[16] 으로 이사를 갔다. 형제로는 큰언니 사라, 작은언니 제인, 남동생 찰스가 있다.[17]
어린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던 기억 뿐이라고 한다. 다이애나의 부모님은 아들 생산 문제, 성격 차이 등으로 다이애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매일같이 다투었으며 어머니 프랜시스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유모가 너무 자주 바뀌었고, 모든 것이 불안정했으며, 결국 6세 때 프랜시스가 외도로 가출한 것을 기폭제로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것이 인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보거나''', 사교계에서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 ‘바람나서 도망간 여자’라며 수근거리는 말을 들어야 했으며, 계모와의 불화도 심각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이혼 후에도 본인들 일에만 몰두하느라 조용하고 섬세한 그녀를 깊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언론의 과도한 집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4.2. 처녀 시절
결혼 전에는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핌리코의 유치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치원 교사의 말에 따르면,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고, 풀이 죽은 아이가 있으면 옆에 가서 위로해주곤 했다고 한다. 또, 유치원에서 일하면서도 친분이 있는 귀족들의 자녀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 한국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이것이 와전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보모가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한 방에 인생역전을 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다이애나는 비록 불행한 가정사로 얼룩졌지만 엄연한 '''백작 가문의 영애'''이며, 유치원도 평범한 유치원이 아닌 귀족들을 위한 유치원이었다.
워낙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였다. 언니들과 남동생은 모두 우등생인데[18] 본인만 낙제해서 열등감을 느꼈으며, 이 역시 그녀의 소극적인 성격에 한 몫을 했다. 이렇게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정식으로 직업을 갖지는 못했고, 전술한 것처럼 시간제 보모와 개인 파티의 웨이트리스, 지인의 집의 청소부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이렇듯 직업도 없는 귀족영애라는 신분 때문에 본인도 곧 이른나이에 시집을 갈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대상이 왕세자였을줄은 몰랐지만..
유념할 점은, '''생계를 위해 일한 게 아니란 점'''이다. 본래 영국의 상류층(귀족들)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펜서 가문이 워낙 부유한 덕분에,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와 살 때도 '''그 아파트가 다이애나 소유라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한다.''' 이 아파트는 다이애나의 외할머니인 퍼모이 남작부인이 외손주들이 독립할때 '''한명당 한채씩''' 마련해 준 것이다. 이렇듯 다이애나가 짧은 처녀 시절 동안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4.3. 찰스 왕세자와의 만남과 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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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와 소꿉친구라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찰스가 영국의 왕자에다가 다음 왕이 될 후계자라 조금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후에 본인의 남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만..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7세 때의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갔다. 그러다 3년 뒤인 20세 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가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에게 열광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절정에 달할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19]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장차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가 과연 어떤 여성을 비(妃)로 맞이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국민들은 스펜서 백작 가문의 3녀인 19살의 어린 아가씨 다이애나가 찰스의 신붓감이자 미래의 왕비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흥분감 속에서 찰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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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4일,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사람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4.4. 왕세자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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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후인 7월 29일 세계인 수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20] 이때 다이애나의 나이는 20살이었다.
데이비드&엘리자베스 에마누엘 부부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 드레스에 장식된 수천 개의 진주와 스팽글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7미터의 긴 트레인으로도 유명한데, 당시 사원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때 너무 긴 트레인 때문에 들러리들이 고생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드레스의 재질은 ‘실크 테피터’ 라는 상당히 잘 구겨지는 재질이였는데, 결혼식장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동행한 다이애나와 아버지 스펜서 백작은 드레스의 풍성함과 트레인길이로 인한 부피압박으로 꾸깃꾸깃한 상태가 될 정도였다고.[21][22] 이후 옅은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가 화이트를 앞서기 시작했고, 어깨부분의 풍성한 퍼프 슬리브, 긴 트레인은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티아라를 대여하지 않고, 대대로 친정 스펜서 가문에 물려내려오는 티아라를 썼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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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의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분 속의 세기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거치며, 다이애나는 '결혼식이 끝났으니, 더 이상 언론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했던 그녀의 착각이었다. 파파라치들은 끊임없이,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에 찍혔던 여성 인물(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 된다. 실제로 이 말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된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파파라치들의 돈줄이었다.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많은 사진이 찍혔으니 말 다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없다.
다이애나에게 쏟아지는 이런 대중의 관심은 영국 왕실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 중에는 남편 찰스 왕세자도 있었다. 찰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는 생애 단 한 번도 사람들의 관심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쳐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어린 아내가 찰스보다 훨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는 부부 동반으로 타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수행해 온 사람"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24] 사람들은 "찰스가 어린 아내에게 대중의 관심을 빼앗기고도,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답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5. 불행한 결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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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983년. 신혼이던 만 18~20세 때의 모습.[25]
남편인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연인이었다. 카밀라가 이미 앤드류 파커 볼스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륜은 계속되었다.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이애나는,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직전에도 찰스 왕세자가 과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이에 찰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찰스가 카밀라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사이가 나빠질 것을 각오하며, 큰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를 본받아 왕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카밀라와 결혼하면 되었다. 하지만 찰스는 '왕위 계승권'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대중을 눈속임하여 왕세자로서의 인기를 얻으려고,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성공회 신자'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결혼한 다이애나의 눈에 찰스의 간통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지쳐갔다.'''I love you, whatever love means.
사랑해. 그게 어떤 의미든 간에.'''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가 15년 간의 왕실 생활을 하며 괴로워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왕족들 때문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고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 그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히 제외시켰다. 왕족들은 찰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해 비밀리에 악의적으로 타블로이드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도 마치 다이애나가 문제인 것처럼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데에 바빴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다. 찰스 왕세자의 귀족 친구들은 타블로이드에 다이애나를 향한 악의적인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고,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했으며 휴지통을 뒤져 그녀가 사용한 서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궁정인들의 행보와 숨막힐 듯하고 폐소공포적인 왕실 생활에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함은 고조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 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왕족들과 가식적이며 허울 뿐인 군주제에 불만을 품었다. 다이애나는 그녀가 국민들을 만날 때 혹은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러나오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배셔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참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했다. 다이애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었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녀는 "왕실은 '다이애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그녀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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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남편 찰스와 두 아들 윌리엄, 해리와 함께한 가족 사진.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다이애나는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을 때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대답만 반복하고 찰스에게 어떠한 꾸짖음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륜을 방관했다. 유일하게 시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만이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왕실은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실시하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이트와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의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다이애나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찰스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인 것처럼, 마치 다이애나가 편집증을 앓고 있는 마냥 기사를 내보냈다. 결국 10여년 간 참고 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한 이유였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 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했다.[26]
그리고 훗날 BBC와의 인터뷰 비화가 공개되었는데,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 백작이 당시 바시르를 다이애나에게 소개해 인터뷰가 가능하도록 도왔다. 스펜서 백작은 나중에 바시르가 자신과 다이애나비에게 거짓말과 위조된 서류 등을 토대로 신뢰를 얻어 인터뷰를 따냈다고 말했다.#
'마마/전하(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여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 위자료[27] 를 받았다.
나중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볼스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 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사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의 반대와 국민들의 여론에 밀렸다. 또한 추문을 일으킨 탓인지 왕실은 왕의 배우자(princess consort)를 쓰도록 정했다. 하지만 2018년 기준으로 이 내용에 관련된 언급이 모두 삭제되었고, 사실상 찰스가 왕이 되면 Queen Consort를 쓸 확률이 높다고 한다.
훗날 공개된 다이애나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미 결혼 직후부터 불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2004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원본 영상.[28]
4.5.1. 두 아들에 대한 사랑
[image]'''내 아들들은 나의 보물같은 존재예요.'''
다이애나 스펜서
비록 찰스 왕세자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와 해리 왕자를 출산해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이애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동서고금 어린 왕자와 공주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하였다.[29]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과 해리는 미래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부각되었으며,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본인이 어렸을 때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15년 간 지속했다.
4.6. 활발한 사회 활동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하여,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로는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운동이었다. 그녀의 사망 직후인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 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열성적이고 진심어린 다이애나의 사회 활동에 전 세계는 감동했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당연히 그에 비례해 영국 왕실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4.7. 비극적인 죽음
영국 시간으로 오전 7시 쯤에 방송된 BBC의 추모방송,[30] 느린 영국 국가와 함께 유니언 잭이 반기 형태로 걸린 영상과 함께 'Diana, Princess of Wales(다이애나 왕세자비) 1961-1997'이라는 자막을 송출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원래라면 왕가[31]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내보내야 하는데 유니언 잭을 내보냈다고 댓글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방송은 녹화해 CNN에서 다시 내보냈다.
(여자 아나운서 멘트) (여기는 런던 BBC 텔레비전입니다.)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뉴스 스튜디오에서 마틴 루이스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마틴 루이스 앵커) 여기는 런던 BBC 텔레비전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오늘 새벽 5시에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버킹엄 궁전 측에서는 곧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늘 지구촌의 톱뉴스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지 1년 만에 다이애나 비는 오늘 새벽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녀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던 이집트의 억만장자 애인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20살에 왕세자비가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숱한 얘깃거리를 안고 살아온 다이애나 비는, 마치 프랑스 영화의 슬픈 피날레처럼 36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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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가 이혼한 후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고, 그 중에서도 이집트 출신으로, 런던 해로스 백화점과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의 풀럼 FC를 운영하는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아들인 42세의 도디 알파예드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집사의 증언에는 그가 아닌 파키스탄 출신의 하스낫 칸이 연인으로 추정된다.'''"아름다움과 명성과 부를 한몸에 지닌 화려한 일생이었지만 단 하나, 행복만은 그녀를 비켜갔습니다.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비가 오늘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올해 나이 36살. 그의 곁에는 세계적인 헤롯백화점 사주 알 파에드가 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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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석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KBS 뉴스 9의 오프닝 멘트.
다이애나는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다. 이미 영국 왕실과 싸운 적도 있는 다이애나는 참지 않고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1명을 잡아서 두들겨 패기도 했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여, '마틴'이라는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를 300m 안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접근금지령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예요!" 라고 징징거리며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고, 그녀가 알 파예드와 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원'''에 팔렸다. 이러니 파파라치들 눈이 안 뒤집어질 수가 있었을까.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 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 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까지 했다. 또한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s-3.7에 올라탄 다이애나와 도디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벤츠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하고 만다. 운전사 앙리 폴과 도디 알파예드는 충돌 순간에 즉사했고 다이애나는 치명상을 입은 채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만,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신속히 구출하여 병원으로 이송하거나, 구급대에 신고하기는 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마구 터뜨려댔다.''' 만약 이 때에 파파라치들이 빠르게 신고를 했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약 20분 후에야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당연히 이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선한 사마리아인 법)로 체포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체포 당시 머그샷과 이름.) 다만 이들은 대부분 무죄를 받았고, 주범 격의 3명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1유로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정신 못 차린 잡지사들은 죽어가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사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비밀리에 수억 원의 돈을 제시했다가 CNN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이애나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 백작이 '파파라치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다이애나 사진만 찍게 한 신문사들이여, '''기어이 당신들의 두 손에 다이애나의 피를 묻히게 되었구나!''''라고 매우 격앙된 비난을 하였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6세 71일의 짧은 삶이었다.
도디의 사후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예드는 그의 아들과 다이애나의 죽음에 영국 왕실, 특히 다이애나의 시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그러나 왕실 사람들중 다이애나가 힘들때 위로해준 사람은 마운트배튼 공 밖에 없다고 하니... 참고로 알 파예드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지만, 영국과 유럽에서의 현지 평판이 원래 매우 나쁜 인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폭이 유력 기업을 소유한 꼴이었다. 그래서 다이애나가 알 파예드의 아들과 연인 의혹이 있다는 것에 더욱 왕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알 파예드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첫 결혼을 8개월 만에 끝낸 것으로 유명했고, 이미 모델 출신 약혼녀까지 둔 상태에서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그의 별장들을 순회할 때마다 각 지역의 모델들을 불러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아직도 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높은 수준의 프랑스의 응급치료가, 다이애나에겐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의 응급의료 시스템이 훈련된 구급대원을 사고 현장에 보내 이송 중 환자 상태의 악화 방지 혹은 지연을 목표로 피동적 대응을 한다면, 프랑스의 응급의료 시스템인 SAMU는 현장에 구급대원만이 아닌 '''의사를 동행'''시켜 악화 방지, 지연만이 아닌 환자 상태 파악, 진단과 그에 따른 조치 등 좀 더 적극적인 의료 대응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런 프랑스 의료 체계는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에서도 잘 나온다.
다이애나의 교통사고가 영국 왕실 & 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다른 의혹들은 영문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고하자.
그리고 다이애나비가 사망한 1997년 만들어진 '다이애나비 추모 기금'이 있으며 2013년 윌리엄 왕자 부부와 해리 왕자 부부가 함께 활동한 '왕립재단'에 불입되었으며 수년간 모금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유산이나 기부금을 통해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5. 전세계의 추모의 물결
다이애나의 갑작스런 사고사는 세계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명 한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공화주의자 계층'''에게서도 진심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러웠던, 한 여인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
'''독특하고 복잡하고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던 다이애나. '''
'''내적, 외적으로 모두 아름다웠던 그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찰스 스펜서,[32]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읽은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
다이애나의 인생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33] 하지만 이러한 왕실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영국 국민들의 대규모 분노를 불러왔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상실감에 휩싸여 있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고,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다.[34]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년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결혼생활과 죽음은 영국인들의 왕실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고,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왕실을 개편해 왕실지지율을 올린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어두운 과거'''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생전의 다이애나와 매우 절친했던 엘튼 존은 "내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보나마나 '다이애나와 사귄다'라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다."라고 황색 언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추모 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녀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약혼녀인 캐서린 미들턴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가 아버지 찰스가 어머니 다이애나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 반지였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 당일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성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36]
사고 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마이클 잭슨이 HIStory World Tour를 진행할 때 다이애나가 사망하자 그날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곧 진행된 투어를 다이애나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Heal the World"를 공연할 때 그녀의 사진을 3분 간 게시하였으며, 추모의 의미로 "Gone Too Soon"을 불렀다.
6. 가족관계
7. 대중매체
영국의 락 밴드 오아시스의 곡 'Falling Down'의 뮤직비디오는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영국 왕실에서 결혼으로 맺어진 왕가의 일원, 불륜, 그리고 결정타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찰스 왕세자'''까지 다이애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동생으로, 스캔들이 엄청났던 마거릿 공주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이애나가 오아시스 멤버들에게 경멸받을 만큼 먼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으며, 배우의 생김새도 마거릿 공주와 닮았다. 결정적으로 뮤직 비디오를 감독한 Wiz가 "윌리엄과 해리의 일종의 가상 남매로 마거릿 공주를 설정했다"고 밝혔다.기사[39] 결국 영국 왕실의 이면을 혼합한 것으로 보는게 옳을듯하다.
영국의 여배우 나오미 왓츠가 주연을 맡고, 몰락으로 유명한 독일의 히르슈비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다이애나>가 2013년 9월에 영국에서 개봉했다. 예고편. 그러나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 나오미 왓츠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첫 주 흥행은 겨우 62만 파운드에 그쳤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 영화 <더 퀸>은 개봉 첫 주에 250만 파운드를 넘게 벌었다. 한국에서는 2014년 3월 6일 개봉했다. 제목만 보고 가면 다이애나의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로 오해하기 쉬우나, 다이애나와 파키스탄 외과의사의 연애를 다룬 영화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디에 중점을 맞춰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름도 유명한 파예드는 영화 막판에 5분 정도밖에 안 나오며, 찰스 왕세자나 왕실의 주요 일원들은 등장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윌리엄과 해리는 딱 한 컷 얼굴은 보인다.
영드 스푹스 시즌 4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이 계획되었다는 설정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고, 사고가 맞았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으로 한 영화로 제작한다.#
2017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생전의 비공개 인터뷰와 영상들을 모아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다이애나 - 그녀 자신의 목소리>(Diana: In Her Own Words)를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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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를 그린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4에서 마침내 주연으로 첫 등장했다. 시즌 4에서 해당 배역은 엠마 코린(Emma Corrin)이 맡았으며, 향후 시즌 5~6에서는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맡을 예정이다. 현 영국 왕실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예고편과 스틸컷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시즌 4에서는 밝고 발랄한 모습의 소녀로 첫 등장한다. 카밀라와의 결혼에 실패한 찰스 왕세자가 '과거사가 깨끗하고 정숙한 여성'을 왕세자비 감으로 찾던 중 자신의 기준에 딱 맞고 명문가 귀족 출신이기까지 한 다이애나를 낙점해, 계속 찰스와 만남을 이어가다가 결국 그와 결혼한다. 처음에는 왕세자비가 되는 것과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응원에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폐쇄적이고 숨막히는 왕실에서의 생활, 여왕을 포함한 왕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40] , 찰스의 불륜과 열폭[41] 으로 인해 폭식과 거식증 증세가 반복되고 스트레스를 받아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동시에 외부인들에게는 엄청난 인기와 추앙을 받아왔다는 당시의 분위기도 같이 등장한다.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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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연방 왕국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83년에 찰스와 당시 갓난아기였던 윌리엄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찰스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던 어린 시절 때문에 아들들에 대한 애정이 강했는데, 왕자들이 자신보다 유모들과 더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왕실로 갓 시집와 어린 나이에 첫 아이이자 후계자 윌리엄을 낳았을 때에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던 다이애나 본인은 윌리엄만이 가장 소중했을 시기라[42] 아기였던 윌리엄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욱 좋아하자[43] 첫 번째 유모였던 바바라 팔핀을[44] 해고했다.[45]
- 마이클 잭슨과 친밀한 관계였다. 2명 모두 20세기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많은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의 아픔을 이해했다고 한다. 1988년, 마이클 잭슨은 Bad World Tour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콘서트 직전 다이애나와 찰스를 만나 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다이애나는 마이클 잭슨에게 그의 히트곡 "Dirty Diana"[46] 를 공연할 것인지 물었고, 잭슨은 그녀를 위해 당시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요."라고 말했고, 그 노래는 콘서트에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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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11월,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회동 및 만찬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남편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공개 석상에서조차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한게 바로 방한 1달 후. 청와대 영빈관 만찬 영상을 보면 찰스가 환영 만찬의 답사를 읽을 때 다이애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나마 최대한 신경써서 편집한 대한뉴스 영상에서조차도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한다.[47] 다시 말해 당시의 대한민국 방문은 찰스, 다이애나 두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공무를 수행한 마지막이었던 셈이고, 때문에 지금까지도 둘의 비극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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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은 북한과 관련된 우표는 하나도 만들지 않았지만, 북한에서는 기념우표를 만들었다. 북한이 외화를 벌기 위해 기념우표를 남발하여 수출하는 케이스 중 하나이다.[48] 실제로 이 우표들은 북한으로 역수입되어 유통되지 못하게 소인이 찍혀 있다.
- 2011년 7월 1일, 살아 있었다면 50세가 되었을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뉴스위크지가 그녀의 50세 모습을 CG로 합성해 고인드립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저 표지가 실린 뉴스위크지에는 "다이애나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어땠을까"를 다룬 가상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적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트위터 팔로워를 1천만명 이상 거느리며,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젊은 며느리의 등장으로 다이애나의 위치가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고, 도디 알파예드와 이혼한 뒤에는 뉴욕에서 거주하며 각종 자선사업의 후원자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할 것' 등이었다.
- 신장이 178cm인데, 서양 여성임을 감안해도 키가 상당히 크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발레에 소질이 있었지만, 키가 너무 커서 계속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 올라와 있는 테레사 수녀와 같이 찍은 사진만 보아도, 다이애나가 얼마나 키가 큰지 알 수 있다. 생전에 방일했을 때 나루히토 천황과 같이 찍힌 사진에서도 그보다 훨씬 더 컸다.[49] 다이애나가 장신인 덕분에 그녀 소생인 윌리엄 왕자, 해리 왕자 모두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으로 자랐다. 심지어 찰스 왕세자는 결혼 기간 내내 다이애나가 자신보다 키가 커 보일까봐 같이 다닐 때 아내가 하이힐을 신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한다.[50]
- 큰 키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답게 패션센스도 평균이상으로 갖췄는데, 항상 다리 뒤쪽으로 봉제선이 있는 팬티스타킹 중에서도 발 뒷꿈치에 장식이 달린 원 포인트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비록 이혼했으나 한때 영국 왕실의 구성원이었고, 유행을 만드는 패션센스로 인해 언제나 파파라치들의 중요한 도촬대상이었다.
- 2015년 5월 2일, 윌리엄 왕자와 캐서린 미들턴의 둘째(장녀)인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가 태어났다. 샬럿과 엘리자베스는 왕실 가족들의 이름에 자주 등장해 할아버지 이름의 여성형 또는 조지 4세의 왕비의 이름(샬럿), 증조할머니 또는 고조할머니 또는 외할머니(캐롤 엘리자베스 미들턴)의 이름이나 어머니(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의 이름(엘리자베스)을 붙였다는 해석이 분분했지만, 다이애나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샬럿 공주의 할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 뿐이다.[51] 윌리엄이 "딸을 낳으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다이애나라 짓겠다"고 평소에 말하고 다녔던 것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엘리자베스 2세가 건재한데다가, 찰스와 재혼한 카밀라도 있으니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퍼스트 네임으로는 쓸 수 없기에, 미들네임으로 넣은 듯하다.
-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애너그램이 있다. Princess Diana(다이애나 비) → End is a car spin(끝은 교통사고). 원래 이런 식의 애너그램은 짜 맞추기이므로 그냥 재미로만 보자.
- 미국의 인터넷 예언가 솔로그(sollog)는 자신이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주장했다가 전세계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지만, 기록으로 인해 사실로 드러남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 엘튼 존의 절친이라는 사실 때문에 게이 커뮤니티에서 환영받는 인사 중 하나다. 특히 에이즈 발견 초기에 환자와 의료진들과 장갑도 끼지 않고 악수한 일화와 사진이 유명하다. 당시에는 의사들도 에이즈 환자는 진찰하지 않겠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을 정도로 에이즈는 꺼려지는 병이었으나 다이애나의 활동으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이 알려지자 수많은 게이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에서도 작중에서 게이인 캐머론 터커가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을 접했을 때라고."하며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2017년에 서거 20주기를 맞아 런던 켄싱턴 궁전에 다이애나 비의 모습을 새긴 영구적인 동상이 세워졌다.# 2020년에는 생전에 즐겨 입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검은 양' 문양의 스웨터가 26년 만에 재출시됐다.#
- 윌리엄의 세 아이 중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만이 다이애나를 많이 닮았다. 다이애나의 조카인 키티 스펜서(남동생 찰스 스펜서의 딸)의 어린 시절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머지 두 아이는 모두 외가 미들턴 쪽과 비슷하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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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위의 사진처럼 평소답지 않게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던데다가 중간에 졸기까지 해서, 사람들이 혹시나 했는데 바로 다음날에 첫 아이 임신 사실을 발표했다.[26] 이후 찰스 왕세자와의 별다른 접촉이나 충돌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찰스 왕세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에 참가했지만, 속마음은 어땠을지...[27] 18년 현재가치로 따져도 260억에 달하는 돈. 28년 전이니 그 가치는 배 이상이다.[28] 해당 인터뷰는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92년에 촬영된 것이다.[29] 물론 왕세자의 아들인 왕자들이라 팀을 이룰 정도로 많은 유모들이 있었다. 다만 다이애나 본인이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시절 때문에 유모들이 자신보다 아이들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시집 와 외롭게 지내다 어린나이에 낳은 윌리엄 왕자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서 아기였던 윌리엄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욱 좋아해 그 유모를 해고하고 새로운 유모를 들였을 정도.[30]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31] 이혼하기 전에는 이 깃발을 썼으나 이혼 후에는 이 깃발을 쓴다. 관에도 덮어진 깃발이 바로 이것.[32] 다이애나의 남동생. 현 제9대 스펜서 백작이다.[33]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 맞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 1위인 왕세자가 왕세자비와 이혼한 사실도 흔한 상황이 아니지만, 이혼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왕가에서 그동안의 전례도 없고, 예법도 없는 상황에서 장례를 치뤄야 했다. 여러가지로 예법상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운구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 등은, 아직도 예법에서 어긋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민 정서상, '''예법대로 했다면 현재 영국엔 왕실이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34]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더 퀸>'''이다.[35]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이 사그라 든 것도 있지만 영국 왕실에서도 자신들의 씀씀이를 대폭 줄이는 등 지지를 회복하게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물론 지금도 "태생 잘 태어나서 세금 처먹는다"는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찰스 왕세자의 불륜녀인 카밀라 파커 볼스도 자신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흠잡히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그래도 아직도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마녀"라며 찰스와 함께 왕실에서 제일 인기가 없으며, 심지어 찰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을 정도이며, 영국 정보부의 암살 의혹조차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다.[36] 새찬송가 377장, Cwm Rhondda로도 알려져 있는 웨일스 민요가 원본이다.[37] 케임브리지의 공자 조지, 케임브리지의 공녀 샬럿, 케임브리지의 공자 루이[38] 아치 마운트배튼윈저[39] Director Wiz told NME.COM that the lead actress in the video is playing the role of “a contemporary Princess Margaret – a sister of William and Harry maybe”.[40] 그나마 찰스 왕세자의 이모인 마거릿 공주만이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결혼생활 때문에 다이애나의 결혼이 비극으로 전개될 것임을 눈치채고 경고하지만, 왕대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누이인 앤 공주는 다이애나의 인기를 시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다이애나의 탓을 하며 역정을 내는 것은 덤. 웃긴 점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남편 조지 6세가 어마어마한 애처가여서 두 사람 다 서로 죽고 못 살았을 정도였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딱히 불행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필립 공의 염문설 때문에 마음고생은 했어도 아들처럼 결혼생활 내내 그런것도 아닌데다, 필립 공 쪽에서 대놓고 외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가 전혀 아니였기 때문에 두 모녀가 다이애나를 질책할 입장이 전혀 아니였다.[41]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두 사람의 커플 팔찌를 결혼 '''3일전'''에 주문해서 다이애나의 속을 박박 긁고 결혼 후에도 수시로 카밀라가 사는 곳으로 방문한다. 거기에 자기 자신이 6주간 해외 순방을 할 때는 단 한번도 연락을 안하면서, 정작 호주 순방 중에는 다이애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불만을 불륜녀인 카밀라에게 열심히 알린다. 그래도 이 순방 중에 다이애나와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사이가 잠시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호주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누리자 찰스가 "그분도 좋아요. 다이애나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럴 이유가 있겠죠."라고 말하며 주인공이어야 할 자신이 부속으로 취급받는 것에 열폭해 다시 냉랭해진다.[42] 왕세자비가 되기 전에도 유치원 보모를 자처했을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자신의 아이를 낳았으니 윌리엄이 얼마나 예뻤을지는.. 더군다나 결혼 1년만에 대를 이을 왕세손을 생산함으로써 다이애나의 입지가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후계자로써도 소중한 아이였을 거다.[43] 일어나자마자 엉금엉금 기어가 유모의 침대로 파고들었을 정도라고 한다.[44] 어린 나이에 임신한 다이애나를 안쓰럽게 여긴 시이모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직접 골라 추천해준 인물이다.[45] 윌리엄이 성인이 된 후로도 서로 다시 만남을 가진 적은 없다.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를 왕자의 유모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무례한 처사였다.[46] 이 곡에서 Diana는 그루피를 지칭하며, 이름이 다이애나인 왕세자비에게 결례를 끼칠 가능성을 고려하여 당시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된 곡이었다.[47] 다만 영국 대사관에서의 일정을 다룬 53초 지점부터 보면 환영 나온 여자아이로부터 꽃다발을 받을 때는 밝은 미소로 손을 꼭 잡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영국군 참전 기념비 방문 일정을 다룬 1분 21초부터 봤을 때 역시 환영 나온 아이들을 보며 모처럼 미소를 짓는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아이들을 각별히 좋아하는지라, 찰스 왕세자와의 불편한 일정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48] 북한은 심지어 대만을 넘어 동아시아의 유명한 가수였던 등려군의 추모 우표까지 만들었다.[49] 나루히토 천황은 키가 작은 편이다. 배우자인 마사코 황후보다도 작다.[50] 찰스 왕세자도 키가 178cm이다.[51] 게다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가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할머니인 다이애나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의 세 자녀 중 샬럿만이 유일하게 다이애나를 닮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