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최룡해
崔龍海 | Choe Ryong Hae'''

'''출생'''
1950년 1월 15일(74세)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
'''국적'''
[image] 북한
'''가족'''
아버지 : 최현, 형: 최룡택, 장남: 최준, 차남: 최성, 딸 1명
'''학력'''
[image]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image]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학사)
'''계급'''
[image] 차수
'''직업'''
군인, 관료, 정치가
'''주요경력'''
최고인민회의 8~9기 대의원(1986~1998)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 1비서(1996~1998)
황해북도 책임비서(2006~2010)
'''최고인민회의 11(보선)~14기 대의원(2007~현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2010~2016)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2012~2015)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2012~2014)
국방위원회 부위원장(2014)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2016~2019)
국무위원회 부위원장(2016~2019)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2016~현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2017?~2019)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2019~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2019~현재)'''
'''주요서훈'''
[image] 김일성훈장(1992)
[image] 공화국영웅(1993)
[image] 김정일훈장(2012)
'''정당'''

'''지역구'''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전승선거구(제23호)
1. 개요
2. 김정은 정권 이전
3. 2인자로 등극
4. 좌천 - 다시 로동당으로
5. 2차 숙청
6. 복권 후 권력의 정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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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崔龍海
1950년 1월 15일 ~
북한정치인.
황해남도 신천군 출신이며, 만경대혁명학원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최현의 아들로 혁명 2세대인 혁명 유자녀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9년 4월 12일 기준 직책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예전에는 북한군에서 가장 실세 자리라 할 수 있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자리에도 앉아 있었는데, 최룡해는 이전까지만 해도 군 관료가 아닌 당 관료로서 경력을 쌓아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끌었다. 쉽게 말해, 그동안 쭉 당 관료로 살아온 사람이 느닷없이 차수 계급의 군 실세 자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동안은 북한의 권력 서열 2위의 거물로 군림해 왔었으나 2015년 11월 이후 실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며 2016년 2월 다시 서열 3위로 자리 잡았고 2017년 10월에는 다시 서열 2위가 되었다. 김정일 시대, 김정은 시대 모두 숙청을 당했음에도 다시금 권력의 정점에 복귀하는 그야말로 불사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019년 4월에는 김영남이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명목상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2. 김정은 정권 이전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최현의 아들. 원래 군인이 아니고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 강원도 당 책임비서[1]를 하던 인물이였다. 아버지 최현이 인민무력부장을 지냈지만 군대와는 인연이 없었다. 이 지역들은 경제적으로 알짜는 아니다. 다만 신임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했는데, 황해도와 강원도라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최전방이기 때문. 아버지 최현이 김일성을 해방 이전부터 따랐고, 또한 김정일의 권력 승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그렇다고 관운에 굴곡이 없는 건 아니라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비서로 일하던 1990년대 후반 대동강 주체사상탑 근처 청년중앙회관 가라오케장에서 산하 예술단 여성들과 부화방탕하게 놀다가 김정일에게 들켜 로동자로 강등돼 ‘혁명화’를 해야 했다. 원래는 처형까지 당할 뻔했지만 간신히 처형을 면하고 지방 산골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며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등의 문헌에서 이 때의 일로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졌는데, 이후 정보가 수정되었다.
최근 방영된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 최정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혁명화 처분을 받게 된 이유는 김정일이 지시한 병원 3동을 짓는데에 쓰는 돈 일부분을 사적으로 횡령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노무현 대통령2007 남북정상회담 당시 조선로동당 황해도당 비서로서 노 전 대통령을 영접한 바 있다.

3. 2인자로 등극


최룡해가 주목 받기 시작한 시기는 2012년,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의 시대 부터이다. 최룡해는 뜬금없이 대장 군복으로 갈아입고 난데없이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정치장교의 총괄직)이 되어 리영호의 최대 라이벌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더욱이 최룡해는 12월에는 차수까지 진급하여 리영호와 동급이 되었다.
리영호는 최룡해와는 달리 애초부터 조선인민군의 짬밥을 많이 먹은 인물이었는데, 정치인으로서 대장 칭호를 부여받은 최룡해와 달리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수까지 진급한 정통 군인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모종의 내막이 있었다. 국가라는 조직체 속에는 항상 온건파와 강경파가 반드시 존재한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온건파와 강경파가 존재하는데 최룡해는 온건파인 반면 리영호는 강경파였다.[3] 김정은은 당장 해외 원조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파인 리영호를 멀리하고 온건파인 최룡해를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7월에는 리영호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서 보직해임하자 리영호가 강력하게 반발을 했고 이에 최룡해 측에서는 리영호를 밖으로 끌어내서 격리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 이 총격전으로 20여명이 사망했으며 리영호는 생사불명이라는 설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거기에 최룡해는 시종일관 리영호와 마찰을 빚어온 사이인지라 한쪽이 총애를 받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반기를 들게 되어 있는 상황이였다.
어차피 북한군은 북한의 국군이 아니라 로동당의 당군 (실제로는 김씨 일가의 사병)이고,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장교는 대체로 군사적인 재능보다는 당에 대한 충성심과 정치력으로 결판나는 자리라 갑자기 민간인 당료가 군복입고 별 네개를 단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4] 더군다나 북한처럼 국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군부가 비대해진 나라는 '''군바리들만 모아놓으면 엘리트주의에 빠져 쿠데타가 터질 우려가 높기 때문에,''' 이렇게 고위 정치인을 군부 최고위층에 심어 놓고 통제/감시하도록 하는 술책을 쓰는 경우가 많다. 결국 리영호가 모든 직무에서 사직하는 것으로 이 대결은 끝이 났다.
여하튼 뛰어난 정치력을 갖춘 인물로, 대장 칭호를 받은 달에 군부 고위 계급인 차수로 다시 진급하면서 북한의 4인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군 경력도 없이 장성이 된 장성택김경희, 박도춘, 주규창 등 정계 인사들이 군 관련 행사 때만 군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과 달리, 모든 행사에 계속 군복 차림으로만 출석하고 있어서 군 장성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어필 중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룡해가 단독으로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시찰을 나간다는 보도가 종종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최고 지도자의 수행이 아닌 단독 행동을 할 수 있는 북한 최고위 인사는 최룡해와 총리인 최영림(후에는 박봉주) 정도 뿐이라, 그 만큼 정치적 입지가 탄탄하다는 근거로 보인다.
2012년 12월 16일,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된 것이 김정일 추모 대회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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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12월 14일 은하 로켓 발사 성공 축하대회에서 김일성광장 앞 주석단에 선 모습인데, 이 때까지만 해도 왕별 위에 국장이 있는 차수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6일에 평양체육관에서 개최된 김정일 추모 대회에서는 일반 별 4개의 대장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으로 참석했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최룡해와 같은 차수 계급이었던 현영철 총참모장도 대장으로 강등된 것으로 볼 때, 김정일 집권기에 선군정치의 일환으로 너무 남발되었던 차수 계급을 점차 폐지하여 계급 인플레 현상을 억제하려는 김정은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반대로 로켓 발사 성공으로 그 동안 당에 밀려 약해졌던 군부의 발언권이 다시 강화되면서, 당 출신인 최룡해의 힘이 약화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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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에 다시 차수 계급장을 달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이 재진급에 대해 북한 전문가들은 후원자인 장성택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리고 최룡해가 차수로 재진급한 뒤로는 2013년 12월 현재까지 총참모장과 인민무력부장이 계속 대장 계급으로만 채워지고 있어서, 총정치국이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보다 우위에 있는 형세가 계속 되고 있다.
2013년 5월 22일에는 뜬금없이 중국에 특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사실상 김정은이 그를 특사로 파견한 것으로 보이며, 근래 삐걱거리는 북중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시도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3년 12월 2일, 국정원의 11월 장성택의 실각 발표에 그가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과 함께 개입했으며, 그가 군부라인으로 장성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분석이 있었다. 다만 이것은 국정원의 자체 분석이 아닌 언론과 학자, 정치인들의 추정으로 여겨진다.
이후 최룡해는 12월 16일 충성맹세모임과 12월 17일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에서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연설을 하면서 실질적인 2인자의 자리를 굳히는 듯 보였다.

4. 좌천 - 다시 로동당으로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최룡해였지만, 2014년 2월 28일 자유북한방송은 '최룡해의 감금설'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다고 밝혔다. 장성택이 13년 말에 처형 된 지라, 6개월도 안되는 기간에 북한의 거물급을 두 명이나 숙청하는 사례로 주목 받았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사건이여서 소식통은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고 밝혔다. 北, 장성택 이어 총정치국장 최룡해도 감금
하지만 3월 5일 북한 조선중앙방송 TV 보도에서 최룡해는 김정은 곁을 수행하는 등 아직 건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으로 나타나 최근 모습이 뜸했던 것은 감금이 아니라 병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보기관의 말로는 당뇨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2014년 5월 1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황병서가 꿰찬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두고 건강문제로 일시 사임한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북한 언론 보도에서 차수계급장을 달고있는 최룡해의 모습이 포착된 것이나 이전의 북한의 행태로 미뤄보면 최룡해가 실각했거나 좌천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있다. 일단은 두고볼 일이지만 실각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이 1인자를 위협할 정도로 2인자가 크는걸 두고보지 않고 더 크기 전에 최룡해를 누른게 아닌가라는 추정이 나올 수 있다. 일단 조선로동당 비서로 강등됐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화의 상징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5월 2일 원산의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 재건축 완공 기념식을 비롯한 일련의 행사를 취재한 북한 보도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을 달고 등장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념사를 낭독한 것 외에는 유소년 축구 관람 때를 제외하면 김정은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지도 못했고, 공식 호명 순서도 김정은, 황병서, 김기남, 최태복 다음 순서로 밀렸다. 총정치국장 임명 후 항상 입던 군복 대신 사복 정장 차림이어서, 차수 계급 등 군적을 반납 혹은 박탈당하고 예편되어 원래의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최룡해의 좌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김정은 권력 내의 역할 변화라는 평가가 높다. 즉 최룡해를 통해 군대를 다 잡았던 김정은이 군에 좀 더 오래 있었던 황병서를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해서 최룡해의 역할을 대신하게 만들고 건강도 별로 좋지 못한 최룡해를 다시금 자신의 주 전공이자 약간 편한 당쪽으로 옮겨오게 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입장에서 아직은 최룡해가 이용가치가 남았을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룡해의 아버지가 충신의 표본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써먹을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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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9일 열린 북한판 탑건 대회인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관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4'에 여전히 사복 차림이긴 하나 김정은 바로 왼쪽 자리를 배정받은 것이 북한 보도를 통해 확인되었다. 김정은 부부 바로 오른쪽은 새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앉았다. 이로써 처벌이나 강등보다는 건강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군무에서 물러난 것이라는 추정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전투준비태세가 김정은 집권이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허술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임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에 2015년 7월에 탈북한 북한의 한 고위인사는 이 시기에 최룡해가 처형될뻔 했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2014년 4월 15일 김정은이 군인 축구경기를 관람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행사 시간이 2시 였는데 김정은은 5시가 넘어서야 행사장에 나타났고, 행사에 동원된 군인들은 12시부터 경기장에 입장해 꼼짝 없이 5시 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김정은은 행사 조직을 잘못해 많은 군인이 대기하느라 큰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를 트집 잡아 크게 화를 내었고, 총정치국 행사과장은 다음 날인 4월 16일 바로 고사기관총으로 공개총살 되었다. 이는 김정은이 최룡해를 제거하기 위해 공연히 생트집을 잡은 것으로, 행사과장이 처형된 날 열린 비공개 사상투쟁회의에서 최룡해는 울면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장성택 처럼 군인들에게 끌려 나갔고, 이후 약 한달을 구금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이유인지는 몰라도 김정은은 최룡해를 처형하지 않았고, 총정치국장에서 해임하는 걸로 그쳤다고 한다.
2014년 9월 24일 국가체육 지도위원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동시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서는 해임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황병서에게 군 권력을 넘겨준 만큼 이 직책도 황병서에게 넘어가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이전만큼은 못한 직책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직책과 함께 근로단체 핵심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을 담당하는 근로담당 비서직 그리고 김정은이 중시하는 체육을 총 담당하는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만 봐도 당 내 입지는 여전히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래에 나오다시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대표로 방남하는 것만 봐도 2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력서열은 여전히 높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2014년 10월 4일에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김양건과 함께 참석했다. 일단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라는 직책상 그의 참석은 명분이 있긴 하다. 최룡해 개인적으로는 공식적인[5] 최초의 방남이다.
이 날 폐막식 현장에서는 임수경과 만나기도 했는데 둘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에서 각각 북한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위원장 자격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만난 적이 있다.
2015년 1월.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로동당 부부장 김여정이 최룡해의 둘째아들과 결혼했다는 설이 나왔다.기사 하지만 북한을 방문한 후지모토 겐지는 낭설이라고 이를 부정했다.
2015년 9월 3일에 실시한 중국의 열병식에 구석에 박혀있다가 바로 귀국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바로 옆에 서는 서열 2위의 대우를 받았다기사

5. 2차 숙청


이렇게 로동당 내에서 활발한 대외활동까지 하던 그가 돌연 2015년 11월 사망한 북한의 원로이자 인민군 원수 리을설의 국장을 주관할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로동당의 높은 관료이기 이전에 혁명 2세대에 해당되는 최룡해가 혁명 1세대의 장의위원에 빠진 것에 대해서 김정은에 의한 실각설, 숙청설이 나돌았다.[6] 로동당 창건일 기념식 전후의 중국과의 외교에서 성과가 없어 근신 중이라는 설도 있다. 이로 보아 북한의 권력 제3인자라고하나 입지가 확고한 건 아닌 듯. 실제로 위에 상술 되었듯이 2014년 4월에도 김정은은 사소한 트집을 잡아 최룡해를 구금하였고, 최룡해는 울면서 자아비판을 했었다고 한다.
결국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건설 책임을 맡았다가 발전소 가동 과정에서 발생한 누수 사고[7]에 책임을 지고, 업무 소홀과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로 함경도 소재의 협동농장으로 쫓겨나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기사 기사에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 혁명화 교육의 사유가 단순한 업무 소홀이라면 금방 복권될 수 있겠지만, 김정은에 대한 불경죄라면 복권이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12월 30일 김양건 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장례위원회에 서열 6위 당 비서로 이름을 올려놓음에 따라 복권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협동농장으로 쫓겨난게 아니라 평양 인근에서 자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기사

6. 복권 후 권력의 정점으로


2016년 1월 20일 김정은을 수행하면서 완전 복권되었음을 알렸으며, 2월 2~3일 열린 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인민군위원회 연합 확대회의에서 김정은 왼쪽자리에 바로 앉으면서 서열이 곧바로 3위로 상승, 권력의 정점에도 다시 올라섰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기사
2015년 11월에 있었던 실각에 대해서도 자신의 장남이 한국드라마를 본 것이 보위부에 걸리자 직접 자신이 김정은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혁명화를 자처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마디로 장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처세의 달인 급 행보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기사
2016년 5월에 열린 제7차 로동당 대회에서 서열 5위에 오른 모습이 포착되었다. 앞에 위치한 사람이 김영남, 황병서, 박봉주 이런 식이기 때문에 사실상 서열 2위나 다름 없는 위치다. 이전 서열 5위였던 김기남을 밀어낸 모습에서 확실히 김정은 체제에서 견고한 위치를 자랑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5월 9일 내각 총리인 박봉주와 함께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뽑히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있음을 확실히 하였다. 무엇보다도 당 내 인사 중 유일한 정치국 상무위원이기 때문에 당 중심으로 이끌어나갈 김정은 체제에서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위치를 상당히 공고히 했다는 평가가 높다.기사
5월 21일 강석주 전 비서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면서 확실히 2인자의 위치에 다시금 올라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새롭게 신설된 국무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당을 대표해 들어감에 따라 위치를 확고히 했다. 기사
8월,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올림픽을 구경하러 갔다. 기사
2017년 들어서는 다시 2인자로 복귀한 모습이다. 이미 전해 12월에 쿠바 카스트로 의장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고 기사, 1월에는 현지 시찰에 나섰는데 북한에서 경제관련된 시찰에서 박봉주 총리 이외의 인물이 시찰한 사례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2013년 시찰이 최근일정도로 이례적이다. 기사
이후에도 꾸준히 본인의 존재를 과시하다 2017년 10월 기존의 직책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조직지도부장으로 추정)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무려 8개나 되는 직책을 가지게 되면서 2인자로 완전히 복귀했다. 기사 특히 그동안 공석이었던 조직지도부장에 그가 임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만 봐도 김정은 시대의 확고한 2인자라 봐도 무방할 듯 보인다. 어찌보면 그의 총정치국장 시절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강력한 편이다.
그리고 국정원 첩보에 의하면 2017년 11월 그의 주도하에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총정치국 제1부국장을 처벌했다고 한다. 기사
2017년 12월 국가체육지도위원장 직책을 내려놓은 것으로 알려졌다.[8] 이는 그가 좀 더 당의 업무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조직지도부장 임명설이 나온지 1년여만인 2018년 1월, 통일부는 최룡해가 조직지도부장으로 임명된 것을 공식 확인했다. 이어 3월 방중에서도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이 최룡해를 조직지도부장이라고 소개하여 교차 검증이 되었다.
이후에는 김정은이 해외로 나가면 대부분 북한에 남아 있는 2인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제1차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다만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바로 뒷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맞이했으며,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가진 기념식수현장에서는 김정은을 대신해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식수를 갖기도 하였다.
2019년 4월 11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에서 김영남이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새로 임명되었다. 또한 북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도 오르며 확실한 2인자가 되었음이 확인되었다.[9]

[1] 한국의 강원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은 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도당 책임비서는 그 도지사급 위에 군림하는 직책이다. 굳이 우리나라에 대응하면 도당비서는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열린민주당민생당정의당시도당 위원장 정도 된다.[2] 자세한 내용은 김정일 항목 참고.[3] 물론 여기서 온건, 강경은 상대적, 비교적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세력이 특별히 우호적이거나 평화적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김씨 세습왕조 유지라는 측면에서 강온파의 목표는 동일하나, 강경파는 외부와의 대결을 통해 단결을 이끌자는 입장이고, 온건파는 개혁 개방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북한 지배층 내에서도 강경파에는 군부인사들이 많고, 온건파는 관료들이 많다.[4] 소련에서도 강철의 대원수독소전쟁이 터지자 스스로 원수 계급을 달고 행정을 총괄했다. 전쟁 초기에는 군사 작전에도 개입했지만, 예전 정치위원 시절 클래스 어디 안 가서 몇 번 말아먹더니 그만 뒀다고 한다. 흐루쇼프 또한 중장 정치장교 계급을 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당장 2013년 현재 러시아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도 관료 출신이다가 비상대책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연직인 비상대책군 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육군 대장 계급을 받고 그 뒤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대장 계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5] 극비리에 제주도에 방문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6] 거기에 최룡해처럼 혁명 2세대에 해당되는 고위 간부들도 이을설 장의명단에서 대규모로 빠진 게 확인되어 일각에서는 뿌리 깊게 박혀있던 빨치산 세력들을 다른 파들을 다 쳐낸 지금에서야 쳐내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7] 해당 공사에 특수 시멘트가 아니라 일반 건축용 시멘트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사 전반에서 인력으로 하다보니 품질이 균일하지 않는 등 북한식 건설 특유의 모든 문제들이 그대로 접목되었기에 주변 주민들이 해당 댐의 안정성을 의심하기도 한다고...실제로 조선중앙TV에 방송된 발전소 모습을 보면 물이 새는 모양인지 댐 곳곳에서 젖은 자국이 포착되기도 했었다.[8] 후임으로 최휘가 임명되었다.[9] 총정치국장도 역임한 경력이 있는만큼 김영남과 조명록의 위세와 권한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