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사단국

 


'''독일 기사단국'''
'''Deutschordensstaat'''
'''Staat des Deutschen Ordens'''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封臣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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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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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년 ~ 1525년'''
'''위치'''
발트 지역
'''수도'''
마리엔부르크[3](1230 ~ 1454) →
쾨니히스베르크(1454 ~ 1525)
'''정치체제'''
기사단
'''국가원수'''
기사단장(호흐마이스터)
'''언어'''
저지 독일어, 고대 프로이센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종족'''
프로이센 독일인, 발트계 프로이센인, 에스토니아인
'''통화'''
마르크
'''성립 이전'''
튜튼 기사단
에스토니아 공국
프루사[4]
'''멸망 이후'''
프로이센 공국, 왕령 프로이센
'''현재 국가'''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에스토니아, 폴란드
1. 개요
2. 역사
2.1. 기사단국 건국 이전
2.2. 기사단국 건국과 발전
2.3. 쇠퇴와 해체
3. 여담
4. 참고 문헌
5.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저지 독일어
Ordensstaat / Prüßen
독일어
Staat des Deutschen Ordens
/ Ordensstaat / Preußen
라틴어
Civitas Ordinis Theutonici
/ Borussia / Prussia
폴란드어
Państwo zakonu krzyżackiego / Prusy
영어
State of the Teutonic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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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30년부터 1525년까지 발트 지역에 존재했던 튜튼 기사단의 국가. 독일에서 '기사단국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독일 기사단국을 가리킨다.
근대 독일의 기원인 프로이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2. 역사



2.1. 기사단국 건국 이전


튜튼 기사단1190년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사수도회로 수립되었고, 1198년 이교도와 싸우는 기사단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209년 헤르만 폰 잘차(Hermann von Salza)가 네번째 기사단장이 되자 튜튼 기사단은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독일의 제후 가문 중 하나인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과 협력 관계가 되면서 기사단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벗어나 기사단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헤르만 폰 잘차는 1211년 헝가리 왕국의 왕 언드라시 2세(András II)의 구호를 받아들여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기사단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기사단은 헝가리를 쿠만족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조건으로 버르처사그(Barczaság)[5]를 하사받았다. 이후 기사단은 독일 이주민을 이주시키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기사단을 시기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헝가리 귀족들은 때마침 5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 고국으로 돌아온 언드라시 2세에게 기사단에게 하사한 영지를 회수할 것을 요구했다.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의 영지 회수 요구를 기각했으나 역시 기사단을 고깝게 본 언드라시의 장남인 트란실바니아 공작 벨러(Béla, 훗날의 벨러 4세(Béla IV))는 귀족들 편에 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고 헝가리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기사단은 벨러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과 갈등을 빚을거라 생각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기사단을 헝가리 산하에서 독립시켜 교황청 직속으로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독립 시도는 곧바로 발각이 되었고 기사단의 배신에 격노한 언드라시 2세는 1225년 기사단을 트란실바니아에서 축출했다.
헝가리에서 쫓겨난 기사단은 1226년에 폴란드 왕국의 마조프쉐[6] 공 콘라드 1세(Konrad I Mazowiecki)와 계약을 맺었다. 콘라드는 기사단을 프루시[7] 족들로부터 자신의 영지 방어 및 새로운 영토 팽창을 위한 군사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자신들이 프루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1230년 자신들을 후임하는 교황으로부터 프루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받았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협정을 맺어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소유권을 확약받았다. 기사단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그 사이에 폴란드 왕가와도 교류하였다.

2.2. 기사단국 건국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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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년 5월 16일 기사단은 콘라드 1세와 크루슈비츠 조약(Vertrag von Kruschwitz)을 체결하였다. 조약 체결로 독일 기사단국이 수립되었다. 기사단은 프루시 원정 동안 해안 지역을 장악한 후 내륙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정복한 지역에는 기사단의 성들이 건설되었으며, 이 성들은 훗날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기사단에 정복된 지역에는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도시는 마리엔베르더,[8] 프라우엔베르크[9] 등이 있다.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Schwertbrüderorden)이 튜튼 기사단에 병합되었다. 1240년에는 훗날 블라디미르-수즈달의 대공이 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네바 강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당시 기사단은 몽골-타타르의 침공을 받고 쇠약해진 러시아 동북지역을 침공하였다. 1240년 기사단은 러시아 프스코프를 함락시켰고 이에 1242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노브고로드 공국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 페이푸스 호수 전투에서 기사단은 대패하면서 기사단은 루스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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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은 고개를 돌려 즈무쥐 지역과 리투아니아 지역을 침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강대해진 리투아니아 지역의 반격으로 기사단의 계획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렵싸리 즈무쥐 지역을 폴란드의 양도라는 형식으로 손에 넣고 1283년까지 프루시 정복을 완료하였다. 1291년에는 리투아니아 지역을 침공하여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였다.
1343년 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스 왕은 독일 기사단국과 영토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기사단국은 폴란드 왕국에게 쿠야비, 도브진 지역을 반환하는 대신, 헤움과 그단스크 지역을 카지미에스로부터 하사받는 형식으로 손에 넣었다.
1346년 덴마크 왕은 19000 쾰른 마르크에 에스토니아 공국을 기사단에게 매각하였다. 이로써 기사단은 핀란드만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단원들을 주기적으로 보충하고자 주교구와 함께 정복 지역을 하사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독일 본토로부터 기사들을 끌어들였다. 이 시기 기사단국은 국력이 신장하였고 구성 도시들 역시 발전하였다.

2.3. 쇠퇴와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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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5세기 이후 기사단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에서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혼인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10]을 결성하였다. 이 인적 연합(Unia Personalna)의 구성 이유 중 하나가 튜튼 기사단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므로 독일 기사단국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11] 실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성은 독일 기사단국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결국 양국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양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튜튼 기사단은 서유럽 기사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타타르 군대까지 포섭하였다. 결국 1410년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에서 타넨베르크 전투(그룬발트 전트)가 벌어졌다. 1410년 7월 15일 양국의 군대가 타넨베르크 (그룬발트)에서 모여 대격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는 약 2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정된다. 타넨베르크 전투는 기사단의 대패로 종결되었다. 한때 수도인 마리엔부르크까지 위협받았던 기사단국은 1411년 제1차 토룬 조약을 맺고 기사단국이 영유하고 있던 즈무치 지역을 할양했다.[12] 이후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기사단을 여러번 공격했으며 결국 1454년~1466년 벌어진 13년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제2차 토룬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결과 기사단은 왕령 프로이센이라고 불리는 서프로이센 지역과 동프로이센 서부 지역인 에름란트(Ermalnd)[13]를 할양하였으며 이후 기사단장은 폴란드 왕의 봉신이 되고 기사단국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기사단국은 봉신국이 된 뒤에도 끊임없이 폴란드로부터 독립하려고 시도하였다. 폴란드는 기사단국의 독립 의지를 잠재우고 완전히 종속시키기 위해 1519년부터 1521년까지 2년 동안 기사단국과 전쟁을 벌였다. 기사단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무관심 속에 폴란드에게 완패를 당한 기사단은 결국, 카를 5세와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고 있던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Albrecht von Hohenzollern, Herzog von Preußen)가 1522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신교도들의 회의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을 계기로 1525년 4월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 개종,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폴란드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을 수립하면서 세속화되었다. 이 시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독일 기사단국 일대에도 한창 루터교회가 퍼져나가는 상황이었고 기사단원 중 상당수가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고 루터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덕분에 기사단국의 세속화 조치는 주민들이나 기사단원들의 별다른 반발없이 순조롭게 이어졌으며 이로써 독일 기사단국은 해체되었다.

3. 여담


독일 기사단국의 국기는 오늘날 스웨덴이나 덴마크북유럽 국가들이 쓰는 국기들과 다소 유사한 형태이다. 실제로도 북방 십자군 전쟁과 관련이 있다. 이후 독일도 1919년과 1948년에 각각 북유럽식 십자가 도안으로 된 국기를 도입하려 했다가 무산된 역사가 있다.(#)

4. 참고 문헌


  • 김용덕, '중동부유럽으로의 독일 진출과 그 결과 - 11-14세기를 중심으로 -'
  • 정병권, <폴란드사 (세계각국사 23)>,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7
  • Teutonic Order-worldstatesmen

5. 관련 문서



[1] 1466-1525.[2] 지도의 군청색 영역. 중간에 비어있는 부분의 대부분은 주교령(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속 영지)이다.[3] 현 폴란드 말보르크(Malbork). 기사단의 성채가 위치해있다[4] Prūsa. 발트족 계열의 선주민들이 살던 프로이센[5] 독일어로 부르젠란트(Burzenland)[6] 마조비아. 현 폴란드 북동부로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와 접한다.[7] 과거 프로이센에서 살던 발트계 민족이다. 프로이센이란 지명은 여기서 왔다.[8] Marienwerder, 오늘날 폴란드 크비귄이다.[9] Frauenberg, 오늘날 폴란드 프롬보르크이다.[10] 동군연합일 뿐 아직 연방이 성립된 것은 아니다.[11] 본격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된 것은 타넨베르크 전투(1410)의 패배 이후.[12] 그러나 즈무치 지역은 폴란드 왕국에게 영구적으로 할양되는 것이 아니라 야기에우웨 왕 서거 이후에는 다시 반환되기로 합의되었다. 토룬 조약에서 폴란드는 거액의 배상금을 기사단으로부터 받았으나, 그 대신 전쟁 중 폴란드가 점령한 여러 성들은 독일 기사단국에게 반환되었다. 즉 타넨베르크 전투는 명실상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승리였지만 연합은 그 승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다만 이 전쟁의 결과 튜튼 기사단의 군사력이 확실히 와해되었다. - 정병권, '폴란드사 (세계각국사 23)', 1997, 64p[13] 폴란드어 : 바르미아(War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