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
1. 백제의 성
1.1. 개요
백제의 성채. 백제부흥운동 3년여 기간 중 대부분 기간 동안 전시 수도였다.
그 이름은 기록에 따라 주류성(周留城), 주류성(州柔城), 지라성(支羅城), 두율성(豆率城) 등이 있다. 음이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이름을 다르게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1.2. 역사
660년 7월 18일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의자왕이 항복하고 웅진과 사비가 함락, 백제가 멸망하자 옛 백제 땅 각지에서 백제를 부흥하기 위한 반란이 일어났다. 귀실복신, 도침이 주류성에서 일어나 중심을 형성했고, 백제 다른 왕족들이 당나라로 이미 끌려갔기 때문에 왜국에 요청해서 왜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보내달라 요청해 데려와서 대신 왕으로 추대했다. 백제부흥군의 전성기 때는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사비성을 포위, 또한 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 부흥군은 성 20여 개를 빼앗기고 만다. 이때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기자는 논란이 일어나 여기서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
,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 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3] 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663년) 2월에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백제의]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그러나 피성으로 천도한 직후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너무 위험해 결국 2달도 안 돼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은 후술할 백제군의 내분과도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2년(663) 봄 2월 (乙酉) 초하루: 병술 백제가 달솔(達率) 김수(金受)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4]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유(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타쿠츠(田來津)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햇수로는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 세력인 복신과 도침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복신이 부여풍마저 죽이려 하자 부여풍은 선수를 쳐서 복신을 살해하였다.
663년 8월 13일 신라군이 주류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음이 백제, 왜 연합군에게도 정보가 들어왔다. 8월 17일 주류성을 신라군이 포위했고 부여풍과 왜장들은 백촌강에서 집결해 싸웠지만(백강 전투)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했다. 9월 7일 결국 주류성이 함락당했다. 아직 임존성에 흑치상지 등이 지휘하는 백제부흥군이 남아있었지만 이들도 곧 항복해 백제부흥운동이 끝나게 된다.
1.3. 주류성의 위치
정설이 없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성(乾芝山城), 세종시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충남 홍성군의 학성산성(鶴城山城), 충남 청양군의 정산(定山) 등이 주류성의 후보로 꼽힌다.
2. 출판사
역사, 주로 한국사와 관련한 책을 내는 한국의 출판사이다.
이름과 달리 백제사 위주로 내는 것은 아니고 고대 한국사 전반, 고고학 서적 위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