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완
1. 소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진(陳)의 공족이자 제(齊)나라의 정치가. 성은 규(嬀), 씨는 진(陳), 자는 중(仲)이며 시호는 경(敬)이다. 사후 씨명과 시호를 추려 진경중(陳敬仲)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사마천의 사기 46번째 세가인 전경중완세가의 주인공이다.
2. 생애
기원전 709년, 진나라(陳)의 제후 여공(厲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인 중(仲)은 차남이란 뜻이다.
진나라 공실에 새 공자가 태어났던 그 시점, 우연히 주나라의 태사(太史)가 진나라의 영토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공이 사절을 보내 태사를 맞아들여 새 공자의 운수를 점쳐줄 것을 부탁하자, 태사는 공자가 '''진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제후가 될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여공은 새 공자의 이름을 완(完)이라 지어주고 열성을 다해 길렀으나, 완이 아홉 살 되던 기원전 70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공에게는 큰 아들(이름은 전하지 않음)과 공자 완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둘 다 너무 어려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숙부인 장공(莊公)과 선공(宣公)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 가운데 공자 완은 제후 계승권에서 점차 멀어졌으나, 다행히도 큰 위기없이 장성했다.
장성한 공자 완은 선공의 아들인 태자 어구(禦寇)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무렵 어구보다 후첩의 아들인 관(款)을 총애하던 선공은 다음 제후의 자리를 관에게 물려주기 위해 어구를 암살했다(기원전 672년). 어구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자 어구의 일당으로 몰린 완은 진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의 제후 환공(桓公)은 진완의 인물됨을 보고, 그에게 경(卿)의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진완은 망명자의 신분으로 그런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진완의 겸손한 모습에 탄복한 환공은 경 대신 진완에게 백공(百工 : 당시의 직인職人을 이르는 말)을 통솔하는 공정(工正)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공정으로 일하면서 나라에 공헌을 하자 그 상으로 전(田) 땅을 영지로 하사했다.
진완은 제나라로 망명하여 공정 벼슬을 지내는 한편 상업에도 참여하여 큰 재력을 쌓았다. 그리고 영지로 하사받은 전 땅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제나라 안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 진완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고, 제나라 공실에서는 그에게 경(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진완의 후손들은 진씨를 그대로 사용하는 일파와 진완의 영지였던 전을 씨로 삼은 전씨(田氏) 일파로 나뉘었는데, 특히 전씨 일족이 제나라의 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었고, 전상(田常)의 대에 와서는 임금을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로 만들고 실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으며, 전상의 증손자인 전화(田和)는 태공망의 자손으로 제나라의 제후였던 강공(康公) 여대(呂貸)를 동쪽 바닷가로 추방하고 주나라 왕실로부터 제나라의 새로운 제후로 인정받았다.
이때가 기원전 386년으로, 태공망부터 강공까지 강성 여씨(姜姓呂氏)가 다스렸던 제나라는 강제(姜齊)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제나라의 제후가 된 전화는 제 태공(齊太公)이 되어 그 후손이 제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이 제나라가 바로 전국 칠웅의 제나라로, 제후의 성을 따서 전제(田齊)로 불리게 되었다.
3. 여담
전씨가 제나라의 제후가 되자, 그 선조인 진완은 가문의 시조로 받들어져 제나라 종묘에 제후로서 모셔지게 되었다. 이로써 진완이 태어났을 당시 받았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진완의 후손인 왕망(王莽)이 신나라를 세울때, 진완에게 묘호를 통조(統祖), 시호를 진호왕(陳胡王)으로 추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