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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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제7대 군주. 조나라의 제2대 왕이자, 조씨종주(趙氏宗主)로서는 제16대 종주.
북방 유목민의 복식과 기마전술을 도입하여 조나라의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킨 조무령왕의 아들이다. 재미있게도 아버지인 무령왕이 생전에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주보(主父)가 되면서 그 아들인 혜문왕이 조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무령왕은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 또한 자신의 뜻대로 주물렀다. 이 때문에 혜문왕은 한동안 아버지에게 밀려나 허수아비 군주 신세가 되어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구정변을 일으켜 형과 아버지를 모두 죽인 후에야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비록 군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권력투쟁으로 가족 간에 상잔을 벌이는 비극을 초래했으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안목과 결단력으로 조나라의 국력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혜문왕의 치세 동안에 조나라는 평원군, 인상여, 염파, 조사 등을 비롯한 유능한 정치가 및 장군들의 활약에 힘입어 전성기를 누렸고 전국칠웅 가운데 최강자였던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할 수 있었다.
2. 즉위 후에 일어난 사건.
2.1. 주보 섭정기
조혜문왕 원년(기원전 298년), 조무령왕은 스스로 물러났지만, 조혜문왕이 아직 어렸으므로 주보(主父)로서 섭정했다.[1] 바로 이때 조무령왕은 사신을 자칭하며, 진(秦)나라에 가서 진소양왕(秦昭襄王)에게 사신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진나라를 정찰했다.
조혜문왕 2년(기원전 297년), 주보가 누번왕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조혜문왕 3년(기원전 296년), 주보가 중산국을 멸했다.[2]
조혜문왕 4년(기원전 295년), 주보가 이태의 말을 듣지 않고 원래 장자의 신분으로 태자에 봉해졌다가 폐위당한 공자 장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공자 장은 그것을 믿고 전불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비의를 죽였으나 결국 패하여 주보 무령왕의 사구궁에 달아났다. 이에 공자 성은 이태를 파견해 사구궁을 포위하니 무령왕은 굶어 죽었고, 공자 장과 대신 전불례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공자 성이 상국이 되고, 이태가 사구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2.2.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치다
조혜문왕 5년(기원전 294년), 막 땅과 역 땅을 연나라에게 주었다.
조혜문왕 8년(기원전 291년), 남행당에 성을 쌓았다.
조혜문왕 9년(기원전 290년), 조량(趙梁)이 제나라와 연합해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노관에 이르렀다.
조혜문왕 11년(기원전 288년), 동숙(董叔)이 위(魏)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가 경양을 빼앗았다.
조혜문왕 12년(기원전 287년), 조나라는 연나라, 한나라, 위나라, 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치니 진소양왕은 그 기세에 눌려 제호를 포기했다.[3] 조량이 제나라를 쳤다.
조혜문왕 13년(기원전 286년), 한서(韓徐)가 제나라를 쳤다.
조혜문왕 14년(기원전 285년), 연의 상국 악의가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영구를 빼앗았다. 그리고 악의는 제나라의 72개 성 중에 70개를 함락시켰다.[4] 다만 이 시점에서는 훗날의 이야기다. 이때 진나라에서 백기를 보내 3진의 인, 기 땅을 빼앗았다. 그 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칠때 염파가 대항해 진군을 격파했다.
조혜문왕 15년(기원전 284년), 연소왕을 만나 제나라를 치기로 해 그것을 들어주었다.
2.3. 인상여의 활약
조혜문왕 16년(기원전 283년), 제민왕이 제나라를 치지 말라해 결국 발을 뺐다. 그러나 다시 연소왕이 부탁하는 바람에 염파를 보내 제나라의 식양을 함락했다. 이때 진소양왕이 화씨벽과 진나라의 15개 성을 교환하자고 했으며 모두 진나라가 속임수를 쓰는 줄 알았으나 진나라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인상여만이 화씨벽을 이용해 진소양왕을 농락하고 화씨 벽을 빼앗기지 않았다.
조혜문왕 17년(기원전 282년), 진소양왕이 조나라의 성 2개를 함락시켰다.
조혜문왕 18년(기원전 281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석성을 빼앗았고, 조혜문왕은 위(衛)나라의 동양으로 가서 황하물로 위나라를 치니 장수가 넘쳤다. 진나라의 위염이 조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조혜문왕 19년(기원전 280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2개 성을 차지했다. 조나라가 백양을 위나라에게 돌려주었다. 조사가 제나라의 맥구를 쳐서 차지했다.
조혜문왕 20년(기원전 279년), 염파가 제나라를 쳤다. 진소양왕이 서하에서 조혜문왕을 불러 모욕을 주려 했으나 인상여의 활약으로 무산되었다.[5]
조혜문왕 21년(기원전 278년), 조나라가 장수의 물길을 바꾸어 무평 서쪽으로 흐르게 했다.[6]
조혜문왕 22년(기원전 277년), 조나라에 전염병이 유행했다. 조단을 태자로 삼았다.
조혜문왕 23년(기원전 276년), 누창이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기땅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 염파를 보내 함락시켰다.
조혜문왕 24년(기원전 275년), 염파가 위나라의 방자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성을 쌓고 돌아왔다. 그리고 안양도 함락했다.
조혜문왕 25년(기원전 274년), 조나라의 장수 연주(燕周)가 제나라의 창성과 고당을 함락했다.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쳤으나 백기는 조나라의 화양을 격파하고 장군 하나를 잡았다.
조혜문왕 26년(기원전 273년), 동호의 불모지를 취했다.
조혜문왕 27년(기원전 272년), 장수의 물길을 바꾸어 무평 남쪽으로 흐르게 했다. 조표를 평안군으로 봉했다. 황하에 홍수가 났다.
조혜문왕 28년(기원전 271년), 이때 인상여가 제나라를 쳐서 평읍에 이르렀다. 북쪽 구문에 성 쌓는 일을 중지했다.
조혜문왕 29년(기원전 270년), 진나라가 조나라와 한나라를 공격해 연여를 포위하자 조혜문왕은 조사에게 진나라를 쳐서 이겼다. 그리하여 조사는 마복군이 되었다.[7]
조혜문왕 33년(기원전 266년), 조혜문왕이 죽고 태자 단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효성왕이다.
[1] 가장 비슷한 사례가 일본의 조고(上皇)다.[2] 이때 완전히 멸망된 것이다.[3] 진소양왕이 제민왕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서제를 칭하고, 대왕은 동제를 칭하시오."라고 타협을 봤다가 그만둔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던 탓이다.[4] 사기에서는 제민왕의 자업자득이고, 죽서기년의 기록까지 포함하면 제선왕 대부터의 원한이 제민왕 대에 복수하게 된 것이다. [5] 이 일로 인해[6] 조조가 승상으로 있을 때까지의 식읍이다.[7] 그 호칭으로 인해 마씨가 생겨나고, 조사는 마원, 마등, 마초 등의 조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