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부인
1. 개요
태종 무열왕의 3녀. 문희 소생으로, 외삼촌인 김유신의 부인이기도 하다.[1]
참고로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只召夫人)과는 한자가 다르다.
2. 내용
655년 10월에 '''환갑을 맞은 외삼촌 김유신과 결혼했다.''' 그리고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김원술, 김원정, 김장이, 김원망 다섯 아들과 이름이 전하지 않는 딸 넷을 낳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지소부인의 나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본기 성덕왕 11년(712) 기록에서 김유신의 아내가 살아있으며 존칭과 곡식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655년에는 10~20대의 젊은 연령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혼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 쯤에 결혼하는 게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상적이기도 했다.
환갑부터 79세에 김유신이 사망할 때까지 5남 4녀를 낳았다는 것인데,[2] 금슬은 매우 좋았던 듯. 그러나 장남 김삼광이 삼국사기 기록대로 그녀의 아들이라면 10대의 너무 어린 시기부터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이나, 김유신이 60이 되는 그때까지 정식으로 결혼해서 적자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삼국사기의 이 시기 기록들이 좀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김유신이 죽고 과부가 된 뒤로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며,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던 김원술이 기어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매소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1] 문희 소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고대 사회에서는 혈통의 고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족이나 상류층에서 근친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도 특히 중기 전후로 성골 등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에서는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라는 부모 중에서 낮은 신분을 자식이 물려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골끼리 혼인하려다 보니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고 신라 중기에 성골이 감소하자 이런 현상은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골은 씨가 말라버리고 말았다.[2] 여성은 40대 이후로 임신이 어렵지만 남성은 건강하다면 이론상 죽을 때까지 임신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환갑 넘어서도 자식 본 사람으로 삼국지의 조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