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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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시대의 황족이자 5대 황제 영종의 부황이다. 자는 익지(益之).
2. 상세
태종 조광의의 아들인 상공정왕 조원분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윤양은 북송 시대에 관직이 동평장사에 이르고 여남군왕의 작위를 받다가 가우 4년(1059년)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태위, 중서령으로 추증되었고 복왕(濮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안의(安懿)였다.
당시 북송의 황제였던 인종은 슬하의 아들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서, 조윤양의 아들이었던 조종실을 양자로 들여 궁중에서 키웠는데, 조종실은 이후 조서로 개명하여 인종 사후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이 인물이 바로 5대 황제인 영종이었다.
조윤양은 황제로 추숭되었다가 다시 왕으로 추봉된 인물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3. 추존 논쟁
영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영종의 생부였던 조윤양에 대한 추존논쟁이 영종의 재위기에 전개되었다. 이 추존논쟁을 복의(濮議)라고 칭한다.
전술한 대로, 인종은 슬하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여, 인종의 숙부인 조원분의 손자이자 조윤양의 아들인 조종실을 양자로 데려다 키웠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종이 즉위할 때 영종은 자신의 친아버지인 조윤양을 추존하려고 했는데 그때 조윤양의 칭호에 대해 논쟁이 발생하였다. 우선 조윤양의 칭호를 놓고 전개된 논쟁은 이러하였다.
인종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사실상 조윤양이 영종의 친아버지이므로, 조윤양을 황고(皇考)로 불러야 한다.
황고파(한기, 구양수 등)의 주장
이러한 갑론을박이 영종의 재위기에 전개되었으며, 황고/황백 호칭 문제와 더불어 조윤양에 대한 황제 추숭 논쟁도 벌어졌다. 영종은 한기, 구양수 등 황고파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범순인, 여대방 등의 황백파 인물들은 좌천되었다. 다만 자성광헌황후의 조정에 따라 조윤양은 복안의황으로 추존되었고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는 받지 못하였다.당시의 황제였던 인종을 양부로 모셨기 때문에 인종을 황고로 하고, 조윤양을 황백(皇伯)으로 불러야 한다.
황백파(사마광, 여대방, 범순인 등)의 주장
이후 1067년에 영종이 짧은 재위기간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조윤양에 대한 추존 문제는 사실상 흐지부지되고 조윤양은 다시 복안의왕이 되었다.
조윤양의 추존 논쟁은 후대 명나라에서 벌어진 주우원에 대한 추존 논쟁[1] 과 양상이 비슷했다. 조윤양의 추존 논쟁은 영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되었지만, 대례의 의는 결국 당시 황제였던 세종의 의견이 관철되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후대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의 정원대원군 추숭 논쟁도 양상이 비슷했다.
4. 후손과 사복왕
조윤양에게는 인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조종실을 포함하여 28명의 아들이 있었다. 인종 사후 황제로 즉위한 영종은 본래 조윤양의 13남이었다. 조윤양의 황제 추존 논의가 영종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이후, 새롭게 즉위한 황제인 신종은 부황인 영종의 형제이자 자신의 숙부인 조종휘를 사복왕(嗣濮王)으로 진봉시켜, 복왕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후 조윤양의 후손들 중 대를 이을 인물을 뽑아 사복왕으로 봉작하였다.
영종, 신종, 철종, 휘종, 흠종, 그리고 남송의 초대 황제가 되는 고종까지의 황제들은 모두 조윤양의 후손들이다.
5. 둘러보기
[1] 대례의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