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칠웅

 


전국칠웅의 위치.
1. 개요
2. 상세
3. 진(秦)
3.1. 전성기
3.2. 쇠퇴기
4. 초(楚)
4.1. 전성기
4.2. 쇠퇴기
5. 제(齊)
5.1. 전성기
5.2. 쇠퇴기
6. 연(燕)
6.1. 전성기
6.2. 쇠퇴기
7. 조(趙)
7.1. 전성기
7.2. 쇠퇴기
8. 위(魏)
8.1. 전성기
8.2. 쇠퇴기
9. 한(韓)
9.1. 전성기
9.2. 쇠퇴기
10.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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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에 진입하면서 세력을 굳힌 7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2. 상세


진(秦)나라, 초(楚)나라, 제(齊)나라, 연(燕)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등 이렇게 7개의 국가로 되어 있으며 이들 국가순은 최강국인 진나라를 기준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읽은 것이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에서 중국사를 배울 때 이 순서로 외우게 하는 것이 현재 정석으로 자리매김 해버렸을 정도. 아마 고등학교 세계사를 배운 학생이라면 이 순서가 별로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학시간에 주기원소 순서를 배우는 것처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순서다.
참고로 이 일곱 국가들이 주요 강대국이었을 뿐, 이외에도 중산(中山), (宋), (鄭) 등 다른 국가들이 있었다. 특히 송나라는 송강왕 시기에 타 약소국들을 멸하고, 전국칠웅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기원전 286년 제, 위, 초 연합군에 공격당해 멸망한다. 주나라 왕실도 더이상 관심을 못 받아서 그렇지 두 개로 쪼개진 채 전국시대까지 남아있었다. 흔히 보는 전국칠웅도는 한눈에 보기 좋게 이런 약소국들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에는 각 나라가 비등비등하게 다투었지만 특히 위나라가 강했다. 위문후 때가 전성기였고 그 후대는 왕을 칭할 정도가 되어 위혜왕이라고 불리나, 제나라에게 발리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다[1]
그 후에는 제나라가 강했는데, 손빈이 활약하던 제위왕과 그 아들인 제선왕 시대가 절정이었다. 서쪽의 진나라와 동제, 서제 칭호를 나누어갖자는 논의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대인 제민왕 시대에 연나라의 악의에게 발리면서 제나라의 국력도 기울었다.
진나라는 서쪽 맨 끝에 있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중원의 국가들보다 지형상으로도 유리한 점이 있었고 진효공과 상앙의 변법 이후 국력이 급상승하였다. 전국시대의 후반부는 계속 성장하는 진나라와 이를 견제하려는 다른 여섯 나라의 대결이 중심이다.
진나라 득세 이후 소진의 합종책이 어느 정도 먹혔으나 장의의 연횡책에 깨어졌다. 진 못지 않게 강했던 초나라는 장의의 농간에 초회왕이 진나라 포로가 되는 일이 있은 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항상 진나라의 밥이었다. 조나라는 조무령왕 시절에 군세가 강하였고 이후에도 인상여, 염파 등의 활약으로 잘 버틴 편이나 결국 진나라 백기에게 30만 대군이 떼죽음을 당한 장평대전 이후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상대적으로 평온하였으나 다른 나라들이 무너지자 버틸 수 없었다.
각 나라별로 전성기와 쇠퇴기를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진(秦)나라: 기원전 351년 ~ 기원전 221년
초(楚)나라: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12년
제(齊)나라: 기원전 347년 ~ 기원전 284년
연(燕)나라: 기원전 284년 ~ 기원전 279년
조(趙)나라: 기원전 307년 ~ 기원전 260년
위(魏)나라: 기원전 403년 ~ 기원전 342년
한(韓)나라: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41년

3. 진(秦)


본디 서주가 있던 곳에 자리한 나라로 지리상 중원과 멀고 서쪽의 서융과 투탁거리며 성장한 나라로 때문에 순장 풍습이 남아있는 등 중원 국가들에게는 반오랑캐 취급을 받던 나라였지만 진효공이후 중원 국가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칠웅의 반열에 오른다.

3.1. 전성기


진효공상앙을 중용한 이후부터 계속 전성기였으나, 진짜 전성기는 진소양왕 이후로 잡는 학자들이 많다. 장의의 연횡책이 성공하고 초회왕을 인질로 잡아두는 등 당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전무하다.

3.2. 쇠퇴기


상앙의 변법으로 줄곧 성장하여 쇠퇴기가 없었고,[2] 연합군을 조직하여 제나라를 2등 국가로 만든 진소양왕 때에는 이미 전국최강자가 되어 결국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시황 사후에는 빠르게 쇠락하며 최초의 통일국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통일한 지 20년도 안 되어 항우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이어진 시기가 그 유명한 초한지의 무대이다.

4. 초(楚)


전국칠웅 중에서 유일하게 한족 출신 국가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 초나라 자신은 주나라의 봉지를 받아 건국했다 주장하지만 여러 기록에서 초나라는 오랑캐마냥 취급을 받으며 어쨌거나 나머지 육국과는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 그 예시로 이미 초나라는 춘추시대 초인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이미 왕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시작된지 불과 40여년 후며 춘추오패의 첫번째인 제환공 시절로부터 무려 1세기 전의 일이다.[3]

4.1. 전성기


춘추시대부터 전통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하였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장강 중류부터 하류에 이르는 모든 땅을 지배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나라월나라에 이르는 땅을 병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을 때는 초도왕 시절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이때 재상이 다름아닌 오기(오자)였기 때문. 그러나 오기의 죽음과 함께 쇠퇴기가 찾아오는데, 오기와 초도왕이 시행했던 변법이 워낙에 급진적이었던 까닭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초도왕이 사망하자마자 오기를 살해했다.

4.2. 쇠퇴기


오기가 죽고 나서 바로 쇠퇴기에 돌입하게 되고,[4] 장의의 말재간에 놀아난 초회왕은 급기야 진나라에 끌려가 죽기 전에는 초나라 땅을 밟지 못하게 되는 처지에 이른다. 그의 시호인 회(懷)가 영(靈)보다 더 안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이 사건 이후,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춘신군 황헐이 개혁을 시도하지만 오기도 실패한 일을 황헐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초나라는 전국칠웅이 되고 칠웅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도 강하고 강한 축에 속하는 나라가 되기에는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아 좋았지만 진나라를 넘어서기에는 그 넓은 땅과 인구를 제대로 살릴만한 조건이 되지 못했다. 초도왕과 진효공, 오기와 상앙 초숙왕과 진혜문왕은 행적이 매우 비슷했지만 그 이후는 천차만별이라서 초나라는 모든 것이 원상회귀되고 귀족들의 세력도 남았지만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상앙과 오기는 둘 다 제거당하기는 했어도 상앙은 진혜문왕 자신이 나서서 제거한 반면 오기는 제거한 주체가 귀족들이라는 점도 초나라에서는 귀족의 위상이 진나라보다 더 높았고 그만큼 귀족을 제어하여 개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5]

5. 제(齊)


춘추오패의 첫번째 인물 제환공 시절부터 강했고 제환공 사후에는 포스가 좀 죽기는 했어도 초나라와 함께 춘추시대부터 전통적인 강호였으며 같은 전국칠웅인 연나라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비록 제환공의 강씨 제나라는 제태공에 의해 망했지만 제태공의 전씨 제나라도 이전처럼 강성했다.

5.1. 전성기


최고 전성기는 제위왕, 제선왕 때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 시대에는 손빈병법의 저자인 손빈이 병권을 맡아 위나라를 공략했고. 위의 대장군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 혜왕[6]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았다. 맹자가 찾아와 왕도를 권한 것도 제선왕의 시대이다.
강세는 제선왕의 아들인 제민왕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전국사군자 중에 수위로 꼽는 맹상군 전문이 활약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진나라가 개나 소나 쓰던 왕 칭호 대신 서제(西帝)와 동제(東帝)로 서로 칭하자고 제나라를 꼬실 정도였다. 또한 송나라를 멸망시켜 다른 나라와 나누어 갖고 연나라를 묵사발내기도 한다. 하지만...

5.2. 쇠퇴기


교만하고 난폭했던 제민왕이 결국 쇠퇴기를 이끌었다. 재위 기간 동안 초나라를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합종책으로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치기도 하는 등 국력을 떨쳤다. 하지만 맹상군을 시기해서 재상직에서 내려오게 하고 결국 두려워서 조나라로 도망가도록 만드는 등 내부적으로 악정을 펼쳤고, 대외적으로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천하를 상대로 혼자 어그로를 끌었다. 특히 송나라를 치면서 삼진의 힘을 빌렸음에도 송나라 땅을 나눠갖는 게 아까워 뒷통수를 쳤는데, 이 일은 외교적 고립을 가져왔다.
결국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5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침공했다.[7] 제는 거와 즉묵을 제외한 모든 영토가 제압당하면서 칠웅 중에서 제일 먼저로 제나라가 멸망당할 뻔 했다. 하지만 그 유명한 전단의 화우지계가 나오면서 수명을 연장했고, 이후에는 진나라가 세력을 넓혀 가는 와중에 동쪽 끝에 있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지냈다.
하지만 결국 제민왕 이후 2대 63년 만에 진시황에게 멸망했다.[8]

6. 연(燕)


연나라는 춘추시대 기록이 부실하다. 하지만 이웃나라인 제나라가 제환공과 그 이후로도 나름 잘나간 것에 비해 연나라는 장공 시절에는 산융족의 침공을 제나라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제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제나라에 비하면 약한 나라였다. 그나마 장공 시대 전에는 후작을 칭한 것을 보면 연나라도 춘추시대부터 어찌저찌 강해져서 전국칠웅의 반열에 오른듯

6.1. 전성기


연나라의 전성기는 연왕 자지가 죽은 이후에 연왕 쾌의 아들인 연소왕이 집권하고, 그 유명한 악의를 등용한 이후부터다. 연소왕은 악의를 참소하는 세자에게 되려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당시 진나라와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던 제나라를 멸망 일보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였고, 거기에 진개[9]고조선을 관광시켜 2천 리 가까이 되는 요동지역 일대를 확보했으며 동호도 굴복시켰다.

6.2. 쇠퇴기


연소왕이 죽은 이후에 악의가 참소당하고 제나라가 즉묵을 기점으로 다시 국토를 회복하면서 연나라는 아예 전국역사에 힘을 쓴 일이 전혀 없다. 그제서야 악의를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악의는 조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지어 장평대전 이후 쇠망 일보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를 공격했다가 되려 역관광당했다. 이후 그나마 비중있게 나오는 건 태자 단과 번오기, 형가가 중심이 되는 진왕 암살미수사건. 이때는 거의 진나라가 살짝 쳐도 망할 수 있는 약소국 취급. 물론 이 때는 연, 제 두 나라 뺀 다른 육국이 사실상 멸망한지라 당연하지만

7. 조(趙)


본디 조나라는 삼진 성립 당시에는 삼진 중에서 최약체였지만[10] 무령왕 시기에 이르러 왕호를 사용하고 강성해지게 된다.

7.1. 전성기


무령왕흉노의 일부를 토벌하고 장성을 쌓았으며 이 시기 조나라는 함곡관 옆 동네임에도 진나라와 전면전을 벌인 일이 없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중 하나가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 조승이고, 무령왕 사후 뒤를 이은 혜문왕도 집권 초기에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혜문왕 시절에는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뿐만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군인 염파,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들이 함께 있었다. 게다가 인재들의 수준도 대단하여 염파는 전국시대 당시 손꼽히는 명장이었고, 조사는 그 염파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다. 인상여는 진나라 역대 최강의 군주 소양왕과 그 신하들을 입으로 개관광을 보내며 기죽인 인재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진나라와 인접국이면서 전면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조나라-진나라 양측의 대군이 격돌했던 적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와의 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나라 영토에서 싸운 것이 아니다. 한나라의 영토였던 연여(혹은 알여)에서 싸운 것이라 조나라 본토에는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진나라에 대한 피해는 매우 적었다.

7.2. 쇠퇴기


많은 사가들이 장평대전을 조나라의 멸망과 가장 많이 연관짓는데,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고대사를 통틀어서 하룻밤새 40만이 넘는 군사가 생매장으로 몰살된 사례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평대전이 발발한 시기는 조나라의 재상인 인상여가 병으로 재상에서 물러나고, 염파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마복군 조사는 아예 세상을 뜬 상태였다.
이런 쇠퇴기에 염파를 이어 조나라를 지켰던 이목이 진나라를 역관광보내면서[11] 조나라의 수호신이 되었지만, 조나라 최고의 간신이었던 곽개 때문에 이목은 허무하게 제거당했고,[12] 이목이 떠난 그 이듬해 조나라는 빛의 속도로 멸망했다. 그 잔존세력이 남아 조가가 '대' 지역에서 몇년간 더 명맥을 이어가고 조나라의 교훈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간신배에게 망하지는 않았으며 연나라와 연합해서 어찌저찌 싸워보려 했던 것 같은데 사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도 6년만에 멸망해 조나라는 정말로 멸망했다. 그래도 나머지 육국과 비교하면 초나라와 더불어 제법 끈질기게 맞서긴 했다.

8. 위(魏)



8.1. 전성기


특이하게 7웅 중에서 전성기가 왕호를 칭하기 전에 있었는데, 위문후 시절에 중산국을 점령했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당시에는 악의의 조상인 악양이 중산국을 점령함으로써 그 시기에는 제나라와도 비견할 정도. 또한 위문후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거물들이 즐비했는데, 예를 들면 사마는 오기, 재상은 이극, 사구[13]로는 서문표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인재보는 데 당대 일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책황이 있어서 위문후 시절이 가장 강성하였다고 봐도 좋다. 당장 책황이 추천한 인물이 병법의 달인 악양과 당대 먼치킨 오기이다.
위문후 이후 별다른 병화를 입지 않아 위혜왕 초기에 실질적인 국력은 가장 강했을 것이나...

8.2. 쇠퇴기


위무후 사후 그의 아들 위앵과 공중완이 임금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외국 군대까지 끌어오는 소동을 벌이면서 이미 조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결국 위앵이 군위를 이어받고 나서 왕호를 사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혜왕(혹은 양혜왕)이다. 일단 벌인 사업으로는 조,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도성을 옮기고, 맹자를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런데 상앙이 위나라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을뿐더러 그 상앙이 위나라의 상어 땅을 뺏아 버리고, 월형을 받은 손빈이 제나라로 가버리게 하고 제나라에 선빵을 후렸다가 그 손빈에게 마릉에서 대군이 전멸에 가깝게 관광당하는 등(마릉 전투)완전히 굴욕의 나날을 보내며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한다.
사실 위나라의 쇠퇴기는 위문후의 뒤를 이은 위무후가 오기를 견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만, 양혜왕 때는 가히 화룡점정급이라... 이후부터 위나라가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은 아예 없다.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땅셔틀화. 그나마도 위안희왕 시절에는 신릉군의 활약으로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조나라를 구원해주기라도 했는데 다음 대인 위경민왕 시절의 기록은 정말로 진나라에게 꼬박꼬박 땅바친 기록이 대다수다.
결국 위나라는 그나마 걸출했던 신릉군마저 안희왕에게 경질된 후 18년 뒤 망한다.

9. 한(韓)


전성기와 쇠퇴기가 뚜렷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 바꿔 말하면 대체 이 나라가 딱히 뭘 한 게 없다(...)[14]. 그나마 한애후 시절에 정나라를 정복한 게 전성기?
지리적인 위치가 안습이라[15] 옛 수도인 의양을 진나라에게 따이자 길이 막혀 나라가 세토막나고 급속한 좆망테크를 타게 되었다. 사실 지도에서 한나라 위치만 봐도 답이 없지만.
덕분에 사방이 적국이라 전국시대 후기 진나라와 싸우면 진나라에게 성을 바치고, 제나라와 전쟁하면 데꿀멍하는 게 이 나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토목공사로 진나라의 국력을 소진하기 위해 토목기사 정국을 보내 대운하를 건설하게 했지만 도중에 발각되어 진나라의 어그로를 끌어버렸고, 그럼에도 계속 건설된 운하는 도리어 진나라의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만들어주는 돌이킬 수 없는 삽질이란 결과로 되돌아오고 만다.
한때는 연나라보다 강성했고, 왕호 또한 빠르게 사용했으나 결국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이끈 역사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나라 꼴을 보다 못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저작이 그 유명한 한비자다.

9.1. 전성기


그래도 이 나라의 전성기를 뽑아보자면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었던 기원전 355년부터 기원전 341년까지로, 초나라와 위나라가 초도왕과 위문후의 사후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조, 연, 진이 아직 강성하기 이전 15년 동안 부흥해 진나라와 일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16]
신불해는 정나라의 천민이었지만, 기원전 375년에 정나라가 멸망하자, 한나라로 와서 재상이 되었으며, 법가 사상을 정비해 이후 한비자의 법가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그의 치세 동안 상공업과 문화가 발전해 소진이 100발 쇠뇌나 귀신 한나라 병사라고 말할 정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9.2. 쇠퇴기


기원전 341년 신불해가 죽자 가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사치하던 한소후는 브레이크 없이 계속 폭주하며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신불해가 죽은 지 2년만에 의양을 점령당했다.
뭐 그 이후에는 진나라의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 전국칠웅 중 가장 먼저 멸망한다. [17]

10. 대중매체에서



10.1. 킹덤


만화 킹덤의 배경은 전국칠웅의 패권 다툼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10.2.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PS3, 엑스박스 360버전,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로 '''등장했다.''' 다만 징기스칸 4처럼 전국칠웅의 유명한 일부 사람들만 나온다.[18] 진시황, 한무, 위앵, 웅의, 조옹, 전인제, 희평이 군주로 나온다(각각 진, 한, 위, 초, 조, 제, 연). 국가가 7개이라서인지 장수 배치가 영 웃기고 이상한데, 위나라는 군주의 성이 위씨라서 위연이 위나라 소속이고, 조운은 조씨라서 조나라 소속이고, 한현(!), 한호, 한충은 성씨가 한씨라서 한나라에 소속된 것은 좀 웃긴다(...).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고증을 살린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마등일족은 조나라 땅 업의 재야로 나온다. 그 이유는 마원조사의 후손이기 때문. 손오는 제나라 소속인데 손빈의 후손들[19]이라서 그렇다. 장막, 장익은 낙읍의 재야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한삼걸 장량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벤트까지 있으니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세력들이 모두 중원이나 하북 쪽에 몰려있는 것에 반해서, 진나라초나라는 남쪽에 위치한 익주 및 형주, 양주를 쉽게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1] 유명한 손빈방연의 일화나 맹자의 첫 구절인 맹자현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 유명하다.[2] 물론 암군이 안 나온 것도 한몫했다. 다른 육국은 암군이나 개혁하다가도 반동적인 왕이 나와서 나라가 약해지곤 했다. 이외에 함곡관의 존재로 우주방어가 가능했던 것이나 파촉 지역을 정복한 것도 큰 이점이었다.[3] 왕을 빨리 칭한다면 그만큼 강한 나라인거 아니야? 싶겠고 실제로도 오나라도 월나라도 나름 강해진 후에 왕호를 사용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춘추시대만 해도 주나라식 질서가 미약하게나마 살아 있어서 패자들도 심지어 초장왕을 제외한 춘추오패들조차 감히 왕을 칭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는 오히려 초나라가 주나라식 질서에 제대로 편입된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 예시로 오나라, 월나라도 오나라는 왕가만 주나라 국성이었지 나머지는 다 이민족 국가였고 월나라는 초나라와 비슷한 상황이었다.(역사적 기록에는 주나라에게 분봉받아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주류 민족은 비한족계라고 추정하고 있다.)[4] 물론 초위왕 시절에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마냥 쇠락만 한건 아니었다.[5] 오기가 아무리 새로 즉위한 초숙왕과 특권을 잃은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는 선왕인 초도왕이 임명한 신하, 제대로 정상적인 국가라면 초숙왕에게 '오기를 죽여야 합니다.' 라는 상소를 올릴 것이지(실제로도 상앙의 경우 진효공 사후 진의 원로세력 등이 상앙을 탄핵했고 이것이 상앙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병을 동원해 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는 결국 왕이 직접 임명한 신하를 귀족들이 작당하고 죽일 정도로 귀족들의 힘이 셌다는 의미다.[6] 훗날 위나라가 대량(大梁)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양으로 바꿨기 때문에 양 혜왕이라고도 한다. 맹자의 오십보 백보 고사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이 사람.[7] 염파, 백기 등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건 '''소설'''인 열국지의 얘기다.[8] 이 때 가장 큰 문제는 제왕 건으로 후승을 지나치게 총애했다.[9] 훗날 형가의 진시황 암살에 참여하게 되는 진무양이 이 사람의 손자가 된다.[10] 왜 최약체냐면 조양자 시절 지양자와의 전쟁에서 수도인 진양까지 공격당했는데 이 기간이 무려 3년, 반면 한, 위는 지씨의 강요로 조씨를 공격하다가 조양자의 설득에 조씨와 함께 지씨를 멸하고 지씨의 땅을 셋이서 갈라먹었기에 아무 피해없이 세력만 불렸으며 조나라의 초대 군주인 조열후가 조양자가 죽은 지 고작 17년 뒤에 즉위한 만큼 초기에는 조나라가 최약체일 수 밖에 없다.[11] 진나라의 첫 정복 대상은 조나라였는데 무려 4차례나 침공했는데도 '''그걸 다 물리치는 저력을 보여준다.''' 하다하다 안 되겠다 싶은 진나라도 방향을 잠시 바꿔서 한나라부터 멸망시킬 정도, 그나마 이 덕에 조나라의 멸망이 몇년 늦춰졌다.[12] 이목의 최후는 출처마다 다르다.[13] 현 기준으로 본다면 대법관이 이에 해당한다.[14] 애초 국력부터가 타국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면이 없어서 진나라 왕이 죽었을 때도 다른 나라들은 다들 대신이 와서 조문한 반면 한나라는 왕이 직접 조문을 왔을 정도다.[15]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딱 다른 나라들 중간에 위치해 있다. 말 그대로 '나 좀 침략해줍쇼' 라고 말하는 위치에 있던 것 게다가 제일 작으니 얻어맞기에도 딱 좋다.[16]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보면 진나라는 진효공 재위기로 당시 상앙의 변법으로 강성해져가고 있었고 초나라는 초선왕 재위기로 쇠퇴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강성한 편이라서 호가호위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초선왕이다. 제나라는 제위왕 시절로 당시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으며 연나라는 연후문공 시절로 대내외적으로 소진의 합종책 외엔 별 일 없었고 조나라는 성후와 숙후 시절로 성후 시절에는 수도가 함락당하고 숙후 시절에는 위, 제 두 국가와 투탁거리는 수준이었으며 위나라는 위혜왕 시절로 크게 국력약화가 심하진 않았지만 딱 기원전 341년에 마릉 전투에서 진나라에게 대패한다. 즉 진과 제는 강해지고 조와 연은 별달리 대단한 일 없이 지내고 초는 좀 강함을 유지하고 위는 약해지던 시기였다.[17] 그나마 한나라는 진나라가 천하통일의 첫 목표로 조나라를 꼽았고 몇 차례에 걸친 조나라 정벌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몇 년 정도 더 살 수 있었다.[18] 특히 풍환, 모수, 조사, '''상앙''' 같은 인물들은 '''나오지 못했다.'''[19] 다만 진수는 손오는 손빈의 후손들 것라고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