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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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제11대 군주. 초기 진나라의 마지막 통일 군주. 진문후는 정나라의 정환공과 함께 서주(西周)가 견융족에게 망한 뒤 동주(東周)로 부흥시키는 공로를 세운 진나라 군주다. 여담이지만 처음보는 사람은 진문공과 진문후가 헷갈릴 수 있는데, 진문후의 이름은 구(仇)고, 진 문공의 이름은 중이(重耳)이며, 진 문공은 진문후의 방계 자손이니 전혀 다르다.[1]
2. 생애
진문후는 원래 진목후의 태자였다. 그런데, 진문후의 숙부인 진상숙인 희가보가 진 목후가 죽자마자 정권을 탈취했다. 그러나 훗날 진문후가 될 희구는 쫓겨난 동안 힘을 길러서 진상숙 4년(기원전 780년), 상숙을 기습해 시해하고 진후(晉侯)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문후다.
세월이 흘러 진문후 10년(기원전 770년), 유왕이 죽고 평왕이 즉위한다. 진문후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정무공, 진양공(秦襄公)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돕는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이틈을 타서 다른 왕족인 희여신(姬余臣)이 왕을 자칭하니 그가 휴왕이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이분된다.
진문후 21년(기원전 761년), 청화간(清華簡)[2] 의 기록에 의하면 휴왕은 이 해에 진문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죽서기년에서는 진문후가 휴왕을 죽였다고만 나온다. 그리고 주 왕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문후근왕(文侯勤王), 즉 진문후가 왕을 도와 공을 세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같은 해에 진문후는 낙양 동천을 도왔을 뿐만이 아니라 평왕의 지위를 공고하게 한 공로를 세웠다. 진문후가 이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평왕은 진문후에게 거창[3] 과 규찬[4] 을 내렸는데, 거기에 진후지명(晉侯之命)이라는 문구를 새겼다.[5] 그리고 진문후는 분수 유역으로 세력을 떨쳐 진나라의 영토를 넓혔다. 물론 이것은 평왕에게 승인을 받고서 한 일이다.
진문후 25년(기원전 757년) 진문후는 한(韓)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6]
진문후 35년(기원전 746년), 진문후는 사망하였고, 그 뒤를 아들 희백이 진후가 되었다.
3. 그 사후
진문후가 죽은 뒤 진나라는 2개로 갈라지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아들인 진소후 희백이 숙부인 희성사[7] 를 곡옥 땅에 봉지를 주어 곡옥의 백작에 봉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내전을 벌이는 바람에 천하의 대세에 간여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곡옥대진(曲沃代晉)이라 한다.
진소후는 그 신하인 반보에게 살해되었고, 그리고 그 다음 군주인 진 효후도 곡옥환숙의 아들인 곡옥장백에게 살해된다. 진 악후는 곡옥으로 쳐들어가 그곳의 곡식을 불살라 없앴는데, 진 악후 때 만큼은 곡옥에게 밀리지 않았으나, 6년만에 죽어버렸고, 곡옥장백은 그 틈을 타서 진나라의 수도 익을 쳤으나 서괵공의 공격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8]
아무튼 그 일로 곡옥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곡옥장백이 죽고 곡옥무공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진애후에게 화평을 요청했고, 진 애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곡옥무공은 진 애후를 사로잡았고, 익에서 소자후를 즉위시키자 곡옥무공은 기원전 708년, 소자후를 평화 협정을 하자는 구실로 불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진후 민이 즉위했다. 기원전 679년, 곡옥무공은 익을 쳐서 진후 민을 몰아냈다. 일설에는 진후 민은 곡옥무공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곡옥에게 병탄되었고, 진무공이 된 곡옥무공은 주 희왕에게 뇌물을 바쳐 진후로 승진하게 되어 진문공이 춘추오패가 될 기반을 만든다.
4. 평가
진문후의 등장은 초기 진나라의 걸출한 군주가 등장했다고 평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군주 자리를 빼앗은 숙부인 상숙을 죽인 뒤 그 자리를 되찾아 나라를 안정시켜[9] 국력을 키워 견융족으로부터 평왕을 보호하고 그 뿐만 아니라 가짜 왕인 휴왕을 제거해 주 왕실의 권위가 더 실추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분수 유역으로 힘을 뻗었으며, 한나라를 멸망시켜 국토를 많이 넓혀 훗날 패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 곡옥환숙은 진문공의 고조 할아버지다. 즉 기어이 따지자면 진문후가 진 문공의 큰 고조 할아버지다.[2] 칭화 대학에서 발견된 죽간이라는 뜻.[3] 왕실의 제사에 쓰는 술.[4] 왕실의 제사에 쓰는 옥으로 만든 술잔류.[5] 참고로 이것들 구석을 이루는 것들 맞다.[6] 전국시대의 한(韓)나라와는 다르다.[7] 참고로 진 목후가 진문후의 이름을 仇라 짓고, 곡옥환숙인 희성사의 이름에 成이 들어갔으니 진 문후의 후손이 곡옥환숙의 후손에게 먹힐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 진다.[8] 이것은 사기의 기록이고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곡옥장백은 주의 지원을 받아 진을 쳐서 악후를 몰아냈고, 곡옥장백이 주나라를 배반하자 주나라는 곡옥을 치면서 진애후를 즉위시켰고, 주나라의 승인으로 진나라 군주가 된 진 애후의 존재 때문에 악 땅에 거주했고 거기서 죽어서 진 악후가 되었다고 한다.[9]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추측의 영역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