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복신
1. 개요
복신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백제 말기의 부흥운동 지도자. '귀실복신(鬼室福信, きしつ ふくしん)'은 일본측 기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고 삼국사기 등 한국 사서에는 '복신'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도침 등과 함께 거병하여 왜에서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데려다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에 함께 거병한 도침과 불화가 발생해 도침을 죽이고 백제 부흥군의 전권을 독차지하는 등 내부에서 마찰을 일으켰다가 풍왕과의 관계도 나빠졌고 풍왕까지 죽이려다가[2] 오히려 본인이 풍왕에 의해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출생과 관련된 의문
백제 부흥 운동을 이해하려면 복신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백제본기에서 복신은 무왕(백제)의 조카로 써져있는데 앞서 무왕 시대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정작 구당서는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후자의 경우는 신당서의 백제전 기사를 전제한 것인데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은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후자인 의자왕 시대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왕의 조카 복신의 기록과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조합하여 전자의 신복과 후자의 복신이 다른 사람인데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복신을 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 제149'''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였다. 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였고 장수로 재직했던 데다 무왕의 조카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씨가 부여씨가 아니라 귀실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흑치상지의 흑치처럼 부여씨에서 분기되어 봉지에 따라 성을 취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년의 낮은 관등은 여전히 이해하기에 어렵다.[3]
만약 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여기기 어렵다면 되려 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복신이 부흥 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출신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2.2. 백제부흥운동에서의 활약
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4] 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나라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권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귀국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왜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백제 부흥 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백제 부흥군이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는데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복신과 호응한 것이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백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국왕이 된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2.3. 부여풍과의 충돌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5]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장남은 아니었는데 의자왕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부여융 혹은 부여효가 태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웅진성과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고, 이 전쟁과 관계없이 왜국에서 십수 년을 보내던 부여풍은 이제 부흥군의 입장에서는 마치 보험과 같이 얼마 안 남은 옹립 가능한 왕자가 되었다. 660년 10월 복신이 왜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 부여풍은 왜국의 협조로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되돌아왔는데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6]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의자왕 직계혈통 왕족인[7]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과연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일까?'''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원래는 태자도 아니라서 만약 백제에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왕위에서 거리가 멀었을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초기 부흥군을 이끌었다. 또한 복신도 이설이 있지만 기록상 백제 왕족의 분파고, 이게 맞다면 혈통적으로도 부여풍에는 딸리지만 최소한의 정당성은 존재한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 개, 실 500근, 포 1000단, 쌀 종자 3000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복신'과 '부여풍' 으로 구분을 짓고 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복신이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는 주류성에서 피성(避城)[8][9] 으로 이동하였다.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쳐들어와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남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2달만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0]
,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11] 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12] 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왜군의 장수가 반대하였다.
타쿠츠 등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복신과 왜군 장수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13] 그리고 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정도 확실해 보이는 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에게 2만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14] 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국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660년 11월 신라 칠중성을 공격했던 것과 달리 이 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당군의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2.4. 죽음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진다.[15] 부여풍이 왜군에게 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백제 토착 기반세력을 지닌 복신보다는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았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일부러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이로 인해 복신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풍운아 복신은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복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국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16]
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귀실복신이 죽고 두 달만에 백제 부흥군은 백강 전투로 궤멸당했고,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동맹국인 고구려로 도주했다. 9월에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고, 이어 지수신이 11월까지 버티며 지킨 임존성도 결국 함락당하면서과거 백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임존성을]
3. 기타
귀실복신의 아들이었던 귀실집사는 왜국으로 망명했는데, 시가 현에 그를 모시는 키시츠(귀실)신사(鬼室神社)가 남아 있다.
음력 3월에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은산별신굿놀이)에서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은산별신제의 유래 자체가 복신과 관련이 있는데, 은산면 일대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 마을 어른의 꿈에 나타나 "나는 백제를 지키다 죽은 장군이다. 지금의 역병을 내가 없애줄테니 나와 내 군사들의 뼈를 거두어 묻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말대로 오래 전에 죽은 장군과 병사들의 뼈를 수습해 묻어주자 역병이 그쳤고 이것이 은산별신제의 유래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