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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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0년 7월 5일부터 7월 8일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대한민국 육군 6사단 임부택 중령이 이끌던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 맞서 승전한 전투.
2. 전투 직전 상황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히 돌아가던 6월,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히 춘천을 방어하던 6사단과 강릉지역을 방어하던 8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이 엄청난 선전을 하여 적 2군단의 진격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를 온전히 보전하고 철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육군은 19연대를 이천에, 2연대를 충주지역에, 7연대를 원주에 배치하여 저지토록 했지만 너무 넓은 면적을 6사단 홀로 방어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8사단이 후퇴하면서 원주내륙지방을 방어할수 있게되자 7연대를 음성지역으로 이동해 무극리일대를 점령한 후, 현재 육군정보학교, 육군특수전사령부, 제7기동군단, 제7공병여단, 국군교도소, 육군항공작전사령부 등이 있는 이천시 장호원읍을 확보하여 적을 저지하게 하였다.
3. 전투
3.1. 7월 5일
사단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7월 5일 충주를 출발하여 무극리 일대를 점령하고 이천시 장호원읍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2. 7월 6일
그리하여 음성에서 무극리로 이동하던 1대대는 오후 1시쯤에 조선인민군 육군과 대치하였다. 한편 2대대는 부용산을 선점하여 북한군의 진출로를 사전에 차단하였으며 3대대는 동락리에서 적 정찰대를 격퇴한후 생극으로 이동하였으나 북한군의 역습으로 포위될 상황에 이르자 유천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3.3. 7월 7일
이전 날의 전투로 아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으로 착각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정찰을 소홀히 한 채로 동락리를 통과하고 차량을 이용하여 용원리 일대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동락리에 진지를 구축한 3대대는 임부택 중령의 명령으로 이동중 03시쯤에 이동중이던 북한군을 발견하여 9중대가 먼저 교전을 실시하였으며 북한군 지휘부가 이를 소규모 부대의 소란 쯤으로 안 채로 차량 속에서 대기하고 있자 그 틈을 타서 나머지 2개 중대가 06시쯤에 적의 주력을 측면에서 기습하였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한 채로 분산되어 도주하였다. 그러자 3대대는 신덕저수지 북쪽으로 신속히 전개하여 적을 섬멸하였고 다수의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한편 북한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용산을 미리 선점하고 있었던 2대대는 당시 동락초등학교의 교사였던 김재옥의 제보 덕분에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에서 숙영중임을 알고 공격을 준비하던 중 새벽에 용원리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3대대가 공격 중인 것을 깨닫고 부용산 점령 임무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타격을 줄 절호의 찬스를 위하여 즉시 동락초등학교로 진격하여 기습을 가했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당황한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으며 국군은 운동장에 사열되어있던 적 장비 다수를 노획했다.
3.4. 7월 8일
비록 값진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날 아침 국군이 더 남쪽으로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선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후퇴하였다.
4. 피해상황
북한 육군은 1,000명이 전사하고 132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약 2,000명의 인적피해를 보았으며 대포 14문, 기관총 15정, 소화기 2,000정과 장갑차 10대, 차량 80여 대를 잃었다.
5. 의의
'''개전 이래 국군이 최초로 거둔 육상전에서의 승전[1] '''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7연대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또한 소련제 장비 다수를 노획하며 소련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해 UN 회원국 등이 UN군을 결성해 이 전쟁에 참전하는데 결정적 이유를 제공했다. 이는 직후 진천 전투에서 미합중국 공군이 화력 지원을 하는 이유가 되었다.
6. 이야깃거리
승전 보고를 받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에 1계급 특진과 50만 원의 보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안그래도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한테 호되게 당하는 바람에 초기작전이 물거품이 되버린 상황에서 또다시 6사단에게 패했다는 보고를 듣자 "남조선에는 6사단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그놈을 당장 섬멸해야 한다"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올린 7연대와 예하 대대[2] 들은 아직까지도 6.25 전쟁 발발 이전의 부대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부대로 남아있다.[3]
당시 동락초등학교 여교사였던 김재옥 여사는 이 일로 연이 닿아 당시 소위였던 이득주 중령과 결혼하여 살던 중 1963년 고재봉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마침 친척집에 가있어서 화를 피한 큰 아들만 빼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