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1세
- 폴란드어: Zygmunt I Stary
- 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Senasis
생몰년도 1467년 1월 1일 ~ 1548년 4월 1일
제위년도 1507년 1월 24일~1548년 4월 1일
1. 개요
지그문트 1세는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 중 한 명으로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외국과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지그문트 1세는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 이를 능란하게 대처하였다.
2. 대외정책
150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모스크바 공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와중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스몰렌스크를 상실하였으나, 대부분의 영토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1521년 튜튼 기사단의 후신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 왕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선제 공격을 가한 후 완전 복속시켜, 1525년부로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 프로이센 공국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는 수도회를 해산하고 신민들과 함께 루터교회로 개종하였는데 이는 후대 프로이센의 전신이 된다. 또한 지그문트 1세는 오늘날에 바르샤바 일대에 해당하는 마조프셰 공국의 공작의 대가 끊기자 마조프셰 공국을 독일 기사단국을 대신하여 폴란드에 합병하였다.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트리며 판노니아 분지 일대를 장악한 시점이었다. 이미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전사하고, 헝가리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상황이라, 지그문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 직접 싸움은 피하는 정책을 폈다. 대신 오스만 제국의 위성 국가 크림 칸국과 동군연합 영토 내 우크라이나 코사크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계속 벌어졌다.
3. 내치
지그문트 1세는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출신 왕비와 결혼하였다.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토마토, 브로콜리, 아티초크, 강낭콩, 콜리플라워, 배추, 당근, 상추, 시금치 같은 여러 야채 종자를 폴란드 농촌에 보급해서 농가의 소득을 개선시킨 것은 물론 물론 이탈리아의 화가들을 크라쿠프로 데려와 폴란드 르네상스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그문트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는 했으나 정교회 및 루터교회, 유대교에 모두 관대하였다.
덕분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동부 영토는 평온을 누렸고, 코사크들이 몰다비아 공국의 침입을 자체적으로 격퇴하기도 하였으며 새로 편입된 바르샤바 일대의 유대인 상인들도 폴란드 왕국에 충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도시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을 펼치며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3국에 르네상스 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