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우원

 


''' '''
'''睿宗 獻皇帝 | 예종 헌황제'''
'''묘호'''
'''예종(睿宗)'''
'''시호'''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검경문헌황제
(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儉敬文獻皇帝)
''''''
주(朱)
''''''
우원(祐杬)
'''생몰 기간'''
1476년 ~ 1519년
1. 개요
2. 생애
3. 추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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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추존 황제로, 제11대 황제인 가정제의 부친이자, 제8대 황제였던 헌종의 넷째 아들로, 제9대 황제인 효종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


주우원은 본래 헌종 성화제와 효혜황후 소씨(邵氏)[1]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주우원은 헌종에 의해 1487년 흥왕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주우원은 무종 정덕 14년(1519년)에 사망하여, 흥헌왕(興憲王)으로 추시되었다.

3. 추존 논쟁


주우원이 죽고 2년 뒤에, 제10대 황제였던 무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무종은 흥왕의 아들이었던 주후총에게 제위를 잇게 하였는데, 이가 바로 제11대 황제인 세종이 된다. 세종은 즉위 직후 추존 논쟁을 마주쳤는데 이것이 바로 '대례의 의' 논쟁이었다. 주우원의 추숭 논쟁이 주된 논쟁이었는데, 양정화를 비롯한 관료들은 효종을 양부로 모셔서 황고(皇考)로 칭하고, 친부인 흥헌왕을 황숙부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친아버지인 주우원을 황고로, 효종을 황백부로 칭해야 한다고 맞서며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세종의 의견이 관철되어, 주우원은 헌황제(獻皇帝)로 추존되었다. 주우원의 무덤은 현릉(顯陵)으로 칭해졌고, 세종에 의해 헌황제실록이 편찬된다. 주우원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양정화 등은 익왕의 차남인 주후현을 흥왕으로 책봉할 것을 논의했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고, 흥국(興國)이 단절되었다. 이후 주우원은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검경문헌황제(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儉敬文獻皇帝)로 추시되었고, 묘호는 예종(睿宗)으로 정해진다. 주우원의 부인인 흥왕태비 장씨(蔣氏)는 세종 재위기에 1538년까지 태후로 재위했으며, 사후 자효정순인경성일안천탄성헌황후(慈孝貞順仁敬誠一安天誕聖獻皇后)로 추시되었고 주우원의 무덤인 현릉에 합장되었다.
대례의 의는 명나라 이전 북송에서 벌어진 조윤양의 추존 논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차이점이라면, 조윤양의 추존 논쟁이 조윤양의 친아들이었던 영종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반면, 주우원의 추존 논쟁은 결국 세종의 의견이 관철되어 주우원이 황제로 추존된 점이었다. 대례의 의는 후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양상이 바로 조선의 제16대 국왕이었던 인조정원대원군 추존 논쟁과도 매우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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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22년. 본래 헌종의 귀비로, 세종에게는 할머니가 된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 수안태후의 존호를 받았고, 1522년에 사망하였다. 최종적인 시호는 효혜강숙온인의순협천우성황후(孝惠康肅溫仁懿順協天祐聖皇太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