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여
1. 소개
藺相如
(?~?)
전국시대의 조(趙)나라의 관료이자 장군
염파, 조사 등과 함께 조나라를 지탱하던 인물이며, '''세 치 혀로 최강 진나라를 처바른 희대의 변설가'''였다. 합종연횡으로 유명한 소진, 장의도 한 수 접을 전국시대 최고의 명외교관이자, 삼국지연의의 제갈량 뺨치는 설전의 대가이며, 진나라 입장에서는 악마가 따로 없는 '''공갈협박범.'''
조나라를 위해 활약하면서 숱한 업적을 남겼으며, 희대의 정복군주였던 진(秦)나라의 소양왕을 몇 번이나 농락한 일과 염파와의 문경지교[1] 의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옥에 티'를 뜻하는 하자(瑕疵)라는 단어도 인상여가 진왕에게 한 말에서 유래한 것. 마찬가지로 하자의 반댓말인 완벽(完璧)도 이 양반 때문에 나왔다.
2. 일대기
2.1. 식객시절
인상여는 조나라의 내시였던 무현(繆賢)의 식객이었다. 어느 날 무현은 시장에서 골동품으로 보인 한 상자를 구입했는데 그 상자 안에 큰 옥구슬이 있었다. 이 옥구슬은 밤이 되거나 어두운 데에 가면 빛을 내며 수십 보를 환히 비췄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정가를 불러보니 바로 행방이 묘연했던 화씨의 벽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이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 소식을 듣은 조왕은 무현에게 구슬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보여주면 화씨의 벽을 빼앗길 게 뻔해 무현은 화씨의 벽을 도난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들통이 나고 무현은 조왕의 처벌이 두려워 연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이에 인상여가 무현에게 물었다.
인상여가 대답했다.
무현이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화씨의 벽을 바치고 사죄하자 조왕은 다행히도 무현을 용서했고, 무현은 인상여의 용기와 지모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2.2. 화씨지벽
인상여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사건은 화씨지벽을 온전히 돌려받아온 사건이다. 당시 진나라 소양왕은 화씨지벽 소식을 듣고 조나라 혜문왕에게 화씨지벽과 진나라 성읍 열 다섯개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문제는 당시 소양왕은 초나라 회왕을 진나라로 초대했다가 억류하는 등 약속을 지킨다고 믿기는 어려운 인물이었고, 옥 하나를 대가로 성 15개를 순순히 준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소양왕의 제안을 거절하자니 당시 소양왕이 다스리는 진나라는 중국의 전국 7웅 가운데 최강의 강대국이었기에 함부로 진나라를 거스르면 조나라는 조나라대로 망하고 화씨벽까지 뺏길 상황이었다.[2] 갈팡질팡하던 조나라 조정은 결국 소양왕과 교섭하기 위해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했으나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무현이 예전에 뛰어난 지혜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인상여를 추천하자 조왕은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이에 조왕은 인상여를 특사로 삼아 화씨지벽을 맡겼다. 그리고 바야흐로 '''인상여의 공갈협박 전설이 막을 올렸다.'''
진나라로 간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여 화씨벽을 바쳤다. 그런데 화씨벽을 받은 소양왕은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좋아할 뿐 약속했던 15개 성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인상여는 소양왕이 성을 내주지 않고 화씨벽을 꿀꺽할 속셈임을 간파하고, 소양왕에서 "사실 '''화씨벽에도 작은 흠집이 있습니다'''(璧有瑕). 제가 어딘지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화씨벽을 슬쩍 건네받았다. 그리고 버럭 화를 내면서 기둥을 향해 화씨벽을 내던지려는 시늉을 하며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화씨벽을 깨부숴버리고 나도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겠다."'''한 뒤 "엄숙히 경고하건데 3일의 여유를 줄 터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생각하시오. 만일 조금이라도 말에 거짓이 있다면 옥을 박살내고 나 역시 머리를 박고 죽겠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화들짝 놀란 소양왕은 허둥지둥 사죄하며[3] 지도를 가리키면서 성 15개를 주겠다며 인상여를 달랬다. 물론 속셈은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였지만 '''그건 인상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상여는 화씨지벽은 천하의 보배인만큼 진나라로 보낼 때 조나라 왕이 5일간 목욕재계를 했으니 소양왕도 5일간 목욕재계를 해야 마땅하며 화씨지벽을 받을 때에도 풍악을 울리며 경건히 받으라고 제안한다. 소양왕은 이 제안에 따라 화씨지벽과 인상여를 숙소로 돌려보냈는데, 인상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화씨지벽을 은밀히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5일 후 소양왕에게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역대부터 진왕은 한 번도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어서 화씨벽은 일단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성 열다섯을 먼저 준다면 화씨벽을 내주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저는 대왕을 기만했으니 팽형에 처해달라."는 말까지 했다. 당연히 진나라 신하들은 격분해서 인상여의 목을 날려버리자고 아우성을 쳤고 소양왕도 분노에 미쳐 날뛰며 인상여를 죽이려 들었지만 재상이었던 범수가 간곡히 말렸다. "인상여는 목숨을 걸어 화씨벽을 지켜낸 인걸이니, 그를 죽이면 반드시 제후들의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어차피 화씨벽은 조나라로 돌아갔으니 인상여를 대접해 돌려보내고 성과 화씨벽을 바꾸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펄펄 뛰던 소양왕에게 이렇게 간신히 납득시키고 사흘밤낮 성대한 잔치를 벌여 인상여를 환송했다. 물론 인상여는 조나라로 돌아가자마자 입을 싹 씻었고 화씨벽 이야기는 유야무야되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완벽(完璧)의 유래로, 화씨벽을 완벽(完璧 완전한 옥)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서 생겼다. 이에 대해 명나라 시기의 명사였던 왕세정은 인상여완벽귀조론(藺相如完璧歸趙論)이라는 논평에서 그의 용기있고 올바른 처사를 칭송하였다.
2.3. 민지회담
굴욕감을 씹으며 분해 하던 소양왕은 진나라의 위세를 과시해 조나라의 기를 꺾어놓자는 속셈으로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한 후 얼마 뒤에 조나라에게 민지(澠池)라는 지역에서 회맹(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조왕은 과거 화씨지벽 사건과 소양왕이 즉위초에 비슷하게 초회왕을 회맹에 초대했다 억류해 죽여버린 전과 때문에 내심 거부하고 싶었지만 인상여와 염파의 조언으로 참석을 결정했다. 인상여가 조왕을 수행하는 한편, 조나라도 나름 대비책으로 염파는 국내에 남아서 태자를 보위하고[4] 조사가 5천 군사를 이끌고 조왕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혹은 염파가 국경까지 군대를 이끌고 조왕을 호위했다고도 한다.
-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당시에는 회담을 한답시고 다짜고짜 뒤통수를 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진 소양왕은 초나라 회왕을 초대했다가 억류해 진나라에서 객사시켜버린 전과가 있었고, 후대에 유방도 홍문연에서 회담하다 암살당할 뻔했다. 심지어 조나라 역시도 조양자가 대나라 군주를 초대했다가 때려죽인 뒤 대나라를 멸망시킨 사례가 있을 정도. 특이한 사례로 제환공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항복문서를 조인하고 있었는데 조말이라는 노나라 장수가 회담장에 난입해 환공을 죽이겠다고 난리치는 바람에 산통을 깬 적이 있었다.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기로 하고 간신히 자리를 모면한 환공은 다시 노나라를 초토화하겠다고 을러댔지만 재상 관중이 "지배자는 협박당해 맺은 약속이라도 지키는 법입니다."라고 조언하자[5] 꾹 참고 노나라와의 휴전협정을 준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환공의 명성이 천하에 퍼졌고 결국 환공이 첫 번째 춘추패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에 열받은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다가가서 "진 대왕의 노래와 분부(盆缶=물이 담긴 항아리를 북처럼 두드리는 옛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천하일품이라 하는데, 그 솜씨를 보여주셔서 주연의 흥을 돋워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물론 아쉬울 것 없는 소양왕은 왕 체면에 그런 짓은 못 한다면서 조왕을 조롱하고 뻗댔으나, 인상여가 술잔을 들고 진왕의 가까이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며 일갈했다.
한마디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널 찔러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것. 이에 화들짝 놀란 진나라 신하들이 인상여를 끌어내려 달려들자 인상여는 [7] 고함소리로 그들을 물리쳤고, 안색이 파랗게 질린 소양왕은 분부를 몇 번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제서야 인상여는 칼을 놓고 자리로 돌아가서 동석한 기록관에게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의 명을 받들어 분부를 두들기고 노래를 하였다'''라고 쓰게 해서 진왕을 조롱했다.
그러자 열뻗친 소양왕과 진나라 신하들이 '''조나라는 진왕의 장수를 비는 의미로 조나라 성 열다섯 개를 바쳐라'''라고 을러댔는데, 인상여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받으면 돌려주는 것이 예의라 하였으니, 진나라는 조왕의 장수를 축복하는 의미로 함양(咸陽)을 바쳐라'''며 받아쳤다. 함양은 진나라 수도로 인상여의 말인즉 진나라 전체를 통째로 조나라에 바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신하들은 물론 소양왕까지 데꿀멍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회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국 회담은 양국 간의 우호를 돈독히 한다는 상징적인 문구 몇 개에만 합의한 채 유야무야되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기를 꺾어 관광보내려던 진나라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망신만 톡톡히 당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말솜씨만으로 진나라를 버로우시킨 인상여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2.4. 문경지교
또한 인상여는 함께 조나라를 지탱했던 명장 염파와의 문경지교(刎頸之交)로도 유명하다.
민지회담에서 돌아온 조왕은 뛸듯이 기뻐하며 인상여를 최고 관직이었던 상방에 제수, 그 서열을 염파보다 위에 두었다. 그러나 그 조치에 조나라를 위해 무수한 전공을 세운 명장 염파는 인상여가 고작 말 몇마디 잘 해서 자신보다 위에 올랐다며 크게 분노했다. 때문에 사적,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인상여를 비방하고 다녔으며 인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창피를 주겠다고 별렀다.
인상여는 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길거리에서 염파를 만나면 피해 다녔고, 염파가 조회에 나오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는 더욱 기고만장했고, 염파가 부리는 몸종들까지 인상여의 몸종들을 우습게 여겼다. 결국 인상여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인상여가 그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염파는 크게 부끄러워하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걸머진 채로 인상여를 찾아가 앞마당에 엎드려 벌을 내려달라 빌었다. 이것이 고사성어 "부형청죄(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하다)"의 유래이다.
황급히 뛰어나온 인상여가 염파를 일으키자 염파는 눈물을 흘리며 "오늘부터 대인과 생사를 같이하는 결의형제를 맺어 비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의형제의 교분을 맺으니, 이것이 "목이라도 선뜻 내줄 돈독한 우정"이라는 고사성어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유래이다.
3. 평가
위의 일화만 보면 소양왕이 호구같지만, 실상은 무서운 기세로 진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막강한 패권군주였다. 훗날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종결한 것도 사실상 소양왕이 쌓아놓은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전 것이다. 진시황은 바로 소양왕의 증손자인데, 족보로는 멀어보이지만 실제 다음 왕들이 단명[8] 했기 때문에 소양왕 사후 '''5년 뒤'''에 진시황이 즉위했다. 결국 인상여는 그런 소양왕을 상대로 쓴맛을 보여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 애초에 문경지교 에피소드에서도 나와있듯, 조나라 사람들도 염파보다 소양왕을 더 무서워했다. 게다가 국력으로도 비교가 안 되는 상황에서 저런다는 건 보통 대담한 성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얼핏 보면 단순히 뻥카가 센 문관 타입으로 생각되겠지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를 해서 제나라를 공격한 경력도 가진 전천후 인물이다. 사기에서는 혜문왕 28년 기원전 271년 인상여(藺相如)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平邑)에 이르러 그 성의 북쪽의 구문(九門)에서 행군을 멈추고 큰 성을 쌓았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에 염파와 조사가 현역이었고, 화우의 진으로 명성을 떨친 제나라의 전단도 조나라에 망명해 장수로 활약하고 있던 시점에서 그 사람들을 제치고 직접 사령관을 맡은 걸로 봐서 군사적인 재능도 그들에 못지않게 출중하였던 듯 싶다.
이후 소양왕은 인상여가 있는 한 조나라를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조나라도 결국 장평대전에서 진나라한테 제대로 털렸다. 당시 조사는 죽고 인상여는 병환으로 위독한 상태였으나, 염파의 지구전으로 원정군이었던 진군은 철군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범수의 반간계로 염파는 경질되고 조사의 아들 조괄이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병중이었던 인상여는 경험없는 조괄에게 대장을 맡기지 말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조차 조사가 아들에 대해 남긴 유언을 들며 아들의 기용을 만류했으나 조왕은 듣지 않았다.[9]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장평대전으로 이어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전국시대에 보기 드문 지략가이자 명재상이며 변설가이자 충신인 인물이다. 낮은 신분임에도 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걸고 대담하게 적을 기만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공로로 출세하고 사사로운 다툼으로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피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나라에 간언을 하여 국가의 위기를 피하고자 노력했던 조나라 만고의 충신.
장의나 소진같은 변설가들이 이리저리 나라를 옮겨타고 다니거나, 범수와 이사 같은 재상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후 말기에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염파나 악의, 전단 등의 전략가들이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망명을 해서 경력에 오점을 찍은 것을 보면 그 시대에 보기 드물게 자신의 처신과 국가의 대계에 중심을 잘 잡고 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아니, 국가에 대한 충심까지 감안한다면 전국시대 최고의 인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염파에게 여러 차례 모독을 당했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나라의 국익을 생각해 이를 참고 분쟁을 피한 인품까지 겸했다. 이후 진솔하게 사과하고 반성하여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와 사죄하는 염파를 손수 일으키고 문경지교로서 의형제까지 맺었다. 국력이 훨씬 약했던 조나라가 진나라의 거침없는 동진을 여러 번 막아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찬가지로 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사마상여(전한의 문학자)는 인상여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위에 있는 일화과 재능으로 지력과 정치가 90대 초중반의 책사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10~11편에서 지력이 80대 중반으로 내려가서 위의 일화를 볼 때 너무 낮다는 평가도 있다. 유저들은 인상여를 포함하여 중국의 여러 고대무장들이 평가절하 당했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유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순유, 법정의 지력 94으로 상향되었다. 상성은 유비과 가깝다. 법이 개정되어 이름에는 두음법칙표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
- 삼국지 9 PS2에서는 "린상여"로 쳐야 등장한다. 38/47/92/93에 병법들은 교사,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다.
- 삼국지 10에서는 33/63/89/94/87 상업, 치안, 고무, 면박를 제외한 설전 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명사특기가 없는 고증 오류이자, 특급 난이도의 도적에게 일기토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를 안습해 보인다. 그리고 통솔이 33인데, 치안를 가지고 있는 게 개그이다. 내정이나, 후방태수로 일하게 하자.
- 삼국지 11에는 28/47/85/90/85에 병종적성이 C의 책사으로 등장하며 특기는 논객. 지력은 80대 중반인데 같은 고대무장인 장의보다는 지력이 낮지만 성격이 대담[10] 이라 쓸모가 많다. 간손미중 둘이나 불쌍하게 만드는 고대무장.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이 재미있는데, 친애무장은 등지이고 혐오무장은 마속이다. 친애무장이 등지인 것은 용기를 보인 외교사절이라는 점에서 친애무장으로 설정한 듯하고, 마속이 혐오무장인 것은 그가 끝내 중용하지 말라고 했던 조괄과 마속이 비슷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설정한 듯.
- 삼국지 12 PK에서도 등장한다. 화씨벽을 들고 소양왕을 협박하는 포스가 넘치는 일러스트를 들고나왔다. 능력은 통/무/지/정 66/39/94/95 병과는 창병 전법은 허유엄살. 염파와 문경지교의 일화가 있음에도 친애무장관계는 아니다. 그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이벤트로 나온다. 일러스트까지 준비가 되어있고, 이벤트 후에 염파과 인상여가 상호 친애무장으로 등록된다.
- 삼국지 13에서도 개근. 능력치는 66/39/94/95로 특별히 나쁜건 아닌데 중신특성은 화기생재, 병과 적성은 참담한 C/C/C. 그나마 특기는 농업2 / 문화3 / 설파7 / 교섭8 / 언변8 / 위풍5 / 신속3 설파용으로 써먹을 수는 있다. 전법은 귀모계. 전수특성은 교섭.
- 킹곤타의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는 병으로 죽어가는 충신으로 나온다. 장평에서의 염파가 조괄로 교체되자 이마를 찧으며 피를 흘리고, 피를 토하면서도 절대 불가를 주장했으나, 이미 조왕의 마음은 조괄에게 간 상황. 과거 회상에서 화씨의 벽을 번쩍 들은 모습이 나온다.
- 미월전에서는 마지막 편인 81화에 등장한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조나라로 빼돌리자 분노한 소양왕이 정말로 그를 삶아죽이려고 하는데, 인상여는 껄껄 웃으며 "오랜만에 뜨거운 목욕을 하게해주신 대왕께 감사드립니다."라며 놀려댔고, 내시들이 막 인상여를 가마에 넣으려던 순간, 미월이 등장하여 형을 멈추게하고 인상여를 "장의와 비견할 만한 훌륭한 인재."라며 극찬했다.
- 대진제국 3기인 굴기편 16, 17화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화씨벽 사건은 물론이고 민지의 회담까지 재연했다. 소양왕은 화씨벽을 빼돌린 인상여를 용서하고 바로 민지에서 회담을 개최한다. 인상여는 효성왕에게 상대부를 제수받아 회담에 동행했으며, 이를 탐탁치 않게 보는 염파의 모습도 등장. 민지 회담에서는 분부를 들고 소양왕을 치려고 했다. 이때 소양왕의 말이 "저번에는 화씨벽을 기둥에 박겠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항아리를 박겠다고 하는군. 알겠다. 쳐주지." 그리고 소양왕은 식사하던 젓가락으로 분부를 딱 한 번 가볍게 쳐 주었고, 인상여는 그 사실을 조나라 역사에 기록하게 한다.
4.1.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
작중에서는 과거 조나라의 삼대천의 일원으로 소개되며, 이미 세상을 뜬 고인인 탓에 같은 삼대천이자 의형제인 염파나 부하인 조아룡, 요운 회상신으로만 등장한다. 제일 처음에는 염파가 언급해 진나라의 육대장군이 자신의 최대의 적이자 최고의 벗들이라면 문경지교를 맺은 인상여는 자신의 형제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는 그냥 대사로만 등장.
그러다 드디어 업 공방에서 인상여의 부하였던 조아룡과 요운의 회상으로 과거의 모습이 잠깐이나마 등장하는데, 그 모습은 전날 염파와 짠 작전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등 역사처럼 임기응변에 강한 전술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즉흥적인 전술 때문에 미리 맞춰놓은 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어 염파의 사천왕인 개자방이 따지러 오자 '''"상관없다! 하지만 쫓아내라!"'''라며 내쫓고, 부하인 조아룡마저 웃으면서 "주군은 곤란한 분입니다." 라고 하자 '''"하하하, 나는 곤란하지 않으니 상관없다!"''' 라면서 호탕하게 웃는 등 상당히 유쾌하고 호쾌한 면모를 보여준다.[11][12]
이목의 평에 따르면 염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 위대한 대장군이며, 용과 지를 가진 대장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력은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고, 부족한 무를 담당했던게 수하의 인가십걸이라는 우수한 무장들이라고 나온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화룡칠사의 영황과 비슷한 유형의 장군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인가십걸이라는 부하들은 인상여가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자살하듯 전투에 몸을 던져 분사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여덟이 죽고 유이하게 살아남은 부하가 바로 조아룡과 요운이다. 이 둘은 인상여가 병으로 요절할 때 양옆에서 임종을 지켰는데, 인상여는 이들이 붉은 평원에서 싸우는 꿈을 꾸었다면서 이들에게 자신이 죽어도 따라서 분사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게 한다. 그리고 이 둘은 '''전설의 삼대천 인상여의 군세'''로서 업 공방에서 진나라를 막기 위해 전장에 나왔다가, 그곳이 바로 인상여가 예언한 주해평원임을 깨닫는다.[13]
그리고 요운은 지금의 진나라가 번성한 것은 자신의 주군인 인상여가 병으로 병사한 행운 덕분이라고 일갈한다. 이에 대한 신의 대답이 걸작인데, 잠꼬대는 자면서 하라며 오래 살아도 왕의 장군에게 죽었을 거라고 하자 당연히 요운은 흥분하지만, 스스로 이 말이 잠꼬대라 말하면서 전장에서 누가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다는 소리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답한다. 그런 소리 하러 온 거라면 이런 데 오는 게 아니라 집에서 썩어문드러지라는 말은 덤. 이는 과거에 매몰된 요운과 과거를 기반으로 삼더라도 과거에 구속되지 않은 채 현재를 살고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신의 차이가 드러난 대사이기도 하다. 요운도 그리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약속의 땅에 왔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 일축한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종종 앞날의 일을 꿈으로 꾸곤 했다고 한다.
과거 왕의와 대면한 적이 있는데 왕의의 군대가 추적하던 도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실패했다. 이 때 공개된 인상여의 모습을 보면 오래 못 살았다고 하지만 이미 중년이고 죽을 때 모습과 달리 생머리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면서 너희 왕 때문인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순수한 무리라고 평했다. 그 순수함 때문에 강하지만 그것만으로 닿을 수 없고,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왕의도 그건 알고 있었는지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때를 만드는 역할이 있는 것으로 사람은 고통, 슬픔, 기쁨 같은 것들을 이어나가는 생물이라고 말했다. 꽤 오래 전부터 중화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며 왕의에게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결국 원군이 오자 물러나며, 중화를 통일할 자들을 위해 무운을 빌자고 이야기한다.(597화)
병을 앓고 있던 당시 인상여는 중화는 전쟁에 지겨워져서 하나가 되기를 원해 오래전부터 기반을 다지고 있지만, 그건 절대로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때가 무르익는 순간은 오지만 거기서 실패하면 영원히 하나가 되는 일 없이 수많은 나라들이 싸우는 세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가능하면 자기 나라가 이루고 싶었지만 그 검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 있는 건지도 모른다면서 자신의 두 가신인 요운과 조아룡에게 두 가지를 전하는데, 한 가지는 그걸 쥔 상대가 있으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부딪쳐서 깨부수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검이 요운으로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한번 치켜든 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려쳐라'라는 조언을 남긴다. 즉 어중간하게 몇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죽게 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화통일의 전쟁을 시작했다면 어떠한 비극과 희생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어내라는 전언. 즉 인상여는 단순한 조나라의 장군이자 전략가가 아닌, 역사의 흐름과 통일과 분열이라는 세상의 이치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그의 유언은 요운을 통해 요운을 찌른 왕분과 그를 지원하러 온 신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상여의 이 요절 기믹은 실제 역사와 상당히 다른 것이, 인상여가 화씨지벽이 일로 소양왕을 물먹인 것은 대략 기원전 283년 정도의 일인데, 이후 인상여는 기원전 260년인 장평대전에서 위독한 와중에도 조괄의 임명을 결사반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인상여는 재상으로서만 최소 23년 이상을 활동했다는 것이고, 죽은 것도 진나라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장군인 백기[14] 와 몇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즉 인상여가 병으로 갑자기 요절해 공을 많이 세우지 못했다는 건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설정으로,[15] 오히려 이른 나이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갑자기 요절해 버린 것은 바로 같은 조나라의 명장인 조사의 이야기에 가깝다.[16] 아무래도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사와 인상여의 설정을 하나로 합친듯 보인다.
[1] 刎頸之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목을 자른다 해도 기꺼이 자르라고 할 정도의 우정.[2] 이 때 조나라도 조무령왕에서 조혜문왕으로 이어지는 리즈시절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조나라도 진나라에 비빌 수가 없었으니 진나라는 이미 나머지 육국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로 강국이었던 셈이다.[3]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약하다 한들 조나라도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왕호를 사용하는 대등한 국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인상여는 한 나라의 군주가 보낸 사신인데 그런 사신을 "그래! 전쟁이다!" 라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죽인 것이 아닌 왕 자신이 약속을 안 지킨 것에 빡쳐서 자살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나라망신이고 왕 자신의 체면을 심하게 구기는 일이다.[4] 이때 이야기가 참 간도 큰 것이, "거리를 재 보건데, 30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 넘어가면 태자님을 왕으로 모시고 진나라를 막겠습니다."(...) 혹시라도 볼모로 잡히거나 죽을 것까지 염두에 뒀다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이 회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5] 약속을 깨려면 자기가 공적으로 맺었던 약속을 깨야만 하는 이유를 자기 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때 "저건 협박받아서 맺은 계약이니까 무효임"이라고 솔직하게 밝혀 버리면, 듣는 입장에서는 "왕이라는 인간이 일반인 한 명한테 협박받은 걸 마음속에 그렇게 담아두고 있나...?" 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왕이 명령을 시켜서 행한 일이었다면 그래도 군주 대 군주의 일이 되어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6] 단 그렇다고 이 당시 조나라가 장평대전 이후의 조나라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 조혜문왕은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조무령왕과 더불어 조나라의 전성기의 군주였고, 조나라는 아직 리즈시절이었다. 단지 옆에 있는 이웃이 리즈시절을 타고 있는 자신보다 더 리즈시절을 타고있는 강대국이라서 문제지...[7] '일갈'이라고 할 때의 갈 자는 고함을 지른다는 의미를 담는 글자인 동시에 그 자체가 고함소리의 의성어이기도 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발음하면 주로 캇!이라는 외침소리가 된다. 한국어로 치면 콱~! 현대 중국어로 읽으면 허(4성)! 로 발음된다.[8] 전대 왕들이 3일, 3년 즉위하고는 죽었다. 물론 이게 74살을 산 소양왕이 당시에 무척 장수를 했기 때문인데 재위기간도 55년이나 된다.[9] 인상여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절대적인 신임을 보일법한 조 혜문왕은 이미 죽고, 위에 언급되었던 태자가 즉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상여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삼국지 11의 설전에는 분노 게이지가 있는데, 성격에 따라 분노시 효과가 달라진다. 대담의 경우는 3턴간 무적. 단 대갈, 무시 이 두 능력에는 막힌다.[11] 위의 문경지교 실화와는 별개로 이 작품 안에서 처음에 염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도 이런 행동 때문에 염파가 고생을 겪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12] 하지만 부하들은 이런 인상여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짓는 등 그들이 이 유쾌한 주군을 얼마나 앙모했는지를 보여준다.[13] 조아룡은 그저 인상여가 자신들의 분사를 막기 위해 한 소리였다고 생각했지만, 요운의 말로 이를 깨닫게 된다.[14] 작중에서도 육대장군의 필두라고 나온다.[15] 그래서 위에 인상여가 등장하는 다른 만화인 달인전에서는 장평대전 당시엔 이미 노인으로 나온다.[16] 작중 이 조사도 염파, 인상여와 함께 조나라 삼대천 중 하나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