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탄10용사

 


1. 개요
2. 상세
2.1. 이전 상황
2.2. 전개
2.3. 이후
3. 13연대장 김익렬의 증언
3.1. 사건 개요
3.2. 허위 조작 보고
3.3. 대통령까지 보고된 성대한 장례식
3.4. 평양에서의 진실
3.5. 증언의 신빙성
3.6. 기타, 반응 및 생존설
4. 기타
5. 군가


1. 개요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에서 조선인민군 육군 토치카자폭 공격한 대한민국 육군 군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명단은 이하와 같다.
'''지휘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1] - 전남 광산군 송정읍 서봉리[2]
'''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3] - 전남 완도군 노화면 동천리[4]
'''분대원'''[5]
박평서 일등병 - 전남 나주군 공산면 남창리
황금재 일등병 - 전북 익산군 용안면 법성리
오제룡 일등병 -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삼은리
윤옥춘 일등병 - 충청남도 대전시 문화동[6]
양용순 일등병 -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7]
김종해 일등병 -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8]
이희복 일등병 -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속달리[9]
윤승원 일등병 -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안녕리[10]

2. 상세



2.1. 이전 상황


6.25 전쟁 발발 이전인 1948년부터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은 38선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무력 충돌은 남북이 정식으로 국가를 수립한 1948년 후반기부터 보다 더 격화되었으며 개성도 이러한 충돌이 격화된 곳들 중 한 곳이었다.
개성특별시에 위치한 송악산은 상당히 골 때리는 곳이었다. 개성 시내는 명백히 38선 이남에 위치해있었지만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있었다. 즉 북한군은 그냥 송악산 고지에 앉아서 개성 시내를 마음껏 감제할 수 있었고 한국군 입장에서 송악산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때문에 1948년부터 한국은 대통령 이승만까지 나서서 송악산을 점령하라고 성화였고 대놓고 38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한국군이지만 송악산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1949년 5월 3일, 조선인민군 육군은 이러한 대한민국 육군의 여러 진지를 기습하여 함락했다. 기습 당한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즉시 반격했으나 실패했다. 고지에 북한 육군이 방어 시설로 구축한 토치카를 제압하지 않고는 반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2. 전개


5월 4일 낮 12시, 박창근 보병하사가 먼저 수류탄을 들고 토치카에 접근하여 토치카 하나를 파괴했다.
이와는 별개는 한국 육군은 토치카를 파괴하려는 특공대를 조직했고 81mm 박격포 포탄과 수류탄을 연결하여 급조한 폭탄을 각자 들고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접근하여 토치카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즉 '''자폭'''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자폭을 명시하진 않았지만 화력 엄호 없이 보병들만 폭탄을 들고 돌진하여 토치카를 파괴하라는 건 사실상 자폭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사단 제11연대 하사관교육대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11]가 제일 먼저 자원하고 뒤이어 자원한 특별공격대 8명까지 합해 총 9명은 이 날 오후 14시 토치카로 접근했고 북한 육군의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토치카에 돌격하여 자폭하나, 당시 한국 육군의 관측 기록으로는 4개만 발생한 폭연을 근거로 토치카 4개만 파괴됐으리라 추정되지만 국가보훈처등의 소개를 보면 토치카 10개 파괴에 4개의 고지탈환이라고 명시되어있다. 어쨌든 그들의 자폭 공격으로 북한 육군 토치카 상당수가 무력화 됐기 때문에 한국 육군은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2.3. 이후


군인 정신의 표상으로서 추앙받은 이 군인들은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받으며 서부덕 이등상사는 중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했다. 전후에도 국군에서 육공군 안 가리고 정훈·정신 교육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가 되었다. 이 군인들이 소속된 제11연대의 부대명은 아예 '육탄부대'가 되었다.
이 군인들을 다루는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가 제작되기도 했고 육탄10용사를 기리는 군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매년 이 군인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도 열리며 이 군인들의 출신지에는 충혼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1사단 예하 부대 상당수는 부대 입구에 육탄10용사 관련 문구를 써 넣는다. 병점역동탄신도시 일대를 잇는 도로 중 하나는 이름부터 '10용사로'이다. 물론 이것은 도로가 지나가는 반송동에 있는 육탄10용사기념공원에서 따온 것이지만, 용사 중 한 명인 김종해가 동탄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 군인들이 자폭 공격한 송악산 일대는 휴전 후 북한령으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미수복 지역이다.
현재 매년 5월 4일마다 파주 통일 공원에서 육탄10용사 추도식이 열린다.

3. 13연대장 김익렬의 증언


1949년 5월 4일 1사단 13연대는 사단의 예비연대로 교전중인 11연대의 상황에 따라 투입하도록 대기상태에 있었다. 당시 13연대장은 김익렬 대령이었고, 1964년 5월 4일 전 국방부장관인 박병권 장군의 자택에서 증언하여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 실렸다.

 [ 송악산지구 육탄 10용사의 진상 ]
[image]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1권》 (2003년) 69쪽 원문


3.1. 사건 개요


육탄 10용사 사건이 펼쳐진 송악산5.4전투 작전을 수행한 11연대장인 최경록 중령은 격전중인 일선부대로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 박 소위에게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여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의 포로가 되었다.''' 정보주임 장교는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소위를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3.2. 허위 조작 보고


정식보고에서 11연대장 최경록은 사단장에게 ''''사실은 참모보고는 사실이 아니고,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정정보고 하게 되었다. 당시 연대장인 최경록 중령과 공병소대장인 박 소위는 사실상 친구지간으로서 일본 학병의 동기인가 하여 막역한 사이였고, 따라서 박 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서는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3.3. 대통령까지 보고된 성대한 장례식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11연대장의 정식보고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육탄 10용사가 나왔다''''라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다. 사단장은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준비를 하였고, 당시 사단장 김석원과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루 전 불승인하였으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라고 권고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3.4. 평양에서의 진실


북한군의 포로가 된 육탄 10용사는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13연대장이었던 김익렬 본인이 6.25 전쟁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랬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3.5. 증언의 신빙성


증언자인 김익렬 장군은 제주 4.3 사건에서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에 있었던 인물로 '4.3의 진실'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사후 공개하라는 부탁을 남겼고, 회고록 말미에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라는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이 사건에 비해 '육탄10용사'는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또 다른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김익렬 장군은 자신이 경험한 제주 4.3 사건처럼 송악산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고, 내부 사정과 배경에 대해서 소상히 알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15년이 지난 동월 동일인 1964년 5월 4일, 전 국방부장관인 박병권 장군의 자택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대담했다면 그 자체만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김익렬 장군의 숨겨진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증언록에 대하여 국방부 민원으로 2011년 삭제되었다는 주장의 글이 지만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게시되었고, 이 내용은 지만원[12]이 연재한 뉴스타운 기사에 ''''1964년 김익렬이 육탄 10용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여 2011년에야 뻥이었음이 들통났다''''라고 작성되었다. 그는 장군의 제주 4.3사건 회고록 역시 필체를 빌려 창작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증언록이기에 녹음이나 수기 원고와 같은 기본 자료 없이 증언록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큰 논란이 되기에 4.3제주 사건의 회고록처럼 김익렬 장군이 차후 공개해달라는 당부를 남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국방부는 증언록 기본 자료와 증언록에서 언급된 북한 방송을 녹음한 자료,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3.6. 기타, 반응 및 생존설


  • 증언록에서 언급된 '박모 소위는 박후준 소위의 행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국방일보 기사에서 '사단 시설장교 박후준 소위의 고안으로 81㎜ 박격포탄과 폭약을 장치해 이를 들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작전을 세웠다'라고 되어있는데 시설장교는 공병소대장의 직책이기도 하다. 증언록 편집자는 '박모 소위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예편하였는데 이름이 불명하다.'라는 주석을 남겼는데 인물을 특정했지만 밝히지 않았을 수 있다.
  • 김익렬 장군의 증언과 달리 군 정훈이나 전쟁기념관 측에서는 여전히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교육하고 있다.[13]
  • 6.25전쟁, 베트남 전쟁 참전자인 박경석 예비역 준장이 백선엽을 비판하면서 '당시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이 부하의 죽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될 지도 모른다.#
  • '육탄십용사, '날조'로 탄생한 신화!'프레시안
  • 육탄10용사가 생존하여 북한 육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육탄10용사 중 단독으로 돌입해 자폭한 박창근 하사만이 시신이 발견되었고 서부덕 이등상사 등 나중에 돌입한 9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9명도 폭연이 확인된 것은 4개이므로 최소한 5명은 자폭에 실패했다. 이 군인들은 접근 중 전사했을 수 있지만 포로로 잡혔을 개연성도 있는 데다가 육탄10용사 중 특공대장인 서부덕 이등상사와 오제룡 상등병을 자칭하는 자들이 '평양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 군인들은 북괴에 귀순해서 잘 산다는 것과 자신들의 교우·친척·인척 관계를 자세히 말했고 목소리도 실제와 비슷했다. 해당 내용을 잘 정리한 포스팅

4. 기타


이런 자폭 공격을 찬양해야 할지 논란이 있다. 잘못하면 목숨을 내다버리는 카미카제 같은 미화로 얽힐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육탄10용사의 행적을 찬양하는 쪽에서도 되도록 이 군인들의 '희생 정신'만을 기려야 하지 이 군인들의 자폭 자체는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한 수단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러한 자폭 돌격과 대전차오함마술을 행한 일은 육탄10용사들 외에도 꽤 많이 전해진다. 이렇게 분전했는데도 초기 한국 육군의 오래되어 바로잡기 어려운 문제점인 열악한 장비와 북한의 기습 침공의 충격 탓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전방에 배치된 여러 사단은 대부분 참패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육탄10용사와 비슷한 예로 춘천-홍천 전투의 육탄 11용사가 있다. 이들은 선두 전차가 피격당해 멈춘 틈을 타 해치 안으로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넣거나 승무원을 사살해 자주포전차 10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게다가 이들은 '''전원 생존'''하였다.
이러한 자폭 돌격이 한국전쟁 당시 성행한 이유는 대한민국 육군의 초창기에 미군이 제공해서 개전 전에 보유하던 바주카와 중화기로는 밀려오는 북한 육군의 전차부대를 도저히 방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14] M3 105mm 견인곡사포가 그나마 조금 유효하긴 했지만 물량이 부족하여 무작정 쏠 수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대전차 지뢰를 직접 가지고 돌격하여 터뜨리는 전술을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 북한 측 지휘관인 최현은 이후 진천 전투에서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과 재격돌했고, 그의 사단에 일주일 가량 발목이 묶이자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이 명칭이 붙은 도로명이 경기도 화성시에 존재한다. 동탄1신도시 외곽도로중 일부의 도로명으로 육탄10용사로가 있다.

5. 군가


육탄10용사를 기리는 군가인 '육탄10용사' 군가가 있다.

<1절>
비둘기 고지에는 초목도 운다
적탄이 비 오던 날 아군의 용전
들었나 포연 속에 적군의 얼굴
서상사[15]는 원합니다 특별공격
부대장을 울려주던 애원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2절>
유엔 고지에는 적구도 운다
토치카 파괴하던 십삼시 이십분
붉고 검은 얼굴위에 방긋 웃었소
내 한 젊은 장한다짐 최후의 부탁
지축을 흔드는 폭발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1] 현재의 중사. 이후 소위로 추서.[2]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3] 현재의 상, 병장. 이후 박창근 하사를 포함한 아래 아홉 명은 전원 상사로 추서되었다.[4] 現 노화읍.[5] 당시 분대원들은 모두 일등병이었으며 이는 현재의 일, 이병에 해당한다. 이후 박창근 하사와 함께 상사로 추서됨.[6] 1929년 4월 4일생. 1971년 5월 10일에 고향인 대전광역시 문화동에 위치한 대전 문화공원에 전공비가 세워졌다.[7] 10용사 중 유일한 이북 출신이다.[8] 1933년 5월 6일생. 현재의 화성시 반송동.[9] 1928년 3월 28일생. 현재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위치해 있다. 2009년 6월 19일에 군포시에 위치한 금정동 한얼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10] 현재 화성시 안녕동.[11] 이 당시 대한민국 국군 사병의 계급은 다음과 같았다.
특무상사=원사
일등상사=상사
이등상사=중사
일등중사 및 이등중사=하사
하사=상, 병장
일등병=일, 이등병
이등병=훈련병(무등병)
[12] 5.18 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인물[13] 증언의 신빙성이 문제일지, 포로로 잡힌거도 모르고 산화했다고 선전하는 쪽빨리는 짓을 한 군 위신상 문제일지는 모른다. 이것도 통일 이후나 누군가 총대를 매야만 그나마 진상이 밝혀질지도 모른다.[14] 이 바주카가 SU-76M 자주포는 잡을 수 있었지만 T-34에는 거의 소용이 없었다. 미군조차도 스미스 대대가 탈탈 털리고 전쟁 초반 골치를 썩다 부랴부랴 시제품까지만 나와 있던 M20 슈퍼 바주카를 가져오고 나서야 비로소 T-34를 잡을 수 있었다.[15] 서부덕 상사