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
宗侃
? ~ 918년
1. 개요
태봉의 관리. 관등은 소판(蘇判)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젊을 적에 승려가 되었고 간특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궁예가 말년에 흉폭하고 잔인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 궁예의 신임을 믿고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더불어 간사를 떨고 아첨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많이 참소하여 해쳤다. 918년 6월에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자 은부와 함께 처형당했다고 전한다. 학자들은 은부와 함께 궁예가 주도한 전제 황권 강화를 도운 친위 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 대중 매체에서
2.1. 드라마 태조 왕건
궁예와 절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궁예의 책사로 왕건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온다.
2.2. 소설 전화앵
내생(영월) 출신으로 내생의 호족이자 신라의 교위인 송포의 아들로 나오며 호족 엄흡이 신라에 반기를 들자 아버지와 함께 엄흡에게 가담했다가 엄흡이 양길과 싸워서 패하자 완택산으로 달아나 승려가 되었다.
이후 궁예를 섬겼고 궁예의 명을 받아 국내 장수들이나 문신들을 은밀히 사찰하고 궁예의 정적을 제거했으며 김행도, 왕건, 홍술과 함께 경명왕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은부와 함께 한양의 호족 연등을 패배시키고 한장, 이흔암, 조원성 등이 연등의 목을 바치자 신하가 주군을 죽이는 일은 도리에 어긋난다면서 거절하고 그들이 물러나자 복병을 풀어 습격했다.
신라에서 현승이 반란을 일으키자 적철, 안관과 함께 태봉군의 군사를 이끌고 현승을 지원했다. 이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배현경에 붙잡혀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