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틀기
1. 개요
고문의 한 종류.
2. 상세
주리를 트는 것을 보면 죄다 의자에 앉혀놓고 집행하는 것만 주로 보여지는데, 실제로 남아있는 사진이나 기록화들을 보면 오히려 맨 바닥에 앉혀놓고 집행한 예가 대부분이다.
양 다리를 묶은 뒤 다리 사이에 굵고 큰 막대기 주릿대 두 개를 끼우고 양쪽으로 비틀어 정강이를 비트는 고문. 원래는 전도주뢰라는 말이 정식 용어이다. 얼마나 아픈지 알고 싶다면 손가락 사이에 펜이든 뭐든 단단한 막대를 끼우고 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한 뒤 막대기를 마구 휘저어 보자. 막대 휘두른 시간의 제곱에 비례해서 손가락을 쓰지 못하게 된다. 물론 주리틀기는 이거랑 비슷한 느낌이면서 훨씬 아프다.
흔히 보는 다리가 일반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손가락을 비틀거나 봉 대신 줄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고문이다.
원래는 명나라에서 전래된 고문인데[1] 조선에 오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다. 명나라에서는 육각봉을 이용해 주리를 트는데 조선에서는 삼각봉으로 주리를 틀었던 것. 고통이 더 격심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위의 흑백사진에서 보이듯 실제로는 아무 막대기나 굵은 걸로 틀었던 모양이다. 구한말 외국인들 기록에서도 각진 봉을 사용한다는 언급은 없다.
흔히 형벌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로 나뉘어 주뢰, 압슬 등은 엄밀히 말하면 형벌이 아니다. 실질적으로도 판결이 난 뒤에 주뢰나 압슬을 행한 경우는 거의 없고 문초 시에 행하여 성토케 하는 고문 방법이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곤장과 함께 나오는 투톱(?)급으로 심심찮게 나오는 고문이기 때문에 세간에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뭔가 고문을 하여 실토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고문 받는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만 방송심의가 상당히 빡셌던 한국에서 사람을 마구 구타한다던가 인두로 지진다거나 깨진 기와장에 올려놓고 널뛰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나마 보여줄만한(?) 고문이어서 자주 등장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방송에서는 현실처럼 다리가 찢어지고 피가 솟구치는걸 안 보여주기 때문에 비슷하게나마 당해보기 전까지는 저게 왜 아픈지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나마 온건한 고문법이다. 그래서 방송 심의기준이 완화된 요즘 들어서는 인두로 지지는 등의 다양한(?) 고문법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에는 "모든 사실을 토설할때까지 형신[2] 을 멈추지 마라!"로 바뀌었다. 다만 원칙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멈추지 않으면 죄인이 그 이전에 죽기 십상이기 때문에 본래 규정에는 하루에 가할 수 있는 고문의 양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물론 비상식적인 공안정국이 조성될 때에는 이 규정이 무시 돼서 고문치사자가 속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선조, 인조 대의 옥사를 비롯한 몇몇 예[3] 에 한정된 것인데, 사극에서는 지나치게 남발되는 편이다.
너무 자주 나오는 탓에 그냥 조금 강도 높은 고문 정도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긴 한데 실제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근육은 물론이요 뼈까지 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이 어마어마한 것은 물론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당시의 의학 기술의 한계상 이 고문을 당하면 심할 경우 앉은뱅이 신세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 폐지할 때 이유 중 하나가 "절을 할 수 없어 조상의 제사도 모실 수 없으니..." 라는 것도 있을 정도였다.[4] 결국 영조 때 금지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폐지가 되어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암암리에 존재는 했다. 대표적인 예로 후술할 백범 김구의 예도 있고, 정조 시기의 인물 이가환이 천주교신자들을 강제 배교 내지 취조할 때 곤장과 주리를 병행했다고 황사영이 쓴 백서에 기록돼있다. 역설적인 것은 주리틀기를 부활시킨 이가환도 신유박해 당시 천주쟁이로 몰려 사망했다. 사실 이가환이 본래 천주교인이라는 의심을 받던 인물이라 의심을 벗기 위해서 더 가혹하게 천주교인을 고문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적 전향자가 옛 동료들을 더 혹독하게 대하는 경우는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도 사람이 병신이 될 정도에 의아할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지레의 원리다. 집행자가 잡고 있는 곳이 힘점, 한쪽 허벅지가 받침점, 다른 허벅지가 작용점. 양 허벅지는 모두 고정되어 있으니 어느 쪽을 받침점으로 잡아도 상관은 없다. 손잡이와 허벅지 사이 거리가 양 허벅지 사이보다 대략 5배 이상은 될 테니 그냥 단순 계산해봐도 집행자가 누르는 힘의 5배만큼의 힘이 허벅지에 걸리는 것. 게다가 교차시키기 때문에 받침점과 작용점에 걸리는 하중을 다 받을 수 있고 막대기 형태이므로 상대적으로 하중이 걸리는 면적이 좁아서(게다가 앞서 말했듯 국산은 삼각봉이다!) '''주리로 조여지는 부분에는 어마어마한 하중이 걸린다'''.
김구선생이 백범일기에 회상했던 묘사는 '''한번에''' 정강이 살이 '''버들피리처럼''' 쑥 밀려나갈 정도의 위력으로 노련한 집행인의 경우 절묘하게 뼈는 부러뜨리지 않은 채 정강이가 활처럼 휘게 만드는데서 그치지만 집행인이 미숙할 경우 '''다리뼈가 으스려져 살을 뚫고 피와 골수가 샘솟는'''(...) 일도 예사였다고.[5]
조선 말기 조선을 여행했던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남긴 기록에 주리틀기 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흔하게 알려진 상식과는 다르게 고문이 아닌 사형의 한 방법으로 썼다고 한다. 아손의 묘사에 따르면 '''주리틀기로 죄인의 양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통에 기절한 죄인이 깨어나면 주리틀기로 팔까지 부러뜨린 뒤 마지막으로 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고 한다. 본 항목 최상단의 흑백사진이 바로 당시 아손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남긴 사진이다.
사극에서 너무 남발되는 듯이 묘사한 고문이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는 불법고문이다. 조선 시대의 고문체계는 형문, 압슬, 낙형 3종류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며 그마저도 압슬, 낙형은 왕명이 있어야만 시행이 가능했다. 형문은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학도에게 당했던 것처럼 고문에 사용되는 매인 신장으로 정강이를 내려치는 형벌로 1차에 30회까지 집행했다.[6] 압슬은 바닥에 기와조각을 깔고 그 위에 죄인을 꿇어앉힌 후 널판지를 놓고 사람들이 올라타서 밟는 형벌인데 일본에서 시행된 무릎위에 석판을 올리는 고문인 이시다키(石抱き)와 혼동되어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낙형은 말 그대로 인두로 지지는 형벌이다. 이중에 압슬과 낙형은 영조 연간에 폐지되며 주리틀기는 어차피 불법 고문이었으나 다시 왕명으로 금지된다. 따라서 사극에서 아무리 역모사건에 대한 국문이라도 주리틀기가 남발되는 건 어디까지나 고증 오류이다.
다만 구한말 기록을 보면 나라가 막장화 된 여파인지 불법고문이고 뭐고 주리틀기가 남발되었다는 식의 기록이 많이 나온다. 김구 선생은 어디 시골 깡촌도 아닌 '''해주 감영''' 에서 주리틀기를 당했으며, 상솔된 아손 그렙스트의 기록은 아예 '''한성부 감옥'''에서 목격된 사건이다. 다른 곳도 아닌 나라의 수도 감옥에서, 그것도 주리틀기로 고문도 아닌 사람을 공개처형 하는 광경을 외국인이 뻔히 목격할 정도니 이쯤 되면 불법 고문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지경이다. 사실 형장도첩의 그림도 조선 후기의 것이고, 사진들도 당연히 한말의 것이니 이 시기에 불법적이고 가혹한 형벌이 남용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꽤 고대적부터 시행되어 왔으며 일제시대에도 고문용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어디선가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선생도 쓰치다 살해 사건 이후 해주 감영에서 받은 주리틀기로 인해 다리에 상처가 평생 남아있었다 한다.
사실 학교에서도 대걸레나 빗자루로 자주 시행되곤 한다... 고 하지만 대개는 주리틀기를 잘못 이해해서 혹은 일부러[7] 정강이가 아닌 허벅지에 하는 경우가 많다."형을 집행하라는 호령이 나자 사령들이 내 두 발과 두 무릎을 한데 찬찬히 동이고 다리사이에 붉은 몽둥이(朱杖) 두 개를 들이밀었다. 한 놈이 몽둥이 한 개씩을 잡고 좌우를 힘껏 누르니 단번에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내 왼다리 정강마루에 있는 큰 상처 자국이 바로 이때 생긴 것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 백범일지 103쪽, 돌베개, 1997
또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선생님들의 경우 펜을 돌리다 적발된 학생의 손가락에 펜대 두 개를 끼워서 손가락 주리를 틀기도 한다. 당하면 많이 붓는다.
원조였던 중국에서는 막대기를 교차시키는 방식 보다는 막대기 3개를 줄로 연결해서 그 사이에 죄인의 발목을 끼우고 조르는 협곤이라는 형벌을 주로 사용했다. 이때 막대기 사이에 톱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을 내서 조를때 고통을 더 가중시키기도 한다. 간혹 협곤은 남자에게 시행하고 여자에게는 손가락에 막대를 끼워 조르는 찰자를 시행한다고 하는데 찰자는 정식 형벌이 아니라 구중궁궐이나 기방에서 사적제재를 가할때나 사용했고 공식적인 심문때의 고문은 남자든 여자든 협곤을 시행했다. 일례로 남송 연간에 간통 혐의로 잡혀온 기녀 엄예도 고문을 당할때 발목을 조르는 협곤형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 한명회가 명나라 사절로 다녀오면서 배워왔다고 한다. 인두로 지지는 단근질도 이때 도입 되었는데 사극과는 달리 몸이 아닌 발바닥을 지졌다고 한다.[2] 또는 고신. 형신은 왕이 주로 쓰고 고신은 의금부 사람들이 쓴다. 동이에서 장희제 일당들이 훗날 경종이 되는 왕손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중국과 내통하는 수작을 부리다가 걸렸을 때 숙종의 대사와 서용보및 휘하 의금부원들의 대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3] 본래 역모 사건이라도 고문은 하루에 한 차례를 지키는게 원칙이었는데 재위 후반에 연달아 역모 및 자신에 대한 저주를 이유로 옥사를 펼쳤던 인조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나 진행해 고문치사자가 속출하기도 했다.[4] 당시 예법으로 절을 할수 없으면 제사를 못 지내기 때문에 상속 받을 수 없고 적장자라도 폐적 사유다. 병신=불효 개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5] 실제로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주리 틀기를 당하던 죄수의 다리가 부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뼈가 살을 뚫고 나오지는 않지만 뼈가 부러지는 "빠각!"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죄수가 혀를 빼물고 기절하는 장면이 상당히 섬뜩하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상태에서 물을 뿌려 깨운 다음 '''계속 주리를 튼다'''는 것. 조선시대에 들어온 고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주리가 뭐 대단한 창의성이 필요한 고문법도 아니고 고려사는 미시사 부분은 기록이 극히 소략하기 때문에 비슷한 고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6] 임용한 교수에 따르면 원래 신장을 때리는 법은 뼈가 상하지 않도록 허벅지를 내려치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형벌이 가혹해지고 불법화되면서 정강이를 치는 형태가 등장한다고.[7] 허벅지는 정강이보다 살이 많아 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