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전투

 



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전투 전개 (7.6 ~ 7.10)
4. 여담


1. 개요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고 있었던 1950년 7월 6일부터 10일까지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최현(崔賢) 소장의 북한군 2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치룬 지연전.

2. 전투 전 상황


7월 5일 당시 수도사단은 1, 8, 18연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명칭도 혼성 수도사단이었다. 그리고 이 날 신설된 국군 1군단에 편입되면서 수도사단으로 정식 개명되었으나 워낙 정신이 없어 예하 부대들이 다들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으며, 쇠약해진 이종찬 대령을 대신해 이준식 준장이 해당 사단을 맡게 된다. 또한 오전 10시 육군본부 작명 제20호에 의거 안성-발안장(오산 서쪽 6km)간에 저지진지를 점령하라는 군단 명령에 수도사단도 8연대(연대장 중령 이현진)를 용인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주력인 1, 18 연대는 수도사단 본부가 위치한 평택으로 집결시킨다.
이후 수도사단은 오후 6시경 평택 동남쪽 합정리에 집결하라는 것과 진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연이어 받고 평택을 육군본부 직할부대와 미군에게 맡긴다. 그 뒤 오창리(진천남쪽 13km)에 집결한 뒤 민병권 중령의 6사단 19연대와 공동 전선을 펼치고자 진천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1연대는 잣고개 북쪽 진천읍으로 보내 지연전 전개, 8연대는 잣고개 동쪽 봉화산, 18연대는 잣고개 서쪽 문안산을 점령시킴으로서 적들을 잣고개에서 막아내려고 했다.

3. 전투 전개 (7.6 ~ 7.10)


참고자료1 참고자료2
7월 6일 오전 10시 수도사단 1연대는 진천읍에 진입했으며, 1연대장 이희권 중령은 1대대장 장태환 소령에게 중대 하나를 진천 북쪽으로 먼저 보내 6사단 19연대를 도우라고 명령했고, 이에 윤흥정 중위의 1중대가 앞서 달려나간다.[1] 이후 이월면 중산리에서 국군 6사단 19연대 후위중대와 합류한 1중대는 진천-청주를 잇는 585번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 일대에 진지공사를 한다.
이후 공격준비사격으로 보이는 포격이 이어졌고, 탐색대로 보이는 1개 소대 무리가 양 중대 진지와 산발적인 교전을 하다 쫓겨났다. 이 무렵 1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116고지에서 송림리 쪽을 관찰하였는데, 연대 규모의 적들[2]이 모여 있자 대대와 부하들에게 이를 알린 뒤 전투 태세를 갖춘다. 한편 이 보고를 접한 김홍일 1군단장은 수도사단만으로는 진천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육군본부에 병력 증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치원에서 청주로 행군하던 17연대가 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뒤이어 독립기갑연대 장갑 1중대 및 도보대대, 그리고 1포병단에서 포대 하나를 증원받았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수도사단이 있는 진천과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에 당장 도움을 줄 처지가 아니었다.
7월 7일 오후 2시 지원포격 속에 북한군들이 585번 도로 양쪽으로 밀려왔고, 이를 방어하던 도로변의 전초진지들은 제대로 응전할 수 없었고 양 중대 역시 박격포 같은 중화기가 없어 이를 지원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116고지에서 이를 지켜보던 윤흥정 중위는 그 선두가 지근거리에 이르렀을 때 일제사격을 명령해 잠시 쫓아냈으나 이들의 위치가 발각되어 위태로워졌다. 이에 적들은 병력을 양분해 도로로 정면 공격을 하거나 신월리 되마루에서 동안을 따라 우회해 포위하려 했으며, 이에 양 중대는 각자 소화기로 응사했다.
이 무렵 진천 북쪽 125고지에서 양 중대의 상태를 주시하던 1대대장 장태환 소령은 예하 중대들에게 지연전을 실시하라고 명령했고, 오후 10시 30분 경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윤흥정 중위는 남쪽 1km 94.4고지로 물러난다. 한편 이 무렵 진천 북쪽 이천 장호원읍에 북한군 1개사단[3]과 전차 36대, 포 5문, 차량 40여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추가로 북한군 2개연대[4]가 진천 북부 광혜원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또한 이 날 이준식 준장은 김석원 준장에게 사단장직을 인계했다.
7월 8일 아침 8시 북한군은 양 중대의 진지를 향해 대구경포로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뒤 585번 도로 쪽으로는 전차와 보병들이, 도로 좌측으로도 우회해 급속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양 중대는 심하게 얻어맞고 진천읍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1연대장은 진천 성석리와 남쪽의 진천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백곡천 남안의 제방을 두고 저지진지를 구축해 적 1개 사단을 막아내기로 한다. 그런데 백곡천은 수심이 얕아 도섭이 가능할 뿐더러 강바닥도 뻘이 아닌 자갈밭이라 진천교를 폭파해도 무의미해 수도사단 내에서도 이 진천교를 파괴할지를 두고 의논이 분분하였다.[5]
이후 북한군은 공격준비사격과 연막탄을 30여분간 퍼부어 유리한 상황으로 만든 뒤 성석리와 장관리 일대에서 일제히 도하하기 시작하였고, 얕은 제방 뒤에 얕게 파여진 호 속에 있었던 병사들은 작렬하는 총포탄 속에서 사상당했다. 이 무렵 1대대장 장태환 소령은 작렬하는 탄환을 뚫고 성산 초등학교 뒤에 방렬한 81mm 박격포 진지로 달려가 직접 지휘하며 적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으며, 지원 포격에 힘입어 제방의 병사들은 적들을 사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칼빈 소총을 집어던지고 옆에 쓰러진 병사의 M-1 소총을 집어 하나하나 저격하던 1중대 1소대장 김익규 중위가 전사했다.
하지만 이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3대의 전차를 진천교 북단 벌터로 보내 남안의 허약한 제방을 무너뜨리는 한편 대구경포탄을 제방 진지에 쏟아댔고, 이로 인해 오후 4시 50분 제방 방어선이 무너지고 만다. 이후 1연대는 149고지 서쪽에서 병력을 수습한 뒤 사단의 나머지 연대들이 자리잡은 잣고개로 후퇴한다.
7월 9일 오전 9시 공격준비사격 후 적들은 잣고개 양쪽에 있는 8연대의 봉화산과 18연대의 문안산으로 밀려들었는데, 이 당시 각 연대 병사들은 행군, 진지공사를 연이어 함으로서 지쳐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재편도 잦았기에 기회만 되면 적전도주할 정도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방어선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7월 10일 계속된 전투 속에서 반격 시도가 성공하고 미 공군의 대대적인 공중폭격, 기총소사까지 더해져[6] 각 연대의 사기가 상승했다. 그러나 계속된 북한군의 공세로 문안산에 이어 봉화산까지 피침당하자 수도사단은 이를 두차례 탈환하려 했으나 모두 돈좌되자, 1연대가 지키고 있는 청주 북방의 미호천 남안으로 철수해 미호천 전투와 청주 전투를 치룬다.

4. 여담


  • 국군 1연대와 19연대 양 중대가 진천 중산리에서 7월 6일에서 7일까지 치룬 지연전을 진천 중산리 전투로 별칭하기도 한다.
  • 이 당시 육군본부에선 한미 전선조정을 위해 진천을 3일간만 지켜줄 것을 기대했으나, 김석원의 사단은 이를 7일동안이나 막아냈으며, 후속 전투에서도 계속 시간을 벌어줘 낙동강 방어선을 충분히 구축할 수 있었다.
  • 21번 국도 잣고개 한켠에 공원화된 전적지 시설#이 있으며, 청주 버스 711가 이 고개를 지난다. 또한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잣고개 인근에 공군방공유도탄사령부 부대 하나가 위치해 있다.[7]

  • 이 당시 진천이 격전지가 되자 진천중학생 100여명이 학도병을 지원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전적비도 외진 곳에 있어서 진천 군민들 사이에선 잊혀진 전투이기도 하다.
  •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이 전투에서도 사단 CP를 문안산으로 옮겨 일본도를 들고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져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 고문단은 최고 지휘관이 사망하면 어쩔 거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 수도사단과 진천에서 교전했던 북한군 2사단장 최현[8]"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9]
[1] 이 와중에 윤 중위는 인적도 없는 읍내우체국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행렬에서 벗어나 수화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진천을 해방하러 곧 들어 갈터이니 환영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 "이놈아,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두말말고 귀순이나 하라" 며 욕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2]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연 대좌의 북한 2사단 6연대.[3] 훗날 15사단으로 판명.[4] 북한군 2사단 소속.[5] 미 고문관은 교리대로 파괴를 주장하였고, 김석원 사단장은 시간벌이도 안 될 뿐이라며 이를 반대하였다.[6] 사실 이때까지 미군은 한국전에 소극적으로 응했다. 그러나 동락리 전투에서 소련제 장비를 다수 노획한 걸 계기로 미국을 포함, 유엔 여론이 참전 쪽으로 기울어져 이에 한국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날아온 것.[7] 덕분에 이 일대는 비행금지구역이다.[8] 1907 ~ 1982.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인물. 최룡해의 아버지이다.[9]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