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타소
1. 개요
신라의 인물. 태종 무열왕의 장녀[1] 이자 문무왕의 여동생. 이름은 김고타소(金古陀炤). 아버지가 왕이 되기 전에 사망했기에 보통 공주라고 불리지 않으나 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고타소 공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문무왕의 누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이 백제의 태자 부여융에게 모욕을 줄 때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나의 여동생(我妹)'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문무왕은 김고타소의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이다. 다만 이름의 고타(古陀)는 '''크다''', 소(炤)는 조선 시대까지 흔하던 여성의 호칭인 '''조이#s-1'''[2] 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 딸 중에서는 장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무왕이 626년생이므로 그의 여동생인 김고타소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627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대야성 전투가 서기 642년에 벌어졌으므로 사망 당시 그녀는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김고타소는 어린 나이에 김품석과 혼인했고 시집간 직후에 참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야성 전투 당시 그녀의 아버지 김춘추도 39세에 불과했으므로 당시 김고타소의 나이가 10대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3] 지금 보면 일찍 혼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먼 훗날인 20세기 초중엽까지도 남자는 15~17세, 여자는 14~15세 정도되면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보다 일찍 혼인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며 20살이 되어서 혼인하지 못하면 노총각과 노처녀로 분류되던 시절이었고 여자는 25살, 남자는 30살이 넘어서서 혼인하지 못하면 국가 차원에서 혼수품을 지원하는 정책도 존재했을 정도이니 10대 후반에 혼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었다.
2. 생애
김고타소의 남편 김품석은 요충지에 있는 대야성[4] 의 도독으로 부임했고 김고타소도 남편과 함께 대야성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신라군이 방어에 실패해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심지어 성왕을 죽인 일에 대한 복수로 감옥 바닥에 파묻어버리는 고인드립도 당했다고 한다.[5] 이 때문에 아버지인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오빠 김법민(문무왕)이 백제에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백제를 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고구려, 왜, 당나라를 차례대로 방문해 동맹을 타진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이전보다 더욱 몸을 사리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는데 고구려에서는 동맹 제의를 거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며 친 백제국인 왜에서도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를 방문해 당태종과 나당동맹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김춘추와 김법민의 개인적 복수심을 이후 무리한 고구려 외교, 길게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까지 스토리 전개의 동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수도 있다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 일파가 입은 정치적인 타격 때문이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텐데 김품석은 대야성 상실의 가장 큰 책임자이다. 이런 점과 김품석이 임전무퇴를 귀족의 미덕으로 여기던 신라 사회 분위기와 정반대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려 했던 것은 김춘추에게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딸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야성 전투의 여파가 크기는 했지만 단순히 정치 인생이 끝나서 그랬다면 빨리 정신차리고 움직이지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있는 건 지나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들 부자 입장에서 고타소는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자마자 남편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신부다. 특히 당시 아직 젊어서 오빠의 면모가 컸을 문무왕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동생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괴로워한 걸 보면 진짜로 시스콘이었을 수도 있다.[6]
그녀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647년 옥문곡 전투에서 붙잡은 8명의 백제 장군과 교환해 수습했는데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7] 이 660년 함락되고 백제의 태자 부여융도 사로잡히자 당시 태자였던 김법민(문무왕)은 부여융의 무릎을 꿇리고 침을 뱉은 뒤 "네 아비는 나의 여동생 김고타소를 참혹하게 죽이고 옥 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보통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옛날 역사서들의 기록들은 대부분 정제되고 건조하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은데 문무왕이 부여융을 모욕줄 때의 발언과 행동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발언은 신라가 백제의 증오감과 복수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으로 꼽힌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3. 미디어
대체로 남편 김품석이 막장에 백제군에 잡힌 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정반대로 의연한 인물로 묘사된다. 애초에 대야성이 함락된 원인이 김품석에게 있고, 김춘추가 아끼던 딸이라던 것 외에는 특별한 일화를 남긴 것도 아니라 나쁘게 묘사할 이유도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 연개소문(드라마)
최설화가 연기했다.
3.2. 대왕의 꿈
박그리나[8] 가 연기했다. 아역은 정다빈.
어렸을 때 중증 시스콘 기질을 보였던 김법민(문무왕)만큼이나 중증 브라콘[9] (…) 기질을 보였다. 성인역으로 바뀐 이후에는 역사 상에 나온대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남편과 함께 의자왕의 창에 끔살(…)[10] 되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나 이건 아시발꿈이었고, 실제 극중에서는 출산 후 백제군 앞에서 남편을 독려하는 기개를 보이다가 백제군에게 살해됐다. 의자왕의 언급에 따르면 사후 남편의 시체와 함께 목이 베여 조리돌림당한 듯하다. 김유신이 대야성을 탈환[11] 한 후 유해를 회수했다.
[1] 보라궁주의 소생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위서일 가능성이 큰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이야기고 삼국사기에는 문희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김춘추의 나이를 고려하면 김춘추가 문명왕후를 맞이하기 전 아내를 맞이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애당초 보라궁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기록이 없는 인물이다.[2] 콩쥐팥쥐의 쥐도 동물 쥐가 아니라 이거다.[3] 김춘추의 외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죽은 게 확실해보인다.[4]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5]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이 도도에게 죽은 뒤 성왕의 목을 도당에 파묻어버려 몸통만 백제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대응했던 모양.[6] 물론 이런걸로 진지하게 시스콘 드립치면 곤란하다. 역사에서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형제자매에 대한 한이 평생 동안 맺힌 사람들은 많다. 조위의 황제인 조비가 그 예. 그나마 문무왕은 침 뱉고 모욕하기는 했어도 어차피 부여융은 적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인 무열왕이 용서해준 것도 아니니 참작 여지라도 있지 조비는 제 아비가 용서해준 상대로, 그것도 자기 휘하를 상대로 마구 핍박을 해 죽게 만들었다는데서 문무왕보다 한 술 더 떴다...[7]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8] 근초고왕(드라마)에서 부여화의 시녀인 단단이 역을 맡았던 배우다.[9] 김법민과 연화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질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10] 극 중 만삭 상태라서,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이는 건 잔인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었다.[11] 실제로 대야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야 신라에게 되돌아오기에 고증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