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창작물에서
4.2. 만화 태조 왕건
4.3. 김성한의 소설 왕건


1. 개요


梁吉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 북원(원주)의 유력 호족. 한때 한반도 중부에서 큰 영역을 장악하고 궁예와 패권을 다퉜으나 비뇌성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몰락한다.

2. 생애


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시대 왕실의 부패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 국고가 텅 비게 되자 전국에 세금을 독촉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 반란군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양길은 5소경 중 하나로 당시 큰 도시였던 북원경을 기반으로 한 호족인데 세력이 컸는지 훗날 후고구려의 왕이 되는 궁예도 892년에 양길의 부하가 된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이 무진주를 차지하고 칭왕할 무렵인 892년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892년 이후에는 견훤과 양길 간에 별다른 기록이 없는 점과 활동 지역도 달라서(견훤은 무진주 일대, 양길의 경우 한주와 삭주 남부) 양길이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894년 양길은 궁예에게 큰 규모의 병력을 맡겨 지금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정벌하도록 했고 궁예는 기대에 부응해 연전연승을 거두며 급기야 명주까지 제압하고야 만다. 그 소식을 들은 왕건을 비롯해 지금의 개성시, 황해도, 평안도 쪽의 패서 호족이 잇따라 투항하면서 한반도 중부 지방을 거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자신의 힘으로 차지한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자립해 양길에 맞섰고 양길은 899년[1] 궁예와 비뇌성 전투에서 싸우나 대패하고 만다. 여기서 양길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900년 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 충주, 청주 등 양길의 본거지 일대를 일거에 정벌했고 이 때 남아있던 양길의 잔여 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공교롭게도 후삼국시대 군주들인 궁예, 견훤, 왕건과 모두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다만 왕건이 양길의 잔여 세력을 정벌할 시점에 살아있었는지는 불명. 궁예와의 전투 이후 양길과 그 세력은 몰락했지만 기록상 북원경을 비롯해 국원경 등 30여 성(또는 10여 성)을 차지하고 있던 강력한 호족이었다.

4. 창작물에서



4.1.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이치우[2]가 열연하였다. 초반의 주인공 격인 궁예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중간보스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성격이 단순하고 언월도를 휘두르는 저돌적인 맹장으로 나온다.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인지 제일 먼저 창업한 견훤이 귀부하라는 서신을 보냈을 때[3] 본인이 읽지 못하고, 부하 복지겸에게 건네주어 읽으라 시키기도.
궁예가 처음 수하로 들어올 때 복지겸이 몇 번이고 경계하라고 간언했지만 양길은 궁예를 믿었고, 결국 은부와 궁예에게 뒷통수를 맞는다. 은부의 계략으로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등 주력 장수들이 죄다 궁예의 손에 넘어갔고, 그 상태에서 궁예가 독립해버린 것. 인품이나 능력은 기훤보다 낫다는 판단 하에 궁예가 스스로 죽주성을 바치고 몸을 의탁한다.
은부의 평에 따르면 도량이 있는 척 하는 소인배에 의심병 환자며 욕심이 많다고 한다. 궁예가 양길을 찾아오기 전에도 그 성격적인 결함 때문에 여러 일을 그르쳤다고 하며, 그놈의 의심병 때문에 은부 역시 양길에게 학을 떼며 궁예에게 의탁하려 했을 정도. 차라리 의심병 때문에 일관적으로 조심성이라도 많았다면 모르겠으나, 정작 양길은 정말로 의심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말만 받아들이고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중에서 표현된 것만 봐도, 자기가 다룰 깜냥이 안된다는 걸 알 텐데 야심과 체면 때문에 궁예를 부하로 받아들여놓고는 궁예를 또 의심해서 자기 딸과 강제로 결혼시키는가 하면, 그러고도 신뢰가 가질 않는지 허튼 짓을 할까봐 석남사로 보내 약 1년 여간 간을 보는가 하면, 궁예가 합방을 하자 오히려 궁예를 의심하는 조언을 하는 복지겸에게 면박을 주더니, 그 큰 명주를 공략하라며 겨우 600명 주고, 또 막상 명주를 치려는 궁예를 의심해서 공격 직전에 불러오는 개짓거리[4]를 하는 등, 이중인격으로 보일 만한 트롤링이란 트롤링은 다 했다. 본인이 말하길 의심하는 것만이 난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한 바 있으나, 그것도 상대가 모르게 해야 효과가 있지 의뭉 떠는 재주가 없어 의심하는 중이라는 티를 팍팍 낸다... 쓸데없이 의심을 내보이거나 의심을 풀어서 수하 장졸들의 불신과 배신만 초래하고 말았다. 정작 의심을 해야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남을 믿는 태도를 보였는데, 명주성에 입성한 궁예가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는데도 정작 양길은 궁예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대왕에 등극하는 것만 망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장수로서의 능력이나 배포만큼은 충분히 갖춰진 것으로 묘사되며, 참수당할 때에는 '너에게 보낸 내 딸아이가 걱정되지만, 장수로 태어난 이상 죽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는 폭풍간지 유언을 날리며 죽음을 택한다. 궁예의 독립 이후 양길이 처음 선전 포고를 할 때도 궁예가 강비를 들인다는 소식에 '그나마 내 딸애를 데리고 있어서 미련은 남았는데' 새로 아내를 맞이한다는 말에 공격하기로 결심한 것. '''평소에는 찌질하기 그지없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은근히 간지가 사는 양극단의 캐릭터.'''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무력만큼은 굉장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작중 세계관 최강자로 다른 세계관 최강자급으로 취급되는 궁예나 견훤보다 위로 볼 여지도 있을 정도로 여타 무장들과는 격이 다른 전투력의 소유자이다.'''[5]
처음 궁예군과 싸울 때는 일기토를 벌여 신훤, 원회를 단칼에 베어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이흔암[6]은 몇합 주고 받다 팔을 베어 손쉽게 무력화시키고는 이를 돕기 위해 나온 환선길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퇴각하는 등 궁예의 휘하 장수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는다. 고려군은 왕건의 치밀한 작전 수립으로 이길수 밖에 없도록 완벽히 상황 조성을 해놓고 맞붙었음에도 순전히 양길의 용맹 하나에 수백의 군사와 두 장군을 잃는 피해를 입은건 덤. 더욱 놀라운 점은 작중 양길은 중년도 아닌,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인물이라는 것이다.[7] 환선길의 무력이 유금필과 동급인데, 유금필이 2부에서 먼치킨급으로 묘사되는 걸 보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그런 환선길을 무장 3명을 연달아 쓰러트린 시점에서 맞붙어 쫓아버렸으니, 견훤이나 궁예와 맞붙어도 패한다고 장담할 수 없고 오히려 위일지도 모른다.[8]
양길의 무력은 드라마 극본가 이환경 작 태조 왕건 소설에서 더 생생하게 알수 있는데 여기서도 스스로 늙었다고 하면서도 자타가 무력을 인정하고 궁예나 왕건 휘하에서도 양길군에 무서울것 없다면서도 양길만은 조심해야 한다며 경계를 한다.
실제 소설판 비뇌성 전투에선 양길 휘하 무장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다는데 설명에 비해 '''양길만은 마지막까지 혼자서 금대, 종희 등과 맞서 싸우고 거기에 유금필, 박술희, 능산(신숭겸)까지 끼어들어서 달려드는 압도적인 열세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가 결국 체력이 딸려 무기 하나 제대로 들 힘이 없어졌을 때서야 유금필의 공격에 졌다고 나온다.'''[9] 작중 설정한 양길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아마도 전성기 시절이였으면 이견 없는 최강이었을지 모른다.
작중 인물들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는데, 궁예는 양길을 처형하기 직전에 그를 보고 이 시대 제일의 용장이라고 평했으며 양길 사후 궁예가 순행을 하던 도중 북원에 이르자 은부와 양길에 대해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은부는 '하늘은 공평해서 양길은 무력은 뛰어나지만 무능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이걸 반대로 말하면 무력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했다는 것.
이런 양길과의 첫 번째 싸움은 왕건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궁예는 갓 스물을 넘긴데다 아직 대규모 병력을 다스려본 경험도 없는 왕건을 총사령관에 임명한다는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왕건은 노련한 노장처럼 병력들을 통솔했고, 아예 양길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처음부터 예상하여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궁예 측도 신훤과 원회가 전사하는 등 어느 정도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양길은 아직 애송이이던 왕건에게 대패하여 수천의 군사를 잃는 굴욕을 겪었으며, 이 전투 이후 왕건은 궁예의 의형제가 된다.
이후 양길은 영토도 줄어드는 등 쇠퇴하고 있었는데, 궁예로부터 남하를 명령받았던 왕건의 병력이 죽주에 이르자 이를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다. 다만 궁예가 왕건을 내려보냈던 것은 양길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직 혼란했던 당시에 이렇다 할 임자가 없이 공백지대로 남아있는 영토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양길을 죽이고 싶지 않던 궁예는 은부를 사자로 보내 화친을 제의하는 등 여러 차례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미 비분강개한 양길은 끝까지 적의를 보인다. 사실 양길이 화친이고 뭐고 필요없다는 태도로 나올 법한 게, 하필이면 궁예가 사자로 보낸 인물이 대놓고 양길의 통수를 친 은부였던 것. 다만 궁예는 '은부를 사자로 보내면 양길이 노발대발할 것이니 공격할 명분이 된다' 라는 생각이 아니라 워낙 일이 다급하니 곁에 있던 은부를 일단 보내고 본 것에 가까웠다.
두번째 전투에서는 궁예도 친히 전장에 나서는데, 궁예가 지휘하는 군대가 양길을 상대로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왕건은 양길의 퇴로를 차단하고 매복 중이던 양길의 둘째 사위도 죽인다. 결국 포위당한 양길은 끝까지 싸우다 생포당했고, 궁예는 양길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양길이 계속 자신을 죽이라고 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처형하는데, 죽기 직전에 네놈도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여기서는 양길에게 적어도 3명의 딸이 있고, 이들 중 두 명. 즉 첫째와 둘째 딸도 양길의 장수에게 시집을 보낸 모양. 그 가운데 둘째 사위는 바로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왕건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셋째 딸인 미향은 궁예가 양길에게 들어온 첫 날 바로 시집을 보냈으나, 궁예는 불가에서 자란 터라 여인 자체를 꺼려하는 성격이었기에 아내가 아니라 보살[10]로 대우했다. 결국 미향은 궁예에게 아내로 대접받지 못하면 죽겠다 하여 단 한 번 합방을 하고 궁예가 독립한 이후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명주의 절에 보내져 살아서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왕비가 된 강비와는 서로의 동질성을 느끼며 잘 지냈으나 비뇌성 전투 때 종간과 은부의 뒷공작에 죽을 뻔 하기도 했고, 이후 양길이 죽고 북원이 초토화된 이후 이곳 북원으로 순행을 온 궁예에게 분노하여 깽판을 쳤다.[11] 명주로 갔을 때 아들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아들의 환청을 듣는 등 정신이상을 보이다 결국 넘어진 촛불에 의해 숙소가 에 타면서 결국 죽게 된다.
이래저래 군주가 될 재목은 아닌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기훤과는 달리 심한 인간 말종이거나 폭군은 아니었던 관계로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옛 부하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주군을 배신하고 죽인 궁예를 증오하였고, 세상을 떠돌면서 복수할 기회를 노렸는데, 때마침 나주를 잃고 비분강개하던 수달에게 찾아가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여 받아들여지게 된다(62회). 이들은 최승우의 명을 받아 자객으로 파견되는데, 철원 공사장에서 독화살을 쏴 궁예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 성공하나 궁예가 다시 살아난데다 철퇴에 겁을 먹은 마지막 한 명[12]후백제와의 연관성을 털어놓으면서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데에도 실패했다[13].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궁예는 미치광이 폭군이 되어 나라를 좀먹었고, 그것으로 인해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간접적으로나마 복수에 성공하기는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양길의 부하들이 초기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궁예가 실제론 신라 황족 출신임을 알아내 이를 최승우에게 알려, 견훤이 이로 하여금 궁예 측 내부에 이간책을 쓰도록 조장하는 거대한 후폭풍을 낳았다. 이 때문에 궁예는 개인적 원한도 있고, 신라를 더욱 적대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야 했으며 신라에서 투항하는 자를 받지 않는 등 스스로 외교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궁예 역시 양길을 배신한 일이 못내 가슴에 남았는지 어떻게든 양길의 목숨만은 살려주고자 했으며, 훗날 독화살을 맞고 사경을 헤메던 중에 양길과 미향과 경문왕이 자신을 저승으로 데려가려 하는 악몽을 꾸었다. 양길이 군주가 될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궁예와 은부의 행동은 배은망덕에 명백한 배신이었기 때문.
배우 이치우는 당시 당뇨 합병증으로 폐렴과 심장 질환이 생겨 폐의 삼분의 일을 잘라냈고, 그 상태로 태조왕건의 양길 역을 맡아 열연했다. 결국은 양길 역 때문에 남한산성에 대기하던 도중 다시 피를 토한다. 그래도 끝까지 스케줄을 소화하고 양길 처형 장면까지 완료한 뒤 분당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그 때 다시 폐수술로 재절제를 하는 바람에 2007년 당시 그의 폐는 절반이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심근 경색까지 와 무릎 혈관을 이식하는 대수술까지 받았다고

4.2. 만화 태조 왕건


궁예와 일기토를 벌여서 패배한 후 깨끗하게 자살한다. 다른 어린이용 만화나 왕건 위인전에서도 궁예와 일기토를 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묘사가 은근히 자주 나온다. 아마 궁예의 무서움과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

4.3. 김성한의 소설 왕건


궁예의 스승인 허공 스님의 부탁 덕분에 궁예는 비교적 쉽게 양길 휘하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된다. 소설의 양길은 큰 비전도 없고 큰 공을 세운 궁예에게 그만한 상도 주지 않는 쩨쩨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각지에서 장군이라 칭하며 착취를 일쌈는 건달들이나 각종 인간쓰레기들과 달리 호인에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양길의 마지막 모습을 본 왕건은 그가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고 평했다.
비뇌성 전투 이후 왕건이 북원성에 쳐들어오자, 양길은 천운이 기울었는데 더이상 희생은 늘여선 안된다며 군대를 해산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선 자신은 동생을 비롯한 일가 몇몇과 함께 자결하고만다.
[1] 삼국사기 궁예전은 897년,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89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2] 개국에서 김용, 한명회에서 황보인, SBS 장희빈에서 묵재 허적, 왕과 비에서 윤사흔, 무인시대에서 현담윤, 명성황후에서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으로 출연한 성우배우이다. 하지만 소시적에는 이영후와 더불어 백범 김구 전문 배우로 유명했다. 2013년 12월 29일에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3] 견훤이 자신에게 비장(...)의 벼슬을 주겠다면서 귀부하라고 하자 쳐서 사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데, 재밌는 점은 불과 몇 화 전 자신이 기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기훤이 보인 반응과 똑같다는 것.[4] 이런 소환은 군 지휘에 악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볼 때 의심이 가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출정을 맡기면 안 된다. 관중이 용인술에 대해 말하기를, '''의심가면 기용하지 말 것이며, 기용했다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건 대놓고 배신을 부채질할 뿐이다.[5] 같은 감독이 적은 소설에서 이 격이 다른 무력이 더 두드러지는데 자세한 건 후술 참조.[6] 코믹한 인상의 캐릭터라서 입만 살아있는 놈(...)으로 보일 수 있는데, 양길은 물론 궁예의 휘하 지휘관이었을 때에도 환선길과 함께 필두맹장이었다. 궁예 사후 이흔암의 난이 묘사될 때 복지겸, 장수장과 두명을 한꺼번에 맞이하고도 막상막하로 겨룬 바 있다.[7] 양길 스스로 환갑을 넘겼다고 언급한다.[8] 작중 양길이 잡장들이나 장수들을 언월도로 벨 때마다 해당 장면을 양길의 기합과 함께 슬로우 모션으로 연출했다. 견훤, 유금필, 수달 등 다른 먼치킨급 맹장들은 일기토 등으로 화려한 무예를 연출한 것에 비해, 양길은 기껏해야 가로로 베는 모션 밖에 없는데 양길 역의 이치우씨가 연로한데다 당뇨 합병증으로 폐를 절제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복잡한 액션신을 소화하기 버거웠기 때문이었던 듯하다.[9] 심지어 금대, 종희 등이라고 한 걸 보면 삼형제가 끼어들기 전에도 이미 3명 이상이었다는 뜻이니 양길은 최소 6:1 이상으로 싸웠다는 것이 된다. 당연하지만 드라마, 소설 통틀어서 이만한 기행을 보인 인물은 없다. 견훤이나 궁예조차 이만한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10] 불교에서 여성 시주를 부르는 용어[11] 석총보다 앞서 궁예에게 '당신은 미륵이 아니라 나찰이다' 라고 비판한 인물이기도 하다.[12] 나중에 마의태자 역할을 맡은 이병욱이 연기했다.[13] 자신들이 왕건의 작은아버지인 왕평달의 수하라고 주장했다. 다만, 누명이 밝혀졌음에도 왕평달과 왕건의 두 사부는 패서의 호족들이나 병부령 복지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손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외딴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며, '다시는 뭍으로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궁예의 말마따나 다시는 출연이 없게 되었다. 실상 왕건이 가문의 지도자가 되고 유금필 등 측근진도 정립된 상황이라 선대인물들이 할일이 사라졌기에 자연스럽게 퇴장시키는 극중 장치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