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북한)

 


[image]
崔賢
1907년 7월 15일[1] ~ 1982년 4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2.3. 전쟁 이후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1. 개요


일제강점기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로, 이후 북한의 군인, 북한의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최룡해의 부친. 6.25 전쟁 당시 붕괴 직전의 북한군을 게릴라전으로 구해냈으며, 그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친위쿠데타에 가담하는 등의 공헌으로 인민무력부장(1969년~1976년)까지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1907년 7월 15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최득권이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2]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3]
아버지가 속해있는 항일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그 후 간도에 돌아와 민족주의 성향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에는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2년까지 연길의 감옥에 복역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현은 출소한 해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9월 그보다 5살 연하인 김일성과 처음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군사활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최현은 김일성의 눈에 들어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했고, 그 결과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이 됐다. 최현은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으로 김일성과 함께 1937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출중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문맹이라서 지휘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어를 못했던 탓에, 방면군 사령관 지위에 이르렀던 김일성과 달리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진 못했다.

2.2. 한국 전쟁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 6.25 전쟁 전에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장(☆)이 됐다.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6.25 전쟁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4] 6월 27일, 최현 부대는 해주에 진입하여 조선인민군의 첫 개선부대로 마중을 받고 시내행진을 하였다. 그 후 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6월 29일 서울에 당도하였다.[5]
7월에는 김일성에 의해 38선 경비여단장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6]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제2군단장(김광협)과 그 예하의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보직해임하여[7] 제2사단장이라는 고위직책이 그에게 돌아왔다.
본래 인민군 2사단은 춘천을 빠르게 통과하여 서울 남측의 이천-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기동해 국군의 배후를 차단, 포위섬멸을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팔로군에서 인계받은 부대 정도를 제외하고 인민군 내에서 가장 정예부대인 2사단에게 해당 임무가 부여됐다. 하지만 그 시작점인 춘천 전투에서부터 일을 그르쳐버린 결과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에서 최현으로 교체됐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43세였다.[8][9] 사단장이 된 최현은 부여된 임무를 그럭저럭 원만히 수행해내며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다. 부대 이동과 재정비를 마친 8월 중순부터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8월 31일에는 창녕영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강행도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실행됐다. 이미 공세종말점을 지나 한계에 다다른 인민군은 배후가 차단되자 급속도로 와해되어 전면적인 패주를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인민군의 후퇴 당시 최현은 잔존병력을 규합하여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숨통을 틔워주었다. 당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완전 멘붕에 빠져 있었던 김일성[10]은 최현이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유엔군의 전진을 조금씩 지연시키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장군들 중에서 연안파가 아닌 동북항일연군 출신(김일성 직계)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활약한 인물이었던 셈.[11]
그 덕분인지 1950년 11월에는 김무정을 몰아내고 제2군단장(☆☆) 자리를 꿰찼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2.3. 전쟁 이후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다. 1958년 4월에는 내각 체신상의 자리에 올랐다.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는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8년 중반에서 1969년 초에 있었던 '''군 수뇌부 숙청사건[12]을 계기로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1970년 11월에 있었던 로동당 제7차 당대회 때에는 서열 5위의 정치위원으로 올라섰다.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당 정치위원·군사위원과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상의 개칭이자 북한의 국방부 장관) 등 막강한 직책들을 역임했다.
그러나 1976년 5월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주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그 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82년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탤런트 김순철이 연기했다.

4. 여담


  • 성격이 직선적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고.
  • 성격이 극도로 호전적이고 잔인하여 6.25 전쟁 발발 1년전인 1949년 봄 옹진지구 38 경비여단 지휘관으로 있을 때는 국사봉 고지에 설치된 100m짜리 전기 철조망에다 한국군 시체 3구를 매달아놓기도 했고, 그해 여름에는 남한측 백골부대(38 유격대)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면서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북측에선 그를 두고 '38선 호랑이', '부대장 아바이'라고 치켜세웠는데 본인은 그 호칭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13]
  • 사적으로는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사였다. 김책과 최용건이 김일성의 선배격이라서 김일성이 존대한 형태라면 이 사람은 김일성과 동일선상에서 있던 형태.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김정일이 수령 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에도 최현의 도움이 컸다. 1972년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원로들에게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묻자 최현이 "당연히 장남이 해야죠."라고 답한 것. 당시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라고 했으며 그때 분위기가 경직되어 김정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원로 중 한명인 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 후계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 훗날 김정일은 최현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받게 도와준 보답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 김정은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현재 북한의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차남이다.

[1] 음력 6월 6일. 1912년생인 김일성보다 다섯살 더 많다.[2] 최룡해의 조부, 그의 고향은 양강도 혜산(대한민국 기준으로 함경남도 혜산) 출생.[3] 이 때문에 최현을 가리켜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독립군 가문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좋든 싫든 김일성을 포함해서 많은 수의 북한 1세대 장성들은 항일 운동가들이 많다. 당장 김일성만 하더라도 항일 운동가 출신이 맞긴 맞다.[4] 6월 26일 16시경에 대한민국 국군 17연대의 주력부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없이 최현의 눈 앞에서 배를 타고 최현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후퇴하였다.[5] 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참조.[6]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7] 김일성은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8]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북한군은 건군 초기인지라 20대 후반의 사단 참모장, 30대 초반의 총참모장, 30대 중반의 군단장 등, 직급에 비해 나이가 많지는 않은 고위 군관들이 꽤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나이의 고위 장교들이 있는 현상은 똑같이 건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의 사단장이라던가, 30대 초반의 4성 장군이라던가...[9] 참고로 이 당시에 김광협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된 사람이 김일성 최대의 라이벌인 김무정이다.[10] 이렇다 할 전략도 전술도 없이 최고사령관으로서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조차 제때 내리지 않고 남보다 먼저 도망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다고 한다(이건 당연한거라고 할 수 있다. 연륜이나 군사 관련 지식이 낮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해 시베리아로 유형 갈 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11]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은 방호산, 김무정 등의 연안파나 남일 등의 소련파가 대부분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 그나마 유능한 인물로 김책이 있긴 있었으나 1951년에 일찍 죽어버렸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현보다 7살 연상인 최용건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남침을 반대했던 탓에 초기 작전수행은 김책이 주도했다. 김광협도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으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에 제2군단장으로서 심각한 무능을 드러내어 김일성에게 빅엿을 먹였다. [12] 김신조 사건의 뒷풀이를 위한 대숙청이었다. 이때 김창봉, 허봉학, 최광 등이 숙청되었다.[13] 정병준 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p.256~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