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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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Battle of Mohács
터키어: Mohaç Muharebesi
헝가리어: Mohácsi csata
1526년 8월 29일, 오늘날 헝가리 남부의 버러녀 주 모하치 근교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서 헝가리가 대패하여, '''완전독립국이며 단일국가로서의 헝가리'''는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고 헝가리 제1공화국이 건국될 때까지 400년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에서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빈을 여러 차례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빈 공방전, 제2차 빈 공방전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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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 등장하는 모하치 전투 영상[2]
2. 배경
2.1. 오스만 제국: 계속되는 상승세
1453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한 뒤 스스로를 '로마 황제'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후 1481년까지 이어지는 치세 동안 그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거의 매년 원정을 단행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블라드 3세를 물리치며 왈라키아를 속국으로 삼는가 하면 스컨데르베우 사후 알바니아 반란군[3] 도 격파하여 알바니아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삼았다. 비록 메흐메트 2세의 생전에 로마 제국의 재건. 즉 로마 시(市) 정복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으로 본격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되었다.
1481년부터 1512년까지 이어지는 바예지트 2세의 치세 동안 대외 원정을 되도록 자제하면서[4]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한 오스만 제국은, 셀림 1세의 치세 동안 시아파 사파비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에서 승리하여 동쪽에서부터의 위협을 한동안 종식시키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시리아와 이집트 등을 추가로 제국의 영토에 합병시켰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맘루크 왕조가 보호하고 있었던 아바스 왕조 칼리파로부터 칼리파 직을 넘겨받아,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 이슬람 세계에서 명실공히 최고의 나라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520년에 제위에 오른 쉴레이만 1세에게는, 부황 셀림 1세가 병사하는 바람에 못 다 이룬 목표를 완수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성 요한 기사단을 로도스 섬에서부터 몰아내는 것과, '''헝가리 원정이었다.'''
2.2. 헝가리
한편 오스만 제국이 이렇듯 상승세를 타고 있던 것과 같은 시기, 헝가리에서도 명군이 등장했다. 1458년부터 1490년까지 재위한 마차시 1세로, 그는 헝가리의 왕통이 단절되자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관을 쓰게 된 인물이었다. 이는 헝가리 역사상, 이전의 왕들과 전혀 혈연관계가 없으면서도 즉위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군주가 되었으며, '''검은 군대'''(Black Army)[5] 라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6] 을 보강하는 등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헝가리 왕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한 가지 추진했는데,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마침내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그리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더니 전제군주가 되었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저 왕이 언제 죽나'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에 마차시 1세가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서자 한 명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마차시 1세는 서자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귀족들은 그 말을 무시해버렸고, 얼마 전까지 전쟁 중이던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프를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뜬금없이 웬 보헤미아 왕이? 싶지만,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전 왕 라슬로 5세의 생질이었으며 이웃나라 폴란드의 왕자이기도 했다.[7] 하지만 귀족들이 울라슬로를 추대한 이유는 '현명하고 강인하니 우리 나라를 중흥시킬 것 같다'는 이유가 아니라, '띨띨하고 모자라니 예스맨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는 이유.
울라슬로 2세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왕이었는데,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에다 보헤미아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위 계승권은 동생인 얀에게 가 있었다. 실제로도 그는 귀족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 헝가리 왕령으로 되어 있던 토지들을 마구 나누어주는가 하면 귀족들이 무슨 내용을 담은 서류를 들고 오든 무조건 서명부터 해 주는 버릇이 있었고, 이로 인해 헝가리는 마차시 1세가 사망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전제군주국에서 귀족들의 사유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결국 마차시 1세와 함께, 그가 이룩했던 문화적, 군사적 업적도 다 함께 관짝에 들어간 셈.[8][9]
게다가 울라슬로 2세는 51세의 늦은 나이에야 아들인 '러요시 2세'를 낳았기 때문에, 1516년, 왕위를 이었을 때 러요시 2세의 나이는 11세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쇠락해가는 헝가리를 다시 일으켜세우기는 무리였다.
러요시 2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의 양자가 되는가 하면, 그의 손녀와 결혼하고 누나인 안나를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페르디난트와 결혼시키는 등,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러요시 2세가 '만일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 꺼' 라고 약속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
3. 베오그라드 공방전(1521)
오스만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고, 1년 뒤인 1521년,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신하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국왕 러요시 2세는 이교도가 쳐들어오면 당연히 신성 로마 제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사절들의 목을 돌려보냈으며, 러요시 2세의 '답장' 에 격분한 쉴레이만 1세는 당장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쉴레이만 1세가 직접 이끄는 헝가리 원정의 첫 번째 목표가 된 베오그라드는, 1456년에 메흐메트 2세가 친히 공격했다가 후녀디 야노시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던 중요한 요새였다. 하지만 1456년과 1521년 당시의 헝가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고, 베오그라드로 군대를 보내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실제로 군사를 보낸 귀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10] .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군도 오지 않아서, 베오그라드를 지키는 수비군은 꼴랑 700명(...)에 불과했다. 이러니 오스만 제국이 베오그라드와 그 주변에 위치한 작은 요새들을 모조리 정복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싱거운 싸움이라고는 해도, 베오그라드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우선 수십년 동안 대(對) 오스만 전진기지로서 버텨온 요새가 너무나도 싱겁게 함락되었고, 헝가리 남부의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린 오스만 제국은 언제라도 헝가리의 수도 부다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년 전 베오그라드의 투쟁은 당시만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을 집어 먹고 로마에서 교황의 목을 묶고 끌고다니겠다 운운하며 악마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군대로 여겨졌던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대가 육상전에서 제대로 발목 잡혔다는 점에서 헝가리인들과 유럽인들의 마음 속에서 큰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베오그라드가 이번엔 쉽게 무너지고, 중세 십자군의 마지막 유산 중 하나로서 역시 불침요새라 자부했던 구호기사단의 로도스섬까지 떨어지면서 조성 된 공포 분위기 와중 유럽 군주들의 입장에서, '''헝가리 다음엔 자신들의 차례가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11]
4. 모하치 전투
4.1. 전투 직전의 상황
1525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당시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2] 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파비아에서 완패하고 국왕마저도 생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설사 패배해도 왕이 포로로 잡히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 궁정은 멘붕했고, 자리를 비운 국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모후 사보이의 루이즈를 중심으로 대책이 수립된다. 이교도고 뭐고 가릴 계제가 아니니, 당장 강력한 대제국인 오스만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한 것.
한편 쉴레이만 1세는 1522년 로도스 섬 정복에 성공한 이후 한동안 원정을 쉬고 있었는데 1525년 12월 프랑스의 사절을 접견한 그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526년 2월에 카를 5세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왕을 당장 석방하고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가겠노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대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황제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고[13] , 이에 쉴레이만 1세는 다시 한 번 친히 군사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 무렵에도, 헝가리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1523년에 컬로처라는 도시의 대주교이자 용맹한 군인으로서도 유명했던 토모리 팔이라는 인물에게 헝가리 남부의 방어를 명령한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지만, 그마저도 충분한 군자금을 준 것이 아니라 '일단 파견해놓고 보자' 라는 식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대주교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방어 전체를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1526년 4월에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쉴레이만 1세가 지휘한 군대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50,000명에서 65,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교도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헝가리의 귀족들은 7월 2일까지 군사를 이끌고 집결지로 모이라는 왕명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국왕 러요시 2세 자신도 출전 채비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집결지에 모인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러요시 2세는 부랴부랴 국왕이 친히 모범을 보인다며 먼저 집결지로 향했고, 그제서야 헝가리군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어렵사리 헝가리군을 긁어모은 21세의 러요시 2세는, 경험이 적은 자신을 대신하여 사실상 군대를 지휘하게 된 토모리 팔과 자포여 죄르지, 자포여 야노시 형제 등 지휘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귀족인 자포여 야노시가 이끄는 8,000명에서 13,000명 가량의 군사는 트란실바니아를 지키고,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정확히는 동군연합) 크로아티아를 수비하기 위해 다시 5,000명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러요시 2세 자신은 토모리 팔과 자포여 죄르지를 부관으로 삼고, 25,000명에서 3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오스만 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군사를 나눈 것이기는 했지만, 오스만군이 발칸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부다로 바로 쳐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스만군의 위치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는 이미 트란실바니아나 크로아티아로 파견한 군사를 불러들이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그 때문에 러요시 2세는 결국 2만 5천에서 3만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최소 2배에 달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4.2. 헝가리의 전략
러요시 2세와 토모리 팔, 자포여 죄르지가 선택한 전략은, 오늘날 헝가리 남부에 위치한 모하치 주변의 평원에서 이교도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었다. 즉 군데군데 늪지대가 펼쳐져 있고, 한편에 도나우 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탁 트인 평원에서 전통적으로 헝가리의 자랑인 기병대를 앞세워 적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헝가리의 두 번째 실수였다.
셀림 1세 시대에 오스만 제국이 이란의 사파비 제국이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맞서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사파비나 맘루크가 기병을 앞세웠던 반면 오스만은 총과 대포를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즉 모하치 전투는, 사파비 제국과의 찰디란 전투, 맘루크 왕조와의 미르지 다비크 전투의 재방송이 될 운명이었다.[14]
그리고 저 해당 전투들에서 오스만에게 참패한 이스마일 1세나 맘루크의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가 화약 무기의 활용도에도 있었지만, 본인들의 주특기라는 스텝의 경기병 전술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뿌리가 아나톨리아의 기마 유목민이었고, 스웜 전술을 비롯한 스텝 유목제국의 전술과 노하우들 또한 버린 것이 아니라서 월등했다.
15세기 중후반 이후의 오스만 군대는 오히려 저런 유목 제국 특유의 스웜 전술에 지정학적으로 한곳에 정착하여 고정적인, 그것도 풍부한 세수가 있어야만 양성 가능한 화약 무기로 대표되는 예니체리라는 첨단 상비군 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라이벌들을 압도적으로 꺾고 부상할 수 있었다. 예니체리의 제식 병기로 총이 채택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나고 대포 성능면에서도 유럽의 최고 선진국 중 하나로 손꼽히던 이 시점까지 시파히 기병대가 해체되기는커녕 여전히 주력군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만, 헝가리군에게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헝가리군은 일찌감치 모하치 평원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반면, 오스만군은 한여름인 7, 8월에 먼 거리를 행군하느라 지쳐 있었던 것. 하지만 헝가리는 이러한 유리함조차도 스스로 저버리고 마는데,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한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스만군이 진형을 갖춘 채 늪지대를 행군하는 것을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4.3. 격돌
중세 헝가리 왕국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1526년 8월 29일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중앙에 보병과 50여 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좌익과 우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국왕 러요시 2세는 중앙의 지휘를 맡고, 우익은 토모리 팔이 지휘했다.
한편 모하치로 진군해가는 오스만군은 전군을 선두부대와 후위부대의 둘로 나누어, 앞쪽에는 '''아자브'''[15] 와 '''아큰즈'''[16] 등 비정규군을. 후방에는 '''시파히'''와 '''예니체리''' 등 정규군을 배치했다(이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진형이었다).
전투는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이 먼저 모하치 전장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본 헝가리군은 곧바로 대포를 발사했고, 토모리 팔이 이끄는 우익 기병대가 곧바로 오스만군에게로 돌격했다.
포탄에 얻어맞은데다 사람과 말 모두 갑옷으로 휘감은 중장기병들이 돌격해오자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뒤이어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이 투입되면서 비정규군도 전열을 정비하고 싸움에 임했지만, 헝가리의 우익 기병대는 오스만군 진영 깊숙이까지 돌격하여 황제 쉴레이만 1세의 흉갑에 화살 하나가 날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1526년의 모하치에서 헝가리가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 기병대인 시파히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는 이점을 살려 헝가리군을 양옆에서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고, 제국의 자랑인 예니체리와 대포는 곧바로 헝가리의 기병들에게 총알과 포탄을 퍼부었다. 결국 헝가리군 우익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지휘관인 토모리 팔은 병사들에게 퇴각하지 말라고 독려하던 도중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헝가리군 우익을 제압한 오스만군은, 뒤이어 남은 헝가리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포탄과 총알이 비오듯 하는 상황에서도 적을 향해 돌격했던 헝가리군 좌익의 기병대가 먼저 제물로 바쳐졌고, 국왕 러요시 2세가 직접 이끄는 중앙군 병사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러요시 2세도 황혼 무렵에 말을 돌려 달아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도중 강가에서 낙마, 갑옷의 무게로 인해 익사하고 말았다. 향년 21세, 10년의 치세였다.
5. 결과
모하치 전투에서, 2만 5천에서 3만여 명의 헝가리군 가운데 3분의 2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한편 오스만군은 1,50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내며 압승했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의 수도 부다로 진격하는 대신 며칠 동안 모하치에 야영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제아무리 헝가리의 왕도 죽었다지만 고조부인 무라트 2세 시대부터 수십년 동안 오스만에 저항했던 강국 헝가리가 이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17] 사실 바르나 전투 당시 십자군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만 14세기 후반쯤 들어가면 동로마 제국에 망조가 들어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는 데에 급급한 처지였고,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 짜잘한 공국들은 애초에 체급 자체가 오스만 제국과 비교가 안 되었기에 기본적으로 동남부 유럽의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의 주축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면 육상에서 탱킹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발칸 반도의 정교회와 가톨릭계 기독교 연합군이었다.
사실 모하치에서 털렸던 만큼 전술적인 레벨에선 오스만 제국도 야전에서, 공성전에서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에 헝가리에게 손실 교환비 3:1, 5:1 이따위로 못지 않게 탈탈 털린 전투들도 적지 않았다. 차이점은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전투 한번에서 병사 1~2만 잃은거야 "'''X발 내년에 다시'''"하고 넘어가 버리면 되는[18] 문제였지만, 상술한 남슬라브나 블라흐계 정교회 공국들 입장에서는 그냥 나라 전체가 한방에 훅 가는 수준이었고[19] , 헝가리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꿀릴 것 없는 나름의 강대국도 한 서너 번 겪으면 복구 불가능한 수준의 손실이었다. 결국 쉴레이만 1세 입장에서 헝가리 정복과 복속은 이런 차원에서 큰 장애물 경기 하나 끝낸 셈이었으니 '이게 생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법도 했다. 부다에 입성한 쉴레이만 1세는 수비군은커녕 주민들도 진작에 피신하고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뭔가 찜찜했던지 부다를 제국의 영토에 합병하기는커녕 그대로 철군하는 것을 선택했다.
한편 러요시 2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탓에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에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20] 가 러요시 2세가 생전에 했던 약속 및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헝가리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러요시 2세가 왕노릇한 다른 나라들인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는 재빠르게 페르디난트 1세를 추대한 반면, 헝가리 귀족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일단 헝가리 귀족 회의는 페르디난트 1세를 새 국왕으로 인정했지만, 일부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당시 헝가리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인망을 얻고 있었고 모하치 전투에서 트란실바니아를 수비했던 자포여 야노시를 야노시 1세로 옹립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 1세의 합스부르크군이 헝가리로 진주하여 야노시를 격퇴하고 헝가리를 접수했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 패배하여 달아난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를 찾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의 신하가 되겠노라고 제안했다. 야노시의 제안을 받아들인 쉴레이만 1세는 1529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향하여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군을 격퇴하고 마침내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을 포위(1차 빈 공방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6. 기타
오늘날 모하치 전투는, 헝가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모하치 전투를 모티브로 하는 민담도 여럿 전해지고 있고, 전투 450주년인 1976년에 헝가리 정부는 모하치 전장에 국립 추모공원을 세우기도 했다. 또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몹시 힘들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에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라 한다고.
1683년부터 169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등등등(...)이 벌인 대 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도 모하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687년에 벌어진 이 전투는 1526년의 전투와 구분하기 위해 '2차 모하치 전투' 라 부르는데, 160년 전과는 달리 오스만이 대패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몽땅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모하치에서 승리하여 헝가리를 지배하게 되었다가, 모하치에서 패하여 헝가리를 잃은 셈.
[1] 1551년 크림 칸국의 칸으로 즉위.[2] 위대한 세기 문서에도 나오지만 20대 초반인 러요시 2세가 중년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3] 물론 알바니아 입장에서는 저항군.[4] 아예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메흐메트 2세의 치세와 비교하면 횟수 자체가 적었고, 그나마도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의 비정규군인 '아큰즈'만을 동원한 전쟁이 많았다. 바예지트 2세 치세 3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1485~1491)과 베네치아와의 전쟁(1499~1503)이 전부였다. 그러나 아버지랑 아들, 손자에 비해 덜 돋보여서 그렇지 이 양반도 꽤 많은 지역을 정복했다. 즉위하자마자 보스니아 남부 헤르체고비나를 정복하고, 몰다비아를 복속시키며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베이국을 와해시켜 아나톨리아를 평정하고 후대의 술탄들이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다수의 베네치아령 도시들을 장악하여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베네치아 세력을 몰아냈다.[5]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모두 중기병이었다.[6] 오늘날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에 속했으며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였다.[7] '브와디스와프'라는 폴란드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울라슬로'고, 체코어로는 '블라디슬라프'.[8] 왕실의 재정이 부족해지다 보니 그러잖아도 막대한 용병료를 잡아먹던 '검은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 부대는 마차시 1세가 죽은 지 4년 만인 1494년에 헝가리 귀족들의 손에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이권경쟁에 돌입한 귀족들 가운데 마차시 1세가 심혈을 기울여 보강해 놓았던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계속 유지, 보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이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게 짓밟히면서 마차시 1세가 이룩했던 문화적 업적도 무너져내리고 만다.[9] 1520년을 기준으로, 헝가리 왕실은 문서상 국가 1년 수입의 3분의 1에 불과한 왕실 유지비도 충분히 마련할 수 없어 이곳저곳에 자금을 융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1520년이라는 해는, 쉴레이만 대제가 황위에 오른 해이기도 하다. [10] 이는 왕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데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11] 그리고 이는 상당 부분 현실화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529년의 1차 빈 공방전으로 현실이 되었고, 헝가리 평원이 밀리면서 오스만 제국 입장에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크림 한국이 있던 북방 전선 또한 아케르만 (현대 우크라이나어 지명은 빌호로드-드니스트로우스키) 요새를 통해 육로로 직접적으로 보급할 수 있게 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공세도 훨씬 심해졌다. 게다가 아드리아해의 달마티아 일대가 대부분 명목상으로나마 헝가리 왕의 봉신이었던 만큼 이 일대에 대한 통제가 확 풀리고, 유민들이 때거지로 발생하며 이들이 해적화되면서 당장 베네치아 본토와 해상 영토를 연결하는 달마티아 해안이란 옆구리가 엄청 시려진 베네치아 공화국 또한 헝가리가 넘어가면서 더욱 심한 침략과 노략질에 시달리게 되었다. 시간적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동방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으려고 하는 거대한 정복 제국을 상대로 탱킹을 할 만한 체급의 육상 강대국이 사라지면 이렇게 된다. 지정학적 구도 자체는 근세와 그 이전 중세 시대 사람들도 뻔히 알았기 때문에 4차 십자군이 당시 관점에서도 근시안적이었다고 욕을 먹었던 것이다. 십자군 국가->아나톨리아->>그리스->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헝가리 순으로 쭉쭉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이 서쪽의 오스트리아, 북쪽의 폴란드로 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고, 이들은 동유럽도 아닌 중유럽이었다. 실제로 오스만의 확장은 헝가리에서 멈췄지만, 엄연한 유럽 열강에 속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몇 번이나 포위할 만큼 공세를 펼쳤다. 만약 빈이 함락된다면 독일로,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말하자면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가 우마이야 왕조에게 넘어갔을 때 프랑크 왕국이 느낀 위협과 비슷한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출격한 이슬람 해적들이 프랑스 주교를 납치하고 휴가나온 교황을 잡겠다며 달려오던 시대였다.[12] 1519년부터 155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1516년부터 1556년까지 스페인 왕으로 재위하여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한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13] 여담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한달 전인 1월에 프랑스에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난 상태였다.[14] 설령 헝가리가 이러한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으로 미숙했다는 점을 변호해주기는 어렵다. 1493년에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진 크르바바 평원 전투도, 찰디란이나 미르지 다비크, 그리고 이번의 모하치와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15]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인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무슬림이라면 누구든’ 으로 대상이 확대된 지원병으로 급료를 받았으며, 언제든 계약을 해제하고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구른 모습을 보면 심지어 저 '무슬림'이라는 기본 자격도 안 지켜진 채 단순히 오스만 제국 편에서 싸우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한 현지 기독교 피지배민들도 많았다.[16]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병대로, 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대이다보니 예니체리나 시파히와는 대조적으로 봉급을 받지 않아 이웃나라의 마을이나 방어가 취약한 도시를 공격한 뒤 약탈한 전리품을 봉급이다 생각하고 나누어가져야 했는데, 그 이웃나라가 항의해 와도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미처 몰랐네? 미안.'으로 일관하기 일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잘 나가던 시기. 즉 아큰즈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의 오스만 제국에게 '이웃나라' 는 '잠정적인 정복 대상' 에 불과했으며 아큰즈들의 약탈로 평상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은 물론이요 어디의 방어가 취약한지도 알 수 있었다.[17] 사실 모하치 전투는 헝가리로서는 국가의 운명을 건 대전투였지만, 오스만의 입장에서는 적의 기병들이 단체로 반자이 어택을 시전한 싸움이었을 뿐이었다. 헝가리의 함정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18]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동쪽으론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비롯한 사방이 적이라 한 전선에서의 공백이 제국 전체에게 치명적인 연쇄작용을 일으킬 위험성을 항상 끼고 있어서 오스만 제국도 그렇게 속편하게 인력을 막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야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숫적 우위는 몰다비아, 왈라키아, 헝가리 점령 이후에는 트란실바니아, 크림 칸국 등 제후국의 군대도 막 끌어모아 확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제국이라고 10만, 20만 우습게 호주머니에서 꺼낼수 있는거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나 동•서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만큼의 강대국을 제외한 헝가리를 비롯한 대부분 유럽 왕국들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던건 사실이었다.[19] 코소보 전투가 딱 이랬다.[20]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